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8화
재판 (7)
저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돼.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면 아마 더욱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조금 직접적이지만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죽이면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쓱싹은 아니지. 팔다리 자르고 막 그러면 안 되지.’
얘가 성정이 많이 포악해지기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둠현성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아 돌아버린 것일까. 드디어 미쳐버린 김현성이 떠올린 섬뜩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온다.
왜 갑자기 이 새끼가 내 배에 커다란 칼을 쑤셔 박은 장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시바. 진짜 아팠는데….’
하지만 그걸 표현할 수 있을 리 만무, 한 점 물러섬이 없는 눈빛으로 녀석을 응시한다.
아마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베니고어 님의 곁으로 탈옥시키지 마. 죽이면 안 돼. 이 새끼야.’
만약에 내 말 안 들으면 뒷감당이 조금 골치 아파질 거야. 그건 이해하지?
네 마음도 이해하지만 이건 이미 끝난 이야기야. 그냥 젠이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될 거야. 탈출만 시켜주면 말이야.
“온전한 상태로 탈출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
“조용하게 처리해 주세요.”
“기영 씨. 그는….”
“네. 현성 씨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주제넘은 행동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현성 씨 말씀대로 그가 저를 상처 입혔을 수도 있지만….”
너도 그랬잖아. 배때기 쑤셨잖아.
“…….”
“…….”
“잠깐 들어오시겠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게다가….”
“…….”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게 어떤 말들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설득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죽이지 않고….”
“…….”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
“그리고….”
“…….”
“항상 감사합니다. 현성 씨.”
살짝 웃어주자.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을 테니까. 김현성이 확답은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올바른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투성이겠지만 이 새끼가 이기영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려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친우의 부탁.
어찌 됐든 템플러 젠을 안 보이는 곳에 치워버릴 수 있고… 보상으로 집 나간 유대감까지 돌아오는 거래.
본래 거래라는 건 모든 걸 만족할 수 없는 법이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다는 거지.
김현성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복수심에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친우를 케어하고 보호하는 일에 더 집중해야 된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난 얻기만 하는 거래를 선호하지만 김현성이 배짱장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조건 할 거야. 마음에 안 들어도 할 거야. 하기 싫어도 할 거야.’
김현성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출한 유대감을 찾아오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얘가 젠한테 뭐라 그러는 것도 웃기기는 해. 지도 돼지우리니 뭐니, 죽여 버리겠다느니 뭐니, 그런 전적이 있기는 하잖아.’
아무튼, 다음은 젠이다.
‘어차피 재판은 곁가지지. 난 처음부터 시바 재판에 관심도 없었다구.’
내가 진심으로 재판에 응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자위하게 된다.
애초에 진청과의 승부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거지. 조금 더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정말로 대륙을 위하는 길이 무엇일까.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초심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문제. 계속해서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던 문제였다.
정말로 그 재판이 내게 가장 중요했을까. 그 재판이 의미가 있었을까? 그 알량한 자존심 싸움은 미래지향적인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르지….
‘나는 그 게임에 미친 놈이랑은 다르지.’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성자.
‘내가 괜히 빛의 성자겠냐구.’
템플러 젠의 유죄냐 무죄냐로 이어지는 개싸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배심원들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륙에 혼란을 가지고 온 템플러라는 집단의 처단.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공략.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대륙이 이상 현상을 막아내는 것,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대륙민들이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 헌신하는 것.
그게 대륙 관리자로서, 교황청의 명예추기경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
‘질이 달라. 근본 자체가 다르다고.’
그게 악마 소환사와 빛의 성자의 차이였다.
베니고어 님의 조각상에 위치추적 아티팩트와 감시 카메라 아티펙트를 넣어두자. 템플러 젠이 탈출하면 갈 곳은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어쩌면 다른 곳으로 향할 확률도 있지만 녀석은 가련한 빛의 성자를 구하고 싶어 할 것이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힘의 필요성을 실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무 연고지도 없는 녀석이 그 집단 말고 비빌 수 있는 구석이 있을 리가 없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젠 님.”
“이기영… 님?”
“네. 젠 님, 저예요.”
“이런 시간에… 어떻게….”
“할당된 시간이 짧으니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젠 님.”
“네?”
“제가… 제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얼빵한 얼굴.
“도움을 받기로 했어요.”
“네? 그게 무슨….”
“더 이상은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기영 님!”
다 죽어가는 놈이 목청 한번 크네. 하지만 언성을 높일 만하다. 현시점에서 자신을 빠져나가게 도와줄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이미 여론은 뒤집힌 상황, 이 재판에 희망이 없다는 걸 녀석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명예추기경이 녀석을 빼돌릴 수 있었을까에 대해 떠올려 본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라고 판단하고 있겠지.
