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35화
젠 (14)(삽화 별첨)
“재수가 없으려니 진짜. 아… 장비 새로 산 건데… 제기랄.”
‘닦으면 되잖아. 이 새끼야. 더럽게 깔끔 떠네. 진짜. 생긴 건 돌도 씹어 먹을 것처럼 생겨 가지고.’
“…….”
“저기요. 일어나세요.”
“…….”
“일어나시라고요. 나 참… 사람들이 쳐다보잖아요. 에라이….”
“…….”
“대충 골드나 쥐여줘. 괜히 알려지면 일 복잡해진다.”
“어휴….”
“남의 눈도 의식할 줄 알아야지. 언제까지 튜토리얼 던전에서처럼 행동할래?”
“하지만 이 거지새끼가 길을 막았다고요. 형. 그렇게 세게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엎어져 있는 거 누가 봐도 연기 같은데… 역겹지 않아요? 그냥 눈감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골드가 궁하면 사람 등쳐 먹을 생각하지 말고 일을 하세요. 이 거지새끼야. 어휴….”
“그만.”
“…….”
“더 이상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마.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도 조심해야 할 시기다. 안 그래도 길드마스터가 최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셨는데… 사고가 터지면 그분께 뭐라고….”
‘걔가 언제부터 니네 길드마스터야? 내 길드마스터지.’
“어휴….”
아니….
“재수가 없으려니. 얼마 필요하세요?”
나 돈 많아, 이 새끼들아.
너네 연봉도 전부 다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야. 이 새끼들아.
“뭐야? 무슨 일인데?”
“글쎄,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
“파란 길드가?”
“정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웅성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갑작스럽게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은 피해야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전개와 상황에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
눈앞에 비치는 것은 남자 둘, 여자 둘로 구성된 파란의 신입 길드원들.
자연스럽게 마음의 눈으로 놈들의 능력치를 확인하자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한다.
재능이나 성장 상태가 튜토리얼을 막 끝마친 애송이들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능력만 본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이들, 정하얀이나 김현성같이 규격 외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안기모나 김창렬 이상의 성장을 보여줄 수도 있는 인재들이다.
나도 이런 사건만 아니었다면 이들을 한번 키워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누구보다 저들이 자신의 가치를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 시바. 세상이 지들 것 같겠지.’
몰락해가고 있었던 길드에 들어갔던 우리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 파란 길드는 명실상부 대륙의 최고 길드로 군림하고 있는 길드였고, 교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니까.
말단 길드원이더라도 그 사회적 지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생 신입인 벨리에 같은 경우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로비를 받거나 일반인들을 꿈도 꿀 수 없는 사교모임에 초대받는 일이 허다하니까.
물론 길드 차원에서 그런 종류의 쓸데없는 사교활동을 지양하기는 하지만 참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아마 이 새끼들은….
‘신나게 즐기고 있는 부류처럼 보이는데.’
본인들이 특권계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은 표정들, 자신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삶이 다르다고 느끼고 있는 행동거지.
높은 연봉과 계약금으로 사치를 즐기고 있는지 때깔도 좋다. 얼마나 좋은 걸 처먹였는지 피부도 반짝반짝하고… 얼굴에도 자신감이 넘쳐.
소환되기 전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가 이쪽으로 왔으니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겠지.
앞으로 펼쳐져 있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보일 거야.
‘김현성. 시바. 얘들 인성검사 안 했어?’
당연하지만 시선이 집중되면 불편한 것은 저쪽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눈치 볼 줄 아는 녀석이 영업용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언제 봤다고 선생님이야.’
“저희 쪽에서 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나탈랴. 혹시 저분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 좀 해주겠어?”
“네.”
“선생님.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별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크게 다치신 것 같지는 않고… 조금 요양이 필요하신 것처럼 보이네요. 건강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저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괜찮으시면 병원에 데려다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늘 저희가 벌인 실수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나마 이 새끼는 눈치 볼 줄 아네.’
하지만 눈빛은 냉랭하다. 그래. 시바 사회 특권층께서 거렁뱅이 상대하기 귀찮으시기도 하시겠지.
아마 주변 갤러리들이 아니었다면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해코지를 할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진다. 침 뱉고 지나가지 않을 정도만 되도 다행이지, 뭐.
“괜, 괜찮습니다.”
“제 말이 맞잖아요. 형. 이 거지새끼 골드 필요한 거라고. 병원에 데려다준다니까. 왜 또 거기는 가기 싫어?”
“그만.”
“지금 주머니에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치료비로는 충분할 테니까. 잘 쓰세요. 다음부터는 눈 잘 뜨고 다니시고.”
‘동네 사람들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세요.’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근처 갤러리들이 보고 있는 장면은 녀석이 나에게 골드를 챙겨주는 훈훈한 장면일 터.
그나마 사람들 눈치는 볼 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파란 길드가 가지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가 있는데….
아니, 지금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시바.
“오늘 운 좋으신 줄 아세요.”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반쯤 나를 일으켜 세운 녀석들은 이윽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대충 몇십 골드 정도가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진짜 내 입장에서는 작은 돈이지만 현시점에서 느끼기에는 무척 커다란 액수.
주변에서 언뜻 탐욕이 보이기도 한다. 갑자기 나타난 거렁뱅이 수중에 몇십 골드가 떨어졌으니 질 안 좋은 양아치들의 타깃이 됐을 가능성도 있겠지.
‘그래. 시바. 사기꾼으로 보였다 이거지.’
-군사님.
-…….
-어이 진 군사.
-…….
-청이 형. 내 말 안 들림?
-…….
-야.
-제길. 또 뭐가 문제….
