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9화
재판 (8)
-이기영. 이 개자식!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 쥐새끼 같은 놈!
김현성은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전형적인 검사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일까. 암살자나 레인저, 혹은 도둑 계열의 클래스들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이 있기는 했지만….
‘따로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구….’
확실히 회귀자는 회귀자라는 생각이 든다.
1회 차에서는 이런 종류의 임무에도 몸을 담아본 적이 있는 모양,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온 2회 차와는 다르게 1회 차에서는 더러운 일도 몇 번 경험했을 테니 그게 도움이 된 거겠지.
아니, 단순히 몇 번이 아니라 뒷세계에서 날아다녔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는 수준이다.
‘쉬운 일도 아닌데.’
무려 교황청의 지하 감옥이 아니었던가.
대놓고 때려 부수면서 녀석을 탈출시키는 것 정도야 간단하겠지만 이 정도로 소리소문없이 빼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대륙 최악의 범죄자가 꺼져 버렸다. 마력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성력이 사용된 흔적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상자는 없었고, 정확히 템플러 젠만 사라진 상황.
혹시나 이런 종류의 변수에 대비하고 있을 악마 소환사의 눈을 피했다고 가정한다면….
‘시바. 대륙 1티어 암살자나 다름 없자너.’
2차 전직이라도 했나 봐.
막말로 나를 데려간 게 템플러 젠이 아니라 김현성이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기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게야!”
바깥으로 목을 빼꼼 내밀자마자 커다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은… 어디 계시지? 혹시….”
“다행히 방에 계신 걸 확인했습니다.”
“경계를 더욱더 철저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명예추기경님을 지켜야 해. 녀석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시나?”
“모르고 계실 겁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일단 대책을 경비에 신경을 쓰는 이들이 대부분. 나를 걱정하는 이들도 눈에 띄기야 한다.
‘당연하긴 해.’
범죄자는 다시 현장을 찾는 법이다. 녀석의 범행이 무위로 돌아간 만큼 다시 한번 명예추기경을 납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방 근처로 겹겹이 쌓여있는 성기사단, 파란 길드원들도 눈에 띈다.
조금 있으면 방 안으로 들어올 것 같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시바. 돼지 새끼.’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다.”
“형… 형님.”
“할 말 있으면 너 말고 조혜진 들어오라고 해.”
“알겠소.”
“부길드마스터. 접니다.”
“들어오세요. 혜진 씨.”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조혜진과 박덕구, 김예리까지 자리해 있다.
‘돼지 새끼는 꺼져!’
라는 눈빛을 보내자 잔뜩 움츠린 박덕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보여 표정을 풀자 그제야 눈치를 보며 한쪽에 자리 잡는 것이 보인다.
재판이 있고 나서 냉전 상태를 유지한 지 며칠째. 갑작스럽게 파란 길드원들이 방문한 이유는 무척이나 뻔했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본론은 직접적으로… 조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템플러 젠이 사라졌습니다.”
예상 그대로의 발언이었다. 슬그머니 충격받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지사. 부정의 단계를 거쳐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조혜진을 바라본다.
“…….”
“…….”
“네?”
“말 그대로 템플러 젠이 사라졌습니다. 부길드마스터. 현재 교황청에서는 당시 경비를 서고 있던 성기사들을 상대로 내부조사를 진행 중이며 아직까지도 현장을 파악하는 도중입니다. 마법감식반과 레인저들이 현장을 조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증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리는… 예리는 현장 확인해 봤어?”
“응. 마력, 신성력 사용된 흔적 없어. 아마도 단순한 신체 능력… 으로… 설명은 되지 않지만… 사실 대륙에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없어. 흔적을 지우는 능력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마력이 발현되지 않는 종류의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암살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아. 후자는 현재까지 대륙에 나타나지 않았던 종류의 특성이야.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없어. 전자는 창렬이 오빠가 조사하고 있는 도중인데…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의 소행일 거야.”
“템플러 젠은 아직까지 교황청을 빠져나가지 않았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파란 길드와 교황청에서는 부길드마스터의 경호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해… 48시간 동안 밀착 경호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
“부길드마스터.”
“…….”
“그는 범죄자입니다.”
밀착 경호가 짜증 날 것 같다고 생각해 얼굴을 찌푸렸는데 얘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부길드마스터가 어떤 심정일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죄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길드 내 현장감식반은 템플러의 소행일 가능성을 가장 크게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비겁한 자식! 네놈은… 수치심이라는 것도 없는 거냐? 부끄러움도 모르는 개자식!
‘아. 우리 군사님 시끄럽네. 진짜.’
“처음부터 그가 부길드마스터에게 접근한 것은 아마 모종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가슴 아프시겠지만….”
조혜진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이후 말을 이었다.
“부길드마스터가 그에게 동정할 이유도, 공감할 이유도 없습니다.”
“형님은 속은 거요.”
“…….”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이야기 아니요? 그 나쁜 놈이 우리 형님을 속인 거지. 머릿속에는 형님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던 거요. 템플러 나쁜 자식들이 원하고 있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템플러 젠이 형님을 위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소리 없이 사라질 리가 없지. 아마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 거라니까. 하지만 걱정 마쇼. 이제는 단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죽을 때까지 형님 곁에 붙어 있을 거요.”
좀 떨어져. 커피는 주고.
“그리고….”
“그리고… 수상한 장소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나도 알아.’