그 모종의 거래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른다.
자유를 팔아넘긴 것일 수도 있고, 정치적인 거래가, 혹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은 김현성과 놀아주기였지만 녀석의 상상력은 이쪽에 도움이 된다.
애써 괜찮다는 듯이 웃음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평소와 같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선보인다.
“당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전부… 제 독단….”
“저는 괜찮습니다. 젠 님.”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 보잘것없는 저를 위해서….”
“아니요. 젠 님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시고, 있는 그대로의 대륙을 보여주셨습니다. 제 시야를 넓혀 주셨고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신 분이에요.”
“…….”
“…….”
“사실은 모든 게 제 이기심 때문이었답니다. 젠 님께서는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시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저도 언제나 꿈꿔왔던 일이었던 걸요. 어쩌면 젠 님께서 저를 데리고 가는 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바라왔을 수도 있어요.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 이 끝이 참혹할 거라는 걸 알면서… 저는 애써 무시했었습니다. 당장 그 순간이 행복했었으니까요.”
“…….”
“매일 다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 소중한 일상, 함부로 놓아버리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던 삶에 저도 모르게 매달렸어요. 어쩌면 젠 님께서 잘못되실지도 모를 불안감을 못 본 체했을지도 몰라요.”
“이기영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건 전부 제가 벌인 일입니다. 이후의 일을 무시했던 것은 저였습니다. 이기영 님께 새로운 세상을 보여드리겠다고 말을 했지만 제가 자유롭고 싶은 욕망이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상냥한 사람.”
병신 같은 놈.
“저는 그런 이기영 님께서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저는 추악한 놈입니다. 저는 단지 제 욕심 때문에!”
“…….”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이 새끼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정도는 나를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저지른 일은 아닐 것이다. 여러 가지 감정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설령 이 새끼가 명예추기경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한들 내게는 별 영향이 없다. 어차피 지금부터 생각하게 될 거거든.
“그건 아무 상관 없어요. 젠 님.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언제나 꿋꿋한 명예 추기경.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성자. 너를 내보낸 건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 긴 싸움이 시작되겠지. 교황청의 파벌 문제부터 숨겨져 있는 대륙의 적폐들과 힘든 싸움을 시작하게 될 거야.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곳으로 떠나세요. 젠 님.”
“그게….”
“바젤 교황님께서 템플러를 상대로 성전을 선포하실 겁니다.”
내가 선포할 거야.
“최대한 막고 싶지만….”
이미 이건 명예추기경의 일을 벗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교황청의 파벌 문제는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된 상태였고, 한 개인이 그 일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주 오랫동안 썩어 있던 고름이 터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시바. 숙청 쇼가 시작되는 거지.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
명예추기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일어날 사건을 최대한 막아내는 것.
사실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발버둥, 하지만 작은 손이라도 내밀어야 빛의 성자겠지.
“이기영 님께서 굳이….”
아니야. 너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이번 일로 일어날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이기영이 아니라 명예추기경의 힘이 필요하다는 거.
마치 운명의 장난같이 느껴진다.
대륙을 위해, 교국을 위해, 끝내는 젠이라는 한 신도를 위해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명예추기경의 서사.
“최대한 멀리 떠나세요.”
‘떠나지 말고. 너네 집구석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 템플러들 있는 곳으로 네 친구들 있는 거기로.’
“교국과 교황청에 대해서는 모두 잊으셔야 합니다.”
‘잊지 마. 교국이 네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잘 떠올려.’
“저에 대해서도 잊으세요.”
‘나는 절대로 잊지 마. 시바. 템플러들, 거기 남아 있는 놈들이랑 같이 토론 같은 것도 한번 해보고 그렇게 해.’
“다시는 저를 찾지 마세요.”
‘아마 내가 찾아갈 거야.’
“이건… 이건 마지막 선물입니다.”
작은 목걸이를 내민다. 위치추적과 감시 카메라, 도청 아티펙트까지 내장된 최고의 선물.
안에 내장된 기능이 들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베니고어 님의 모습을 한 목걸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기영이 이기영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었으니까. 보물처럼 간직할 게 분명하겠지.
“이기영 님! 이기영 님!”
“…….”
“이기영 님!”
“…….”
뒤를 돌아보지 말자. 헤어짐에는 익숙하지만 눈물이 흐를 수도 있으니까.
“이기영 님… 제발… 제발!”
꿋꿋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잠깐 멈칫한 이후에는….
“…….”
“즐거웠어요.”
뒤를 돌아보며 작별을 고하자.
“…….”
“으아아아아아아아!!”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이기영!!! 이 개자식! 미친 자식!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이 추악하고 역겨운 자식!!
아침을 여는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