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40화
젠 (19)
‘아직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던전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와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쩌면 공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또… 대중들에게 내세울 방패가 하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놈이 하나가 필요하기야 했다. 구태여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언론에 나갈 놈이 고깃덩이가 되었다고 발표할 수는 없었으니까.
녀석이 저지른 범죄는 현장에서 사살면허가 발급될 정도로 취급되는 국가적 중죄.
우리 현성이가 너희 젠을 베니고어님의 곁으로 보내버려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기왕이면 법의 철퇴를 받게 하는 편이 더욱더 효과적이다.
‘쟤가 죽을죄를 짓기는 했어도….’
폐허에서 맞아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죽는 건 조금 에바잖아.
김현성을 멈춘 건 그런 의미였다.
유대감이고 우정이고 형제애고 나발이고 분노의 몸을 맡기는 상황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우뚝 하는 소리와 함께 패대기치던 놈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우리 현성이가 시야에 비친다.
갑작스러운… 꿀 같은 휴식시간에 너희 젠 역시 당황하는 표정,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것이 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는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압도적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상태, 밝은 하늘을, 세계를 함께 둘러보자는 말을 꺼냈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이기영은 점점 죽어갔으니까.
이 새끼는 생각해 보면 생각할수록 뭐 하나 해준 게 없어.
이기영이 바라는 마지막까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 당장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끌려간다면 다시 한번 새장 속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날개를 펼치지 못하리라.
진짜 이기영 대신에는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사소한 일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던 한 인간은 희생과 부활의 신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녀석의 입장에서 그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꼴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몸을 일으켜 주먹을 내뻗는 놈이 눈에 보인다.
범죄자의 비겁한 급습은 언제나 무위로 돌아가게 마련, 너희 젠의 주먹은 당연히 우리들의 히어로에게 닿지 못한다.
사력을 다한 놈의 일격은 팔을 살짝 들어 올리는 기본적인 방어 자세에 막힌다.
두 번째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지 발을 황급하게 뻗어보지만 그것 역시 김현성의 두꺼운 팔뚝에 막혀버린다.
제대로 된 몸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거라 장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공격, 몸이 망가진 지금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제길… 제길!”
제길몬이 제길을 외치며 혼신을 담아보지만 닿지 않는다. 안 그래도 명확한 수준 차이, 젠이 현 상황에 기여하는 것은 오롯이 도시복구비용을 늘리는 일이다.
결국 먼저 지쳐 쓰러지는 쪽은 녀석 쪽이다.
만약 녀석이 이 배역에 완벽하게 몰입하고 있다면,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땅바닥을 기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죄송… 합니다.”
라는 말을 지껄이며 끄윽 끄윽 소리를 내뱉기 시작한다.
“잠깐만 멈추세요. 현성 씨.”
“…….”
“멈추세요.”
“…….”
“멈춰 주세요. 현성 씨!”
멈출 마음이 없었던 김현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어째서… 입니까.”
‘뭘 어째서야. 이 새끼가 맛탱이가 갔나. 전시 상황도 아닌데 대로변에서 사람을 때려 죽여도 돼? 그게 맞아? 물론 그래도 되긴 해. 근데 참아야지.’
“그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기영 님….”
“그분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함께 떠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제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실제로 그런 적은 없지만 빌드업을 쌓아가는 것은 필수, 분명히 나는 먼저 떠나자고 말한 적은 없다.
물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비친다. 이기영이 교국과 파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니, 도저히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당연히 나도 김현성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 김현성은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의도했으니까.
이런 몰골을 보여주면서도 함께 떠나자고 말을 한 게 이기영 자신이라고? 지나가던 개도 웃지 않을 코미디라는 거지.
변수는 없지만 김현성은 한 가지 사례를 떠올린 모양. 인정하기 싫은 사례를 떠올린 모양이다.
“기영 씨. 혹시….”
“…….”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
당연히 들어봤지. 안 들어봤을 리가 없지.
“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심리 현상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기영 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우정은 진짜였어. 그런 정신병 따위가 아니었다구.
그리고 아무리 내가 그런 증상처럼 보여도 면전에 대고 스톡홀름이니 나발이니 하면 잘도 공감하겠다. 오히려 적의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지.
정신병 환자를 다룰 때는 조금 더 세심하게 접근해야 해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는 단지….”
한 박자 쉬어주고.
“젠 님을 벌하실 거라면 저부터 벌해야 할 겁니다.”
사실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이자는 범죄자입니다.”
‘어허, 내 말 듣지 마.’
“기영 씨를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입니다.”
