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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50화 (94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50화

분위기 (1)

정복을 입는 게 익숙하지가 않다. 비극적인 납치사건 당시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요즘은 나풀나풀거리는 옷들만 입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보니 이 옷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이쪽에 달라붙는 것이 시야에 보였다. 아마 여러 가지 말을 전하기 위해서겠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기 힘든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윽고 눈을 꽉 감은 사제 하나가 입을 열어왔다.

“명… 명예추기경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페스 주교님.”

“아….”

“이번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고 면밀하게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소행일 확률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네.”

“파란 길드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살짝 당당하기는 했어.’

내가 생각해도 거침없는 모습,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은 설정이었다는 느낌은 든다.

상심하거나 풀이 죽거나 혹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줄 알았던 명예추기경,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던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사건이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지며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

아마 갈아입은 옷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아무래도 신관복보다는 이 옷이 더 카리스마 있어 보이잖아.

지금까지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정이나 가여움이었다. 명예추기경에 대한 걱정과 그가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대부분이었다.

근처에 있는 성기사와 사제들은 그런 표정을 보내지 않는다.

상처를 딛고 일어난 성자. 마음을 굳게 먹은 성인, 대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왔던 대륙의 영웅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보인다.

‘김현성만 영웅이 아니자너.’

나도 영웅이잖아.

교황청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음모.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대륙의 이상 현상, 베니고어 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한 사제들.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템플러 젠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됐다는 반응도 있을 수가 있다.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 있는 명예추기경이 걱정됐을 테니까.

문제는 길드원이었다.

사건의 내막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김창렬은 일단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대부분 인원들의 눈에 걱정이 묻어나온다.

방금 전 함께 있었던 조혜진, 박덕구, 김예리는 물론이거니와 사제라인에 서 있는 선희영과 엘레나도 마찬가지.

이미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걸 확인했을 테니 더욱더 걱정될 만하겠지.

비슷한 의미에서 안기모도 다르지 않다. 피에 미친 광전사가 놈의 롤모델이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성기사였으니까.

대장장이 유아영, 마도사 황정연, 흰둥이를 꼭 껴안고 있는 알프스와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신입 길드원 벨리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정하얀과 불안한 얼굴로 정하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한소라까지.

모든 길드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라 살짝 반갑기는 했지만 얘네들 반응이 조금 신경 쓰인다.

걱정스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 심지어 몇몇은 눈치를 보고 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상처투성이였던 부길드마스터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젠의 무죄를 주장했던 이쪽과는 다르게 저쪽은 범죄자를 담그고 싶어 했고 결국에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냉전 상태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만남을 거부했던 것은 이쪽이었지만 길드원들이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막말로 얘네들이 본 내 모습은 상처 입고 쓰러지기 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안 좋네요.”

“…….”

“…….”

‘농담 한마디도 못 하겠자너.’

애매한 침묵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충신 창렬이.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너는 내가 꼭 챙겨 줄게.’

이번 사건을 눈감아준 충신.

단순히 눈을 감아준 게 전부가 아니지. 당시 김창렬은 내 호위를 자처하고 있었으니까.

임무 실패에 따른 본인의 평판이 깎여나가는 것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파란 길드의 특성상 녀석을 나무라지 않았겠지만 아마 김현성이나 조혜진의 질타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길드 차원에서 징계를 받았을 테고, 감봉도 있었겠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김창렬이 유능한 것을 알고 있다.

녀석이 내 행적을 놓치고, 심지어 흔적까지 밟을 수 없었다는 건 근무 태만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 창렬아. 너만은 항상 형아 편이었어.’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이 김창렬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원망의 대상이 많아지는 게 도움이 됐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

심지어….

“오셨습니까? 현성 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뒤늦게 들어온 김현성마저 녀석을 바라보는 표정이 탐탁지 않다.

