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5화
재판 (4)
교국의 법정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순결하고 진실해야 하는 장소, 교국민들이 피를 흘려 만든 이 신성한 법정에서 녀석은 증인을 이용해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분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미 정정당당이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멀어진 상황.
공화국의 미개한 짐승이 법정을 적을 물어뜯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어떻게 분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비겁하고 야비한 새끼.’
슬그머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일까.
녀석에게서 표정 변화는 없다. 그저 담담히 증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다.
주변을 감돌고 있었던 기도 소리는 어느새 법정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베니고어시여….”
“빛의 아들이시여….”
증인으로 나선 녀석은 당연히 본적도 없는 얼굴, 물론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공화국에 진입한 이후 여관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니, 분명히 한 번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허투루 일할 리가 없지.’
며칠이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여관에 있었을 테고….
‘저런 건 기록에 남았을 테니까.’
알리바이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괴롭게 들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억지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참는 듯한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렸고 그 이후 다시 한번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손이나 재갈로 입을 막았는지 읍읍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이후에는 잠잠해졌습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기… 기절하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증인은 지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추측성 발언으로 배심원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증인, 그날 한 번뿐이었습니까?”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날 이후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자주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째서 자경단에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범한 상인입니다. 보복이 두려웠고, 무서운 일에 휘말리는 게 무서웠습니다. 그… 그렇기에 별것 아닌 일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주 제대로 준비했어.’
“방 안에서 빠져나온 둘을 본 적은 없습니까?”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끔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오셨지만… 모포를 푹 눌러쓰고 있었던 터라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증인의 증언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단순히 같은 여관에 묵었던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께 맹세코 저는 거짓 증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모포를 뒤집어쓴 남자는 다리가 불편한 듯 절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명예추기경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압니다. 식사를 하실 때 한쪽이 불편하신 듯 자주 수저를 떨어뜨리셨고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우리 측 변호인단이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해 보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법관이 눈에 들어온다.
‘증거도 제출할 거야.’
당연히 증거도 제출할 것이다.
재수없는 진청은 조용히 일어나 입을 열었다.
“당시 여관의 숙박 명단과 식당의 현장을 담은 영상구슬을 증거로 제시하겠습니다.”
영상구슬에 담겨져 있는 영상을 여신의 거울이 비춘다.
‘시바. 메소드 연기를 너무 열심히했어.’
당연히 여관식당 안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리가 불편한 듯이 절뚝거리며 식당에 입장하는 한 사람, 더러운 모포를 푹 눌러쓰며 조심스럽게 식기를 드는 모습, 하지만 식기를 들 힘도 없는지 테이블 위에 계속해서 떨어뜨린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 몇 입 먹지도 못한 채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위로 올라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처참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추기경님, 그리고 배심원분들이 옳은 선택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증거는 명백합니다. 공화국에 들어온 이래로 명예추기경님께서는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셨습니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어떠한 폭력이 있었는지… 저희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무슨 명예추기경님이야. 이 새끼는… 이 야비한 새끼.’
“발견 당시 명예추기경님의 모습입니다.”
진청이 띄운 여신의 거울에는 내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저걸 시바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겠어.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 눈에 보인다. 누가 봐도 무차별적인 폭력에 부딪힌 모습이었다.
신성력으로 응급치료는 마친 상태였지만 그 잔인한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목은 부어 있었고 눈에는 시퍼런 멍이 보인다. 수분을 섭취하지 못한 입술을 불어 터져 있고 혈액이 흘러내린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참관인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입 길드원 벨리에가 눈을 벌게진 얼굴로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또 왜 저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가히 눈물을 쏟을 만하다.
모진 고통과 폭력을 견뎌내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미소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거 놓으라니까! 저 죽일 놈! 저 죽일 놈이!!”
‘아, 엿 됐다.’
참관인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저 새끼는 왜 왔어.’
분노한 박덕구가 몸을 일으킨다. 성기사단과 경비병들이 녀석을 막아서지만 어림도 없지.
“저 죽일 놈이! 우리 형님을 저렇게 만들었단 말이요?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개자식을 봤나!”
심지어 눈물을 글썽거리는 돼지 새끼.
“이거 놓으라니까! 법원이고 재판이고 나발이고 나는 모르겠다니까! 저 개자식을 때려 죽여야 성이 풀릴 지경이요!”
“…….”
당연히 녀석은 퇴장당할 수밖에 없다.
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욕을 입에 담는다.
“네놈이 사람이냐! 이 개자식! 형님을 건드려? 우리 형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때…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아이고… 형님… 아이고… 우리 형님 불쌍해서….”
‘그만 좀 꺼져. 진짜.’
“저 개자식은 유죄요! 존경하는 대법관님! 추기경님! 그리고 배심원님들. 나는 무식해서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 개자식은 유죄요! 무조건 유죄란 말이요!”
‘제발 꺼져.’