네가 매일매일 예스맨이더라도 이번만큼은 예스 하지 마. 자기주장을 관철해야지. 지금 이기영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야?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이게 지금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냐고. 가끔은 따끔한 말도 할 줄 알아야지.
“제 잘못입니다. 현성 씨. 그자는 아무 잘못도….”
“이자는 당신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 화도 내야지. 버럭버럭.
“기영 씨는 지금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당장 제 행동에 동의하시지 않을지언정, 결국에는… 제가 맞다는 걸 알아주실 겁니다. 저를 원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결국에는….”
이 템플러는 독이다.
젠. 너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물이다.
라는 얼굴로 분노를 터뜨리는 김현성의 표정과 감동을 받은 듯한 젠의 얼굴이 대조된다.
눈물을 터뜨리고 있는 템플러 젠, 이기영이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대한 눈물일까. 아니면 무력감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까.
녀석의 얼굴은 가히 남우주연상을 독차지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분노한 김현성도 나쁘진 않지만 젠 녀석의 얼굴에는 지난 삶에 대한 회한과 괴로움, 고마움은 물론이거니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도망… 도망치십시오. 이기영 님.”
“…….”
“이자는 제가 붙잡고 있겠습니다.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십시오!”
이 새끼 멋있어. 근데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야지. 말은 아주 청산유수야. 하늘 보여준다고 어쩌고 했을 때도 자신감 하나는 진짜 대단했지.
그때의 결과가 꿀꿀이죽이었고 곰팡이가 퍼져가는 폐가였어.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크윽!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 새끼야. 김현성 손아귀에서 뭘 도망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건 불가능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생쇼를 해요. 진짜.
“와라!”
김현성이 가면 너 죽어. 오지 마! 해야지.
당황스러움과 분노, 순수한 악의,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든 장본인을 두둔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김현성의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그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은 그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이번만은 자신이 옳을 것이다.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신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이 행동이 옳다.
녀석을 죽이는 게 옳은 행동이다. 기영 씨를 해방시키는 게 맞다.
입술을 꽉 다문 너희 현성.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전투태세를 마친 우리 젠.
단칼에 베어 죽여야겠다고 검을 뽑는 김현성의 모습에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하지 마!”
콰직 하지 마!
김현성이 진짜 살의를 품으면 무섭다.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오지만 그래도 목놓아 외쳐본다.
“그래요! 현성 씨. 현성 씨 말이 맞습니다.”
“네?”
“그가 저를 납치한 게 맞습니다.”
“…….”
“그가 저를 납치하고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맞아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젠의 얼굴에 배신감은 없다. 이 행동이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미친 사이코패스 김현성에게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런 행동밖에 없다는 걸 인지한 것일까.
“이렇게 손을 쓰시면 안 됩니다.”
“…….”
“그는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현성 씨.”
그래. 이 빌드업.
“그가 저지른 범죄가 아무리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한들, 그는 정상적인 재판과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현성 씨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행동은 대륙법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입니다. 만약 정말로 젠 님께서 벌을 받아야 한다면, 올바른 절차를 밟아야 할 겁니다.”
“…….”
힘없는 이기영은 위풍당당하게 한 걸음 나선다.
드라마틱하게 팔을 쫙 벌린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듯이, 내가 이 사람을 변호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연출 지렸어 진짜.
“아… 어? 아… 어….”
어떻게. 얘 이상해졌어.
“어… 아….”
김현성 왜 이래. 망가진 건 아니지? 아직 정상작동 하고 있는 거지.
“그를 처벌하는 것은 교국과 교황청이어야 합니다. 현성 씨.”
“아….”
이 새끼는 말이 없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자꾸만 얼굴이 기괴해지고 이상한 혼잣말을 지껄인다.
마치 양아치들에게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는 걸 보고 있는 얼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어…?”
“현성 씨.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
당장 달려간 이후에는 우리 젠한테 속삭인다.
“이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젠 님.”
“이러실 필요까지는… 저를 위해 싸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기영 님. 제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이 자유….”
“이미 충분히 자유로웠어요. 젠 님 덕분에… 말입니다. 이제는 제가 당신을 지킬 차례입니다.”
전형적인 클리셰지.
“제가 당신을 변호하겠습니다.”
응 변호 안 해.
“제가 당신을 지키겠어요.”
응 안 지킬 거야.
“그러니….”
네가 알고 있는 거 샅샅이 알려줘야 돼. 법정 싸움에서 이기려면 그게 필수거든.
네가 어쩌다 날개를 달았는지,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는 어디인지, 공략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시몬은 누군지, 다른 템플러는 또 어디 있는지 말이야.
‘전부 다 알려줘야 해.’
나는 너희 젠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는 이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거예요.”
아니야. 난 안 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