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3화
재판 (2)
‘네 친구 어디 안 도망가.’
표정 참 볼만하다.
‘아직 어린애야. 이 새끼. 정신연령이 애들 수준이야.’
물론 일차적으로는 이쪽을 걱정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을 가능성을 아직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톡홀름 증후군이고 나발이고 나랑은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김현성에게도 그렇게 비치진 않는 모양.
내게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만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은 행동에도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지만 그런 감정들 속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일무이한 친우 이기영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새끼는 아직도 자기 혼자 남겨질까 무서워하고 있었다.
‘진짜 애새끼도 아니고. 초등학생, 중학생이야?’
유대감으로 이어진 형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친우, 서로의 이해자이며 긴 세월을 함께해야 하는 동반자.
대륙에 떨어지고 둘의 서사가 깊어진 이후, 녀석은 계속해서 이런 스탠드를 유지해 왔다.
나 역시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지만 솔직히 아직까지 이 새끼가 이런 거에 집착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소꿉친구가 새로 사귄 친구와 더 가깝게 지낼 때 나타나는 꽁기한 감정.
두 사람이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을 때, 남겨진 한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
어렸을 때나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감정에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름 부활 쇼도 끝내고, 마무리로 서로의 유대감까지 확인하며 화려한 마무리를 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조금은 정신병에서 해방된 것 같았는데….
‘이 새끼는 아직도 변한 게 없어요.’
친구가 있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
‘허우대는 멀쩡해 가지고 왜 이렇게 찌질해. 이 새끼 분명히 학창시절에 친구 없었을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거라고.’
사실 그게 김현성의 본질이기는 했다. 겁 많고, 숨길 좋아하고, 다른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걱정하고, 무엇보다 이 새끼가 범죄자 새끼라는 게 전부 드러난 상황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라이브 NTR쇼가 힘들 만도 하겠지.
‘나중에 시간 내줘서 놀아 줄게.’
잠깐 동안 얘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김현성에게는 시선을 오래 두지는 않는다. 지금 중요한 건 김현성의 초조함이 아닌 눈앞에 있는 젠이었으니까.
곧바로 마력으로 소음 차단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이 새끼가 어딜 들어와?’
김현성이 마력으로 구멍을 만들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한 번 째려보니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나는 다시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는 겁니까? 혹시 고문을 당하거나… 험한 일을 당하시지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기영 님.”
“식사는 제대로 하신 건가요? 다른… 것들은….”
“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선의의 거짓말. 이 새끼 온몸이 쑤실 거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 거 봐. 물도 제대로 못 마신 것 같은데.
“이단심문관들이 어떤 것들을 물어봤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보다 이기영 님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젠 님. 지금은….”
“꼭 알고 싶습니다.”
‘난 여전해. 뭐 그렇게 알고 싶어 해.’
“저는… 매일 기도를 드리고….”
‘반신욕에 와인 한 잔 때리면서 한량인 양 놀고 있었어요. 꿀꿀이 죽 대신 거울연어랑 무지개 솜사탕 먹으면서….’
“매번 같은….”
‘힐링을 취했어. 매번 같은 스케줄이지만 질리지가 않더라구.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어.’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 가끔 숨이 막힐 때가 있지만 그럴 때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한답니다.”
그래. 우리 약속.
“그렇군요….”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약속을 떠올리며 위를 올려다보고는 한답니다.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이에요.”
녀석은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푹 내리는 것이 보인다.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으니까.
아마 젠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황청이 얼마나 어둡고 위험한 곳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이기영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난 3일간 이 가련한 빛의 성자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사실 가만히 있었어.’
바젤 교황에게 찾아가 탄원을 호소하고, 템플러 젠의 무죄를 외쳤을 것이다.
자유를 원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 주장하며 그는 아무 죄가 없다고 땅바닥에 엎드렸을 것이다.
매일매일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교황청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다’겠지.
명예추기경이 자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 교황청을 뛰쳐나갔다는 사실은 스스로의 명예를 나아가 교황청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그저 한 번의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교황청은 자신들의 명예가 깎여 나가는 것보다 그럴듯한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을 선택했다.
바로 자신… 그리고….
빛의 성자의 목소리.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젠 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게 제가 다 멍청하고 부족한 탓인걸요.”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혼자 남겨 드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혼자라니요.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풍경은 다르지만, 지금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젠 님께서도 분명 같은 걸 보고 계실 거라고 믿고 있… 네….”
눈물을 머금는다.
감정선이 터지다 못해 너무 절절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 조금 더 오바하고 싶기는 했지만 딱 여기까지가 적정선이다.
신파극으로 시간을 때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재판을 준비 중입니다. 젠 님.”
“…….”