템플러 젠이 실시간으로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사실 조금 늦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라파엘 파티와 외신 꼬맹이들에게 일을 맡겨놓은 지 제법 오래됐었으니까.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건지, 갑작스러운 납치 사태에 정신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요한추기경을 비롯한 적폐들을 숙청하느라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내린 퀘스트를 완수하기는 했다는 사실은 기쁘다.
“이전에 부길드마스터께서 말씀하셨던 던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템플러 젠과 그의 탈출에 협력한 이들 역시 아마 던전 안에 있을 겁니다. 현재 라파엘 파티와 협력 중인 검은백조 길드에서 조사단을 파견했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템플러 젠 님이….”
“그 개자식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이요. 분명히 상상하지도 못할 음모가 도사리고 있겠지.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도 심화되고 있고… 형님을 납치해서 괴롭힌 건, 그런 이상 현상에 대응할 시기를 늦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니까. 형님이 대륙의 중심이자 수호자니까. 거추장스러운 걸 치워 버리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젠 님은….”
“부길드마스터.”
“네.”
태도가 꽤 조심스럽다.
“혹시 그에게 납치당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법정에서 증언한 게 전부예요.”
심지어 박덕구와 김예리에게 눈빛을 보내기 시작,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몇 걸음 물러서는 얘들이 눈에 보였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합니다만… 어쩌면 암시나 최면 같은 종류에….”
“네?”
“마법이 드나든 흔적은 없습니다. 비슷한 종류의 아티펙트 역시 말입니다. 부길드마스터는 괜찮다고 말씀하셨지만 외신전쟁 이전에 부길드마스터가 정신적인 후유증을 안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최면술에 걸렸을 확률도….”
‘아니, 무슨 최면술이야. 혜지나. 너 최근에 뭐 이상한 소설이라도 읽었어?’
“부길드마스터. 저는 진지… 진지합니다.”
‘얘 요즘 무슨 소설 읽어?’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지금은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더 많습니다.”
“…….”
“그리고 저도 던전으로 들어갈 거니까 조치해 주세요.”
“무슨!”
“베니고어 때문에 해결해야 할 일….”
“거 이상한 소리하지 마쇼! 템플러 젠인가 궨인가 하는 놈 때문 아니요?”
“…….”
“정말로 베니고어 님 때문이라면 꼭 부길드마스터가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륙에 인재는 많고….”
“거, 혜지니 누님 말이 맞다니까.”
일단 감정을 잡아보자.
항상 그렇듯 진지한 얼굴과 분위기는 도움이 되니까.
“그냥… 그냥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형님….”
“진실이 뭔지, 뭐가 진짜인지… 솔직히 나는 아직까지 그를 믿지만… 뭔가 다른 게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던전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이기영! 이 비겁한 자식! 그렇게 지는 게….
‘아니, 얘 너무 시끄러워.’
-왜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딴 식으로….
-로자리오는 구했어요?
-구했….
-그러고 보니까 시바. 템플러 젠이 탈옥했다고 하기는 하더라.
-모르는 척하지 마라.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뭐?
-질 것 같으면 말을 하던가. 뭐가 무서워서 시바 내가 다 이기고 있는 재판을 뒤집었냐고.
-뭐? 이 뻔뻔한 새끼. 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건지 네 가슴에 손을 얹어봐라.
-내가 다 이긴 거였어요. 이 멍청한 군사님아.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일을 저지른 거겠지만… 밤새도록 준비했던 비장의 무기가 무효가 되어버렸다구. 덕분에 일이 더 복잡해졌는데… 하….
-개소리.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이 개자식!!! 비장의 무기? 비장의 무기? 네놈의 수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 알량하고 의미 없는 로자리오도 이미 내 손에 있단 말이다. 네놈이 할 수 있는 반론은 한정적이었고 우리 측에서는 이미 논파 준비를 마친 지 오래….
-저는 과거에 연연하는 타입이 아니니 잊어 드리겠습니다.
-웃기지 마라. 이기영. 이 뻔뻔한 자식. 다시는… 다시는 사적인 일로 연락하지 마라.
-공적인 일은 괜찮아요?
나랑 게임 안 해?
정말로 나랑 게임 안 하게?
-그러지 말고 던전 들어갈 준비 하세요. 이건 공적인 일이에요.
-뭐?
-제법 규모가 큰 건이니까. 각오 단단히 하시고. 그러고 보니 군사님 던전 공략 쪽에도 조예가 있나 몰라.
근데 어떻게 해. 이번 게임은 진짜 재미있는 건데.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는 게임인데.
-…….
-공략 성과를 수치화해서 포인트로 환산할 거예요. 누가 더 많은 포인트를 모았는지 듀얼 하는 거지.
듀얼이라구 듀얼. 진짜 재미있다구.
두뇌와 두뇌의 대결. 천재와 범재의 대결. 공화국의 상징과 교국의 상징의 대결.
물론 내가 조금 유리할 수도 있는데. 원래 그런 게임이 더 재미있잖아.
-군사님이 안 할 거면 누나 데려가구. 그동안 군사님은 밀린 업무 처리하면 되겠네. 약속한 대로 프로젝트 지원은 확실하게 해드릴 테니까. 좋은 성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딱….
-네?
-딱 한 번만 더 어울려 주지.
-…….
이 새끼도… 참….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파란 길드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전 길드원들을 불러주세요.”
전원을 만나는 건 조금 오랜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