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1화
젠 (20)(삽화)
“기영 씨….”
“…….”
“기영 씨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현재 명예추기경님께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씀을….”
“제가 왔다고 전해주십시오.”
“이미 전해 드렸습니다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기영 씨!”
“죄송합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하지만….”
“이거 놓으세요!”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파란 길드마스터.”
바깥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김현성이 커다란 목소리로 이름을 외치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축객령을 내린 게 내가 아니었다면 문을 박차고 들어왔겠지만….
‘뭐 어쩌겠어. 내가 만나기 싫다는데.’
그간의 시간은 명예추기경에게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정하얀을 제외하고는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었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명예추기경 납치사건은 아직까지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꿀꿀이죽을 처먹던 비참한 생활이 그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교황청에서는 언론에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중이었다.
김현성과 만남을 가지지 않은 이유 역시 그럴듯하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빛의 성자가 타인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며 휴식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게 일단은 표면적인 이유.
물론 김현성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사상 최악의 범죄자 템플러 젠, 녀석의 재판을 준비하고 있다거나, 자신에게 실망했다거나, 하는 종류의 상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는 형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불안정한 심리상태.
부활한 김현성이 이 유대감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또 집착하고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새끼가 조금 이상해진 것도 이해가 가기야 한다.
얼마나 황당하겠어. 웬 개뼈다귀 같은 놈이 갑자기 새로운 형제 포지션에 슬쩍 발을 디뎠는데.
심지어 그 새끼는 범죄자잖아. 김현성 입장에서 보면 이기영을 고통스럽게 한 범죄자 말이야.
연결된 유대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왜 그 범죄자를 두둔하는 건지,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이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현재 기영 씨는 정신적으로 아픈 상태이니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벌써 삼 일째 저러고 있는 것 같은데… 오빠. 김현성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누나.”
“이틀 전에 같이 식사 한번 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니까요. 무슨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하고 다니는데… 얼굴에는 암운이 드리워져 있고… 가끔 이상한 혼잣말도 하고….”
“혼잣말?”
“무서워서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근데 눈알이 맛탱이가 간 사람처럼 보이기는 하더라. 왜,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저지르기 전 말이에요. 막 그런 거 있잖아. 범죄 같은 거 저지르기 전에…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고….”
“근데 누나가 걔랑 같이 밥 먹을 일이 뭐가 있어?”
“아! 저보고 재판에 꼭 참여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교황청 측에 붙어 달라고. 특별검사라고 했나. 뭐라고 했나. 범죄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꼭 처형대에 올려야 한다고… 자잘한 서류 정리들은 자신이 다 해놓을 테니 몸만 오라고요. 보수도 꽤 넉넉하게 준다고… 자세하게는 안 들어봤는데 엄청나기는 하더라고요. 내 몇 년 치 연봉을 일시불로 넣어준대. 사실 골드는 별로 상관은 없지만요.”
‘얘도 참….’
“그래서 한다고 했어?”
“아니요. 바빠서 힘들겠다고 했죠.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한 손 거들고 싶은데… 오빠랑 대립하게 되는 게 별로더라고요. 아마 진 군사한테 찾아갈 것 같은데?”
“뭐?”
“반드시 처형대에 올리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구요. 진 군사가 또 그런데 유능하잖아. 그 사람 법정물 찍는 것도 좋아하고… 오빠가 젠을 변호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지, 김현성도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나 봐.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니까.”
“…….”
“그런데… 오빠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다니까.”
“얼굴이랑 피부 상한 거 봐. 남는 건 이것밖에 없는 사람이… 살도 너무 빠졌다. 괜히 미안해지게… 저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진심으로. 그냥 적당히 잘살고 있을 줄 알았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진짜 힘들었다니까?”
‘이 누나가 진짜 미안해하는 것 같은 게 얼마 만이야.’
그만큼 외관적으로 비참해 보이기는 했나 봐.
심지어 역대급 범죄자 젠의 신병을 구속하러 온 진 군사마저 할 말을 잃었을 정도.
오자마자 히스테릭하게 개소리를 지껄일 거라고 생각했던 녀석도 명예추기경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서는 입을 닫아버렸다.
덕분에 귀찮은 말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으니 여러모로 이득을 본 셈.
가끔은 이런 모습으로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평소에 쌀쌀맞은 사람들도 잘 대해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끔이다. 두 번 다시는 자유를 찾고 싶지 않다.
“차 좀 더 줘요?”
“응.”
잠깐 자유로운 생활을 꿈꿔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빛의 성자는 새장 속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반신욕 끝내구, 얼굴에 팩 바르면서 차 마시구, 지혜 누나랑 같이 고급 스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진짜 휴식이지.
흙탕물 폐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방. 꿉꿉한 냄새 대신에 퍼지는 것은 아로마 향초의 달콤한 향기. 시끄러운 소리 대신에 감미로운 음악이 귀에 맴돈다.
