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38화
젠 (17)
도시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누구라도 지금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모양.
도시가 봉쇄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커다란 반투명의 막이 도시를 뒤덮고, 도시 내의 경비병과 모험가들이 명령을 하달받고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워프 게이트에서는 지원 병력들이 쏟아져 나오고, 출입구는 완전히 잠겨 버린다.
도시 내의 민간인들은 당황하는 듯한 분위기도 제법 실감 나게 연출되고 있는 중.
‘진 군사 일 잘해.’
이런 건 분위기가 중요한 거야.
봐.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 평화로웠던 도시가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뀐 것 같은 연출.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만 같은 무대.
“이쪽으로.”
“현 시간부로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이에 여러분들은 군의 통제에 따라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계엄령까지 내려주셨어?’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내가 누군지 알아?!”
꼭 저런 사람 한 명씩 있더라. 하지만 곧바로 제압되게 마련이지.
“입 닥치고 통제에 따라. 이 머저리 새끼야.”
“…….”
묵직해 보이는 녀석이 비협조적인 녀석을 다독여주자 곧바로 입을 다물고 있는 민간인이 보인다.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동해 조사를 받는 중.
아마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냐느니, 언제 마주친 적이 있냐느니 하는 확인 절차를 받고 있는 거겠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만 기밀입니다.”
“…….”
“긴밀히 협조해 주신다면 곧바로 귀가할 수 있으실 겁니다.”
“어이! 거기는 조금 어때?”
“현 시간부로 군사님께서 작전권을 넘겨받으셨습니다. 현재 현장으로 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제길… 빨리 처리해야겠군. 협력 길드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이쪽으로 와! 민간인들 통제 똑바로 하고.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이야.”
다들 진 군사님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확실히 얘가 공화국의 상징적인 존재로 발돋움하기는 한 모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악마 소환사라고 주변에 손가락질받던 녀석이 어느덧 훌륭한 영웅이 되어 있다.
‘이 새끼는 진짜 나한테 잘해야 돼.’
그림자의 영웅이라니. 다시 한번 생각해도 몸이 떨리자너.
당연하지만 그 악명은 공화국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교국은 물론이거니와 전 대륙에서 놈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만큼, 젠도 녀석을 알고 있겠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공화국은 교국의 적이었으니까….
아마 주요 인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꿰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낯빛이 어두워진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저 표정이 대답이 되어준 것만 같다.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공화국의 군사가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아… 군사라면….”
“쉽지 않겠군요.”
“괜… 괜찮은 건가요?”
“…….”
녀석은 확신을 담아 대답하지 못한다.
“…….”
“이동하겠습니다.”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몰래 빠져나간다든지, 경계가 풀리기를 기다린다든지, 하는 방법은 불가능에 가깝다.
촘촘히 짜인 포위망, 도시 전체를 봉쇄해 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만큼 결과 역시 효과적이다.
막말로 멍청한 도시 관리자라면 빈틈이 생기겠지만 공화국의 군사가 그런 틈을 내어줄 리 만무.
놈의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잘 짜인 거미줄을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이 있다면….
‘강행돌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물은 촘촘하지만 내구성이 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녀석이 파란 길드원이나, 자신의 수족들만 이용해 그물을 짠 게 아니니까.
이 도시에서 차출된 경비병이나 중소규모의 클랜 역시 놈의 작전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인력이다.
시스템은 완벽할지언정 부품이 사람인만큼 변수는 언제나 존재한다.
나와 같은 해결책을 떠올렸는지 젠 님은 한 손으로 나를 안고 곧바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순식간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다. 날개까지 펼치고 빠르게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모습은….
‘왜 이렇게 빨라.’
김현성보다는 느리지만 아무튼 빠르다.
‘이거 막을 수 있나?’
우리 진 군사님 이런 거에 약하잖아. 전술 김현성한테도 개 털렸었구.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나.
“제기랄! 쫓아!”
“목표물 발견했습니다. 목표물 발견.”
“움직여!”
반응 역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인지 공격 마법을 퍼붓고 있지 않지만 여러 갈래의 속박 마법들이 쏟아진다.