-파란 길드 공화국 지부에서 길드원 새로 받은 거 알아요?
-…….
-그 새끼들 누가 뽑았어? 현성이야?
-만났나 보군.
-현성이가 뽑은 거 맞아요? 네가 뽑았지?
-정확히 말하면 두 명의 동의하에 같이 입단을 허가했다고 봐야겠지. 그 힘만 센 멍청한 놈은 내게 조언을 구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녀석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줬을 뿐이고.
-김현성이 듣고 싶은 말이 뭐였는데.
-빠른 성과.
-…….
-결과물을 빨리 얻고 싶어 하더군. 예의도 바르고 쓸 만한 녀석들처럼 보이지 않던가.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화제성도 있으니 공화국에서는 제법… 평가가 좋은 편이지. 이미 던전 공략을 한 차례 마치고.
-인성은?
-제법 예의가 바르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나.
그건 시바 너랑 김현성한테나 그렇겠지. 대륙 최고의 권력자 둘한테 납작 엎드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분노조절장애자도 유교 사상에 심취하게 될 거야. 그렇게 다들 착한 척하고 그러는 거야.
눈앞에 있는 과실에 눈이 멀어서 덜컥 먹어버리면 어떻게 해.
-뒷조사는 해봤어?
-튜토리얼 던전을 막 빠져나온 신입들이 조사할 게 뭐가 있을까. 아직 정식 길드원으로 오퍼를 넣은 것도 아니야. 어디까지나 파란 길드의 공화국지부의 임시 길드원이라는 타이틀로….
-지금 군사님처럼요?
-…….
-아, 쓸데없는 농담이었으니까 잊어요. 상처받지 말고. 삐지지도 말고. 아무튼 그래서 여기는 왜 데려온 거예요?
-그게 중요한가? 간만에 휴가니, 여가생활이라도 즐기고 있는 거겠지. 던전 공략을 자축하기라도….
-뭔 놈의 여가 생활을 암시장에서 즐기는 새끼들이 다 있나. 아. 군사님이 그러기는 하지. 쥐새끼 마냥 블랙마켓 가서 이백만 골드에 노예나 구매하고 말이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꼭 지 같은 애들을 뽑아다 놨어. 김현성이 얘네 뽑은 거 아니지? 너 이 새끼. 네가 헛바람 불어넣은 거 맞잖아. 그리고 이 멍청한 양반아.
-뭣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네 그 히스테릭함이 내게 쏟아지는 건지 모르겠군.
-김현성이 하고 싶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다 들어주면 돼? 파란 길드 공화국 지부가 당신한테 안 좋은 일도 아닌데. 좀 성심성의껏 도와줄 수는 없었어?
-나는 네 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안 하면 어쩔 건데.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아니, 안 참으면 어쩔 거냐고. 때려치울 거야? 어이, 진 인턴. 일하기 싫으면 나가. 나가!
-제길! 이 개자식! 도대체 내가 네놈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난 네가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에 없단 말이다. 그 힘만 센 멍청이와 어울려주는 것도, 그 자식 일을 도와주는 것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식한테 앵무새처럼 했던 말들을 되풀이 하는 것도. 전부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제기랄! 나는 네놈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도 않고 휘말리고 싶지 않단 말이다. 제기랄! 제기랄! 이기영 이 역겨운 자식! 나는 파란 길드 공화국 지부고 나발이고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그 멍청한 놈과 1분 1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제기랄! 그리고 네놈이 그렇게 내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도!
-…….
-…….
-…….
-잠깐… 흥분했군. 사과하지.
‘답답할 만해.’
-제기랄….
‘현성이가 사람 답답하게 하는 데 뭐가 있기는 있으니까.’
내가 그걸 깜빡하고 너무 진 군사님한테 성질을 부렸네. 얘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봐.
‘특히 다른 사람들은 더 답답해하니까.’
-아니야. 진 군사님 마음도 충분히 이해 가는데 뭐. 근데 다음부터는 얄짤 없으니까. 성질 좀 죽이자.
-…….
-그리고 나 지금 바빠요. 급하게 갈 데가 있으니까. 나중에 봐.
-어디로 가는 거지?
-돈 벌러.
호구 하나 물었자너. 이 새끼들한테 사회가 얼마나 거칠고 험난한 곳인지 보여줘야지.
그리고 지금 관리하고 있는 범죄자랑도 엮을 수 있을 것 같고….
잠깐 멍하게 앉아 있었지만 행동은 빠르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망원경으로 녀석들을 찾기 시작.
사람들의 시선이 좋은 건지, 아니면 레스토랑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광장 근처를 걷고 있는 놈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생활연기에 돌입. 거렁뱅이 모포는 그대로 유지한다.
“멍청한 행동은….”
“알고 있다니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길드인장의 의미를 잘 떠올려봐라. 이게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라고. 우리는 그들과 같은 계급이 아니야.”
“…….”
“마땅히 그런 이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위에 서 있는 자들의 특권이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고 아주 작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도 겸허히 대처해야 한다. 우리는 특권층이야. 가지고 있는 권력만큼 작은 책임도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 누리게 될 것들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견뎌내기 쉬운 것들이니까.”
“후우….”
“네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골목에 숨어 있다가 녀석들이 나오는 타이밍에 몸을 빼낸다.
“아아악!”
“…….”
“이 새끼는….”
“너… 이 거렁뱅이… 새끼?”
빛의 성자의 몸은 너무나도 연약했던 것일까.
“이 새끼가…왜….”
“아윽….”
형편없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은 마치 8톤 트럭과 정면에서 부딪힌 듯했다.
“아으으윽… 아악….”
“이 거지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다음 페이지에 세라핌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