“꺼윽… 우리 형님은 대륙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린 사람이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한 이후에 죽다 살아난 사람이란 말이요… 끄윽… 어떻게 그런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소. 자기 몸을 챙기지 않고 모든 걸 희생한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심한 짓을….”
‘제발 꺼져.
돼지 새끼의 진심.
그저 주절거릴 뿐이었지만 그 호소력은 짙다. 눈물을 펑펑 떨어뜨리며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에 갤러리들 하나하나가 공감하기 시작한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오열하고 있는 이들도 시야에 비친다.
‘빨리 꺼지라고 진짜.’
“내 한마디만 더 하겠소. 배심원분들. 내 주먹은… 이 주먹은 닿지 못하지만 당신들의 주먹은 닿을 거요. 나는… 이 멍청한 동생은 형님의 복수를 할 수 없지만 당신들은 할 수 있을 거요. 당신들에게 주어진 일이요. 대륙을, 형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거요. 저 개자식을 처단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오. 형님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대륙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니까!”
‘아니, 빨리 좀 꺼져. 왜 이렇게 안 꺼져?’
질질 끌려가면서도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 뜻밖의 호재에 진청 역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상황, 저 돼지 새끼가 진 군사에게 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내 말 꼭 기억해 주시오. 배심원님들! 우리 형님을!!!”
콰앙!
하는 소리와 문이 닫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장은 크다.
‘제기랄.’
“휴정을 요청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재판이 진행될 리가 없다. 결국 김미영 팀장이 조용히 손을 들어 휴정을 요청했지만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아직 증언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계속 진행해 주세요.”
“이 사진 역시 증거로 제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저 사진들은 템플러 젠이 명예추기경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증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
“누가! 명예추기경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안 짜여진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
나를 쥐어 팬 새끼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납치되신 동안 누가 명예추기경님에게 무차별적으로 악의적인 폭행을 저질렀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누굽니까! 누구입니까!”
심지어 완전히 사라진 놈들이다. 베니고어넷에 올라온 영상도 아마 사라져 있겠지. 심지어 쓰기도 힘들 것이다. 이 재판은 비공개였으니까.
변호인단들이 주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진청 저 새끼는 오랜만에 신났는지 텐션이 올라가 있다.
테이블을 꽝 두드리며 과장되게 팔을 벌린다. 명예추기경 구출 작전에 참석하지 못한 한을 풀어 보겠다는 듯이, 이 무대 위에 주인공은 자신이라는 듯이 목소리에 힘을 담는다.
“저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추기경님.”
“말씀하세요.”
“명예추기경님과 저 간악한 범죄자가 함께 있었던 오두막에서 발견된 혈액입니다. 이 역시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
“공화국에 들어오기 전에, 라이오스의 마경의 숲에서 발견된 이 폐허에서도 명예추기경님이 폭행당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하나 범죄자 만드는 거 순식간이기는 하네. 저거 바느질이랑 요리하다가 그런 건데.
“이의 있습니다! 대법관님!”
“검사 측의 증언이 끝난 이후에 이야기해 주세요.”
“…….”
“이미 라이오스에서도 연약한 명예추기경님은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셨습니다.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 레인저들은 마경의 숲에서 공화국까지 가는 길에서 지속적으로 신성력이 사용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전투 흔적은 없었습니다.”
“…….”
“전투 흔적도 없는데도 신성치유마법이 사용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용의자입니다. 용의자가 명예추기경님에게 신성력을 사용했을 겁니다. 명예추기경은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그 연약한 몸으로 모진 폭력을 견디지 못해 천천히 죽어가고 계셨을 겁니다. 그의 화풀이, 혹은 장난, 혹은 아무 이유 없는 그 폭력이 빛의 아들을 죽이고 있었던 겁니다.”
“…….”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명예추기경님. 무엇이 무섭길래. 그곳에서 그러고 계십니까.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띠꺼운 새끼.
“그는 더 이상 당신을 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그의 아픔에 공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범죄자입니다.”
“범죄자가 아니라 용의자입니다.”
“사연 없는 범죄자는 없습니다. 그를 두둔하고 싶다는 것도, 그를 이해하려고 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핫!”
이 새끼 시바 이 분위기에 웃네. 신났어?
본인도 실수라는 걸 인지했는지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저 추악한 괴물에게까지 사랑을 내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명예추기경. 당신은 피해자입니다. 저 괴물을 변호하실 필요가 없지요. 그를 위해 변명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이의 있습니다. 현 재판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레인저들의 소견서 역시 증거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법관, 추기경님.”
이걸로 마무리.
몇 대 맞은 기분이다. 완벽한 스토리텔링에 솔직히 반박할 거리가 없다.
세상에서 지워진 임시 길드원을 활용했고, 메소드 연기 중에 일어난 자료와 증거까지 완벽했다.
날조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로 완벽하게 날조한다면 이미 사실이나 다름이 없다.
‘시발.’
오늘은 못 뒤집어. 박덕구까지 한번 헤집고 간 오늘은 뒤집을 수가 없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일단 입을 열었다.
“템플러 젠은… 그 역시 피해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