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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34화 (92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34화

젠 (13)

-저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군사님.

-…….

-도시에 도착했다니까요? 뭘 어떻게 하고 있길래 아직도 연락이 없어?

-…….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에밀의 여관에서 묵고 있어요. 여기 조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기는 하더라. 근데 방이 너무 구려. 아! 이런 도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분위기도 좋고. 암시장도 쓸 만해 보이고… 공화국에 이런 곳이 생각보다 많나 봐.

-…….

-혼자 가만히 있으니까. 심심하고 좀 그러기는 해.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에서 내려온 공문은 받은 거 맞죠? 현성이한테는 잘 숨겼고? 그거 공문 안 숨기면 난리나. 그나마 요즘 연합 쪽으로 도망쳤다는 소문 때문인지, 그쪽 지역을 제대로 조지고 있는 것 같던데. 덕분에 여기