복면을 쓴 레인저들이 이쪽을 뒤쫓기 시작하고, 젠 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불나방들도 나타난다.
물론 전투력의 차이는 극단적이다.
“크악! 으악!!”
“지원 요청해! 지원! 어떻게든 발목을 붙잡아!”
“이동합니다. 목표 계속해서 이동 중.”
굳이 죽이지 않고 제압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네… 네. 저는 괜찮아요. 젠 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녀석은 내 얼굴을 가린 모포를 다시 한번 누르며 이동한다.
콰직! 콰앙! 하는 효과음들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중.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알 것도 같다. 수십 마리의 들개들이 사냥감 하나를 노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갉아 먹고 있겠지.
체력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갉아먹기 위한 전투가 진행 중일 거야.
잘 탈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거 몰이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특정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심지어, 이 멍청한 놈은 자신이 덫에 걸린 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구.
“후우… 후우….”
“젠 님!”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
화살 하나가 놈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녀석은 방향을 바꾼다. 나였어도 녀석과 같은 곳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망원경이 없었다면 분명히 놈에게 이쪽 루트를 제시했겠지. 판단력이 나쁘지 않은 게 오히려 독이 된 셈.
아마 목적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으로 등장하는 거 좋아하자너.’
몰이를 끝낸 이후에 한쪽 팔을 들고 재수 없게 웃으며,
‘여기까지입니다.’
라거나.
‘제 덫을 빠져나갈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라거나.
‘게임을 시작합시다.’
라고 지껄일 것만 같다. 절망하는 젠을 비웃어주며 팔을 내려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 그 새끼들 데리고 나오라고 해야겠다. 아직 덜 맞은 새끼들.’
내 얼굴에 멍들게 한 그놈들.
‘분명히 이 새끼들도 지금쯤 똥줄 타고 있을 거야.’
-그… 거렁뱅이가 부길드마스터였다고? 뭔…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돼. 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그런 미친 자식이었단 말입니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해 드린 건 맞나요?
-아마 착각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
-구조 요청이라고 받아들이신 모양이다. 세 번이나 우리에게 접촉한 게 필사적으로 구조 요청을 하신 거라고….
나도 모르고 있는 설정이었지만 누가 봐도 구조 요청처럼 보일 여지가 있기는 하다.
어떻게든 이 범죄자의 어두운 손길을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구조 요청, 감금당해 매일매일 참혹한 짓을 당하면서도….
그 약해진 몸을 이끌며 파란 길드에게 보낸 구조 요청을 묵살한 길드 신입들.
이기영이 얼마나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거렁뱅이 새끼라고 모욕받으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받은 것도 알고 있을까.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우리는 어떻게 하죠?
-…….
-…….
-일, 일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분의 진노를 저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그분의 진노라네. 언제적 표현이야? 진 군사 너무 빡세. 애들 좀 작작 잡지.’
-길드마스터께서 용서하지 않을 거다.
“…….”
“…….”
웬 길드마스터. 진 군사는 어디 가고.
저도 모르게 망원경을 돌리자 자연스럽게 들어온 그림.
-나는 모르고 있었던 일이란 말이다. 제기랄! 내가 왜! 제기랄!
청이 형은 누구랑 대화하고 있어?
-이 미친 자식! 제기랄! 나는 이번 일에서 손 떼겠다. 네놈들 일에 휘말리는 게 아니었어. 힘만 믿고 설치는 멍청한 놈이… 감히… 내게… 그동안 돌봐준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놈이!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여? 검은 머리 짐승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더럽고 구역질 나는 자식. 내가 무능하다고? 내가?
어. 너네 싸웠어? 현성이가 뭐라고 했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굉음이 들려온다.
몸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만 같다. 또 어디에선가 마법이 날아들어 온 것 같아 곧바로 입을 열어봤지만….
“괜, 괜찮으신가요?”
“…….”
“젠 님?”
“기영 씨.”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르다.
나를 안고 있는 것은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
“현성이?”
분노로 일그러진 잘생긴 얼굴이었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울자.
상처받은 것처럼.
“젠…. 아니… 현… 현성 씨.”
일단 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