몸을 덮고 있는 천의 촉감도 너무 좋구. 발도 안 아파. 몸이 쑤시지도 않으니까.
특히나 누나가 평소보다 더 잘해주려고 하는 것 같은 것도 마음에 든다.
“우리 기영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너무 그러지는 말고.
“제가 좀 안아줄까요?”
“아니. 이제 밥 먹고 나갈 준비 해야지.”
“…….”
“…….”
“흐음, 젠한테 가려고?”
“응. 뜯어낼 수 있는 만큼 뜯어내야 되니까. 오늘도 거울연어 맞지?”
“네. 디저트로 무지개 솜사탕도 가져왔으니까 많이 많이 드세요.”
확실히 꿀꿀이죽이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하기는 해.
“오늘은 양식이 아니라 직접 거울 호수에서 공수해 온 거래요.”
“정말?”
“네. 김현성이 전해달라고 하던데.”
‘얘가 참 헌신적이고 착하기는 해.’
조금 미안하기는 하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사정을 설명하고는 싶지만… 뭐라고 설명하겠어.
이런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고, 사실 이거 다 연극이에요. 범죄자 하나 만들어서 담그려고 설계한 건데요.
라고 하면 얘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복잡한 생각들도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은 느낌에는 모든 게 사라진다. 위가 작아졌기 때문인지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식사시간이 즐거운 시간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길드도 난리 났었나 봐.”
“파란 길드?”
“네. 김현성이 한바탕 휘젓고 간 것 같더라고요. 성질 버럭버럭 내면서. 막 물건도 깨고 그랬대요. 정하얀은 웨딩 준비니 뭐니 어쩌구로 바빠서 없었다던데….”
“누나는 어떻게 그렇게 소식을 잘 알아?”
“정보통이 있으니까. 이거 맛있네요. 오빠가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맛있게 드셨어요. 그나저나… 오늘부터 움직이는 거 맞죠? 어떻게 하고 나가려고요?”
“빡세게 하고 가야지. 막 장신구도 주렁주렁 달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지혜가 눈에 보인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곧바로 옷을 가져다 대는 모습.
사실 편하게 돌아다녀도 별 상관은 없지만 이렇게 가는 게 더 효과적이다.
명예추기경이 빛나면 빛날수록, 명예추기경이 정말 명예추기경다워질수록 젠이 느낄 죄책감이 커질 테니 말이다.
내게는 세상 편한 차림새이기는 했지만 마치 인형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겠지.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에 다시 족쇄를 차게 된 모습을 보면 입이 술술 풀리지 않을까.
“막 그런 거 원하는 거 맞죠? 새장 속에 아름다운 새. 남의 뜻대로 살아가는 치장된 인형. 한때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빛을 잃은 눈. 자신의 운명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사람처럼. 힘들지만 꿋꿋하게.”
“딱 맞아.”
“모자까지 써 봐요. 목걸이랑 반지도 주렁주렁 달아줄게요.”
“괜찮네.”
대충 준비를 마친 이후에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다. 당연하지만 수십 명의 성기사단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 안전상의 문제가 생겼던 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리라.
박리안, 김창렬, 김예리까지 호위로 차출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걱정이 되는 모양.
살짝 손을 들어 인사를 해오는 김예리에게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쟤는 왠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박덕구 각성 이벤트에 한 번 참가한 적이 있어서 그런가.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시는 겁니까. 명예추기경님.”
“젠 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심문하고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말씀드렸던 대로 고문이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마 신나게 고문당하고 있었을걸.
근데 얘가 입이 무거워서 별 성과는 없을 테고….
아무튼 간에 고개를 끄덕이는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기영 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현성 씨?”
‘너 아직도 있었어?’
밖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김현성이었다.
“기영 씨. 그동안….”
“죄송합니다. 현성 씨.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네요.”
누나 말이 맞기는 해.
김현성의 얼굴이 정말로 심각해 보이기야 한다.
‘잠 못 잔 것 같은 얼굴이자너.’
뭐라 표현은 못 하겠지만 절벽 끝에 매달린 것 같은 얼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현성 씨는 현성 씨 나름대로 할 일이 있으시죠.”
너 공화국에서의 일은 어디에다 두고 여기에 있어?
“지금 그런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영 씨.”
그게 안 중요하면… 시바. 안 중요하니까. 그런 애들을 길드원들을 뽑았지.
“새로운 길드원들 관리하셔야죠.”
그래. 나 때린 애들 있잖아. 걔네들… 그 죽일 놈들.
“그… 길드원들은… 이제 없습니다.”
“네? 공화국 지부를 폐쇄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 그런 말이 아니라. 새로운 길드원들은 이제 없습니다.”
“…….”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아무튼 이제는…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어?
하늘에 있어?
“이제는… 없습니다.”
걔네… 죽였어?
김현성의 눈이 조금 무서워 보였다.
*다음 페이지에 케루빔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