“제가 말씀드렸지요. 이번에는 제 차례라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젠 님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그건….”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습니다. 젠 님.”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혹시나 이기영 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빛의 성자는 거대한 권력의 압력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거 잘 알잖아. 나는 언제나 꿋꿋했다고.
“그들은 현재 템플러들을 비롯한 반대 파벌들을 숙청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미 몇몇은 숙청당했어. 템플러 시몬의 소재는 찾을 수 없지만 요한 추기경은 다져진 고기가 되어버렸다구. 그 밑에 있는 놈들은 진짜 고깃덩어리가 됐을 거야.
“저는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잘못된 방법임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템플러들이 베니고어 님의 힘을 빼앗는 타락한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템플러 젠 님이, 템플러 시몬 님이 베니고어 님을 갈취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반대 파벌은 이단이며 그들을 모두 숙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템플러 젠 님께서 저를 납치한 이유가… 제게도 똑같은 짓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근데 내 눈에는 너희들 이단처럼 보이기는 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
“젠 님이 알고 계신 모든 걸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모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일단 템플러 시몬이 있는 곳부터 시작해 볼까.
아니면 던전화에 대해? 아니면 가장 맨 처음 날개를 받았을 때?
‘근데 왜 이렇게 망설이는 것 같아. 이 새끼.’
말 그대로 주저하고 있는 얼굴이다. 잠깐 욕이 튀어나올 뻔하기는 했지만…
‘그래. 또 내가 걱정되는 거구나.’
더러운 법정 싸움에 휘말릴 명예추기경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저는 강한 사람입니다. 젠 님.”
“…….”
“…….”
“네. 그렇죠.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은 강한 사람이었지요. 강하고 당차고 물러서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맞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이미지야.’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던 바로 그때였다.
마나방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게 느껴진다. 김현성 이 새끼가 돌발행동을 한 건가 싶어 옆을 봤지만… 일그러진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말고는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녀석은 시선을 돌린다.
‘현성이 아니네.’
들려오는 것은 무척 익숙한 목소리.
“접견시간은 끝입니다. 명예추기경님”
굉장히 띠꺼운 목소리였다.
“지금부터는 심문시간이지.”
너 이 새끼는 또 왜 왔어. 시바.
뒤를 돌아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진청. 이쪽에게 반말하며 이기영 개자식을 외쳤던 녀석.
명예추기경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오랜만에 존댓말을 하고 있는 것이 귀에 들려온다.
다른 사람의 눈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이 새끼의 태도가 신경 쓰인다.
여러 부관과 함께 등장한 것부터가 짜증 나는 모양새. 심지어 부관들은 산더미 같은 문서들을 들고 있다.
‘너 시바 연관되고 싶지 않다며. 근데 그걸 받아들였어?’
너 이 새끼 진짜 특별검사 된 거야? 아니, 네가 왜.
“교국법상으로 정해져 있는 접견시간을 초과하셨습니다. 명예추기경님.”
“…….”
“교국법상으로 명시되어 있는 용의자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셨으니, 교국법상으로 명시되어 있는 접견시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새끼 너무 띠꺼워.
“심지어 많은 절차들을 무시하신 것 같더군요.”
그래 시바, 무시했다. 용의자 접견 신청도 안 하고 보호 신청도 사전에 안 했어. 내가 시바 교국의 명예추기경인데. 이 새끼야.
그런 절차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바로 교국이고 교국이 바로 나야.
“다음부터는 자중하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교국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사랑하시는 분께서 복잡한 절차들을 모두 무시하신다니… 무지에서 나온 실수라고 판단하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으신 일이실 테니 말입니다.”
이 새끼 너무 띠꺼워. 너무 띠껍다고.
당황스럽지만 이 새끼가 여기 왜 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이 심심했어? 한번 해보자 이거야?’
제대로 한 판 해보고 싶었는데. 지금까지는 기회가 없었다 이거지.
그 바쁜 와중에도 김현성 제의에 응한 거 보면 어지간히 엿을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이건 녀석한테 게임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녀석이 좋아하는 게임과는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자신과 같은 부류와 체스판 위에서 놀아보고 싶었겠지.
마침 블랙마켓도 사라졌고, 김현성 돌보기도 끝난 시점에 여가 시간 좀 즐기고 싶을 테니까.
다시 한번 이 새끼들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겠지만 게임의 유혹을 참기 힘들었다는 것이 이쪽의 결론.
마치 그 결론이 정답이 확실하다는 듯이….
녀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띠꺼운 미소를 지으며, 본인이 위에 있다는 듯. 오만한 얼굴로 말이다.
-그럼 게임을 시작합시다.
‘제정신 아니야. 그렇게 털리고도 또 털리고 싶나 봐.’
-명예… 잃어버리고 싶어요?
한 번 더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