‘우리 창렬이는 죄 없는데… 어떻게 해. 창렬이… 생각보다 더 고생했었나 봐.’

“창렬 씨에게 내린 징계를 푼 기억이 없습니다만.”

‘회의에도 참석 못 하게 했어?’

“죄송합니다. 길드마스터.”

“제, 제가 불렀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기영 씨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규칙은 규칙입니다. 근무 태만, 임무 불성실 등을 사유로 현재 창렬 씨는 정규길드원의 지위에서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고로 그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기영 씨. 전시였다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행위입니다.”

‘아니, 뭔 얘 목까지 건드리려고 그래.’

시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었나 봐.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창렬을 바라보는 유아영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있는 상태.

얘가 그동안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렬 씨 탓이 아니에요. 현성 씨. 사실 제 행실에 문제가….”

“기영 씨 행실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냐, 문제 있었어. 완전 문제 있기는 했어.

“이번 일을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징계를 철회해 주셨으면 해요. 물론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길드의 기강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지만, 그만큼 파란 길드는 창렬 씨의 힘을 필요로 해요.”

던전 공략에서 레인저 계열의 중요성이야 백날 떠들어도 모자라지.

“하지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후우….”

“다른 분들도 너무 창렬 씨를 나무라지 않았으면 합니다. 창렬 씨의 실수가 아니라 제 실수였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겼고… 제 안전이나 저를 호위하시는 분들의 상황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으니까요.”

“형… 형님이 잘못한 게 아니요.”

“창렬 씨에게 제대로 협조하지 않은 것 역시 제 불찰입니다. 이번 사건은 창렬 씨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제 잘못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야. 너는 잘못 없어. 이번 원정으로 공 좀 쌓고 다시 신뢰받으면 돼. 아영이도 너무 걱정하지 마. 헤비마우스 김창렬. 명예추기경은 은혜를 잊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김현성. 시바.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올 거야?’

“창렬 씨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니 징계 역시 나누어 받는 것이 옳습니다.”

‘진짜로 창렬이 저대로 놔두는 건 아니지?’

“…….”

“후우….”

‘그래. 시바 그래야지.’

“징계를 철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뜻에 따르겠습니다. 길드마스터. 기회를 주신 만큼….”

빈정 상해도 단단히 상했나 보네. 김현성은 김창렬의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기영의 간곡한 청원 때문에 마지못해 징계를 철회한 느낌.

방금 사건의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분위기가 좋지 않다.

매번 떠들썩했던 분위기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어색한 눈치 게임과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침묵, 서로 잡담을 나누는 예전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상황, 웃음소리 대신 침을 삼키는 소리가 장내에 감돈다.

‘이건 에반데….’

슬그머니 박덕구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점.

“형… 형님….”

‘아니야. 그거 말구. 동정 여론이 필요한 게 아니야.’

“끄… 끄윽….”

‘울지 마. 시바. 울지 마.’

“흐으윽… 흐윽….”

‘네가 울먹거리니까. 시바 하얀이도 울려고 하잖아.’

“부, 부길드마스터….”

‘하얀이가 우니까. 시바 엘레나도 울려고 하잖아.’

“…….”

‘엘레나가 우니까. 시바 조혜진도 울려고 하잖아.’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드원이 있나 둘러봤지만 당최 답이 나오지 않는다.

눈물은 순식간에 전염된다. 이 상태로 약 1분여만 지나도 길드원 중 반이 질질 짜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다급하게 한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보자. 눈치가 빠른 만큼 내가 뭘 원하는지 눈치채 줄지도 모른다.

‘안기모. 제발….’

“다들…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부길드마스터가 기운을 차렸으니 좋은 날이 아닙니까. 이렇게 모든 길드원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부길드마스터가 보고 싶은 건 여러분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아닐 겁니다.”

‘그래. 시바. 그거야.’

“맞, 맞다니까.”

‘좋아.’

“형, 형님이 원하는 모습은 이런 게 아닐 거요. 자! 누님도 뚝! 엘레나 누님도 거 그만 훌쩍… 거리쇼.”

“기모. 아저씨 말이 맞아.”

“자. 다들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라니까!”

슬픈데 억지로 활기찬 척하니까 보기 더 이상한 것 같아.

그래도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단 차 한 잔씩 마시는 게 좋겠네요.”

커다란 원탁이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김현성과 아무 이야기나 주절거린다.

사실 바쁘다면 바쁜 상황이었지만 지금 이 상태로 원정을 가는 것보다는 낫다.

“네. 그렇습니다.”

실없는 소리에 웃어주기도 하고….

‘이 새끼 행복해하자너.’

“그러고 보니 최근에 화이트폴이….”

“저도 들었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폰 이야기도 주절거린다. 차를 한 번 홀짝 들이켠 이후에는 하얀이랑 이야기하고, 자연스럽게 우리 돼지도 한 번 갈구고. 신입 길드원 벨리에한테는 길드 생활이 어땠는지 물어본다.

“알프스 선배님이 잘 챙겨 주셔서 적응하는 데 문제는 없어요! 부길드마스터!”

“네. 벨리에는 대륙 역사에 관심이 많은지, 가입한 이후에는 길드 기록보관실에 틀어박혔었어요.”

“그렇습니까?”

“알프스 선배님… 제가 언제.”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있었어요. 새벽까지 있었던 적도 있었고… 27군단 소환사태, 부활의 날… 조금 보기 힘든 것들도 많았을 텐데….”

‘그래. 송수경 사건 같은 건 나도 다시 보기 조금 그래. 연출이 너무 잔인하기는 했어.’

“당시에 저는 길드원이 아니었으니까요. 조금 더 파란 길드를 이해하고 싶, 싶어서… 길드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저만 겪지 못한 일이니… 여러분들이 겪었을 아픔에 공감하고… 성… 성, 성, 성장해서… 조금 더 파란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

“벨 후배… 거, 진국이구만… 이런 길드원이라면 몇백 명이든 찬성이요.”

“기특하군요. 그런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거, 희영 누님도 신입 길드원들이랑 조금 더 가까워져 보쇼. 누님은 벽을 쳐도 너무 치는 것 같다니까.”

“…….”

‘잡혔다.’

예전과 같은 분위기로 돌아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서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거, 벨 후배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는 거 아니요?”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요!!!”

“형님의 잘생긴 얼굴을… 아니, 왜… 소,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 아… 저, 정하얀 님도 계시니까. 저는 어디까지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만 좀. 놀려. 덕구 아저씨. 신입. 길드 탈퇴하면 어떻게 하려고.”

“아! 미, 미안하다니까. 내가 조금… 심했….”

밀려 있던 이야기들도 나눈다.

“거, 엘레나 누님. 엘프 왕국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요?”

“현재 오라버님께서….”

“그렇구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 그리고 오라버님께서… 이번에는 조혜진 님께 꼭 대답을 듣고 싶다고 하셨어요.”

김현성이 당황할 만한 소식이었다.

“엘리오스 님이 혜진 누님한테 대답 들을 게 뭐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고백이라도 받은 거요?”

“…….”

“진짜요?”

“현시점에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중요한 일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해. 질투심 유발 작전이라도 해야지. 그래야 현성이가 신경 쓰이게 하지. 너도 참… 둔하다. 둔해.

순수 악 엘레나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오라버님께서 조혜진 님께 정식으로 청혼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원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라버니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셔서… 이미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하셨으니 이번에 거절당하시면 세 번째겠네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조혜진 님이 가족이 되어주셨으면 하지만… 우리 오라버님이 워낙 모자란 면이 많아서… 거절하신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뜬금없이 들려온 엘리오스 순정남 소식이 당황스럽기는 하다.

‘김현성 이 새끼 진짜루 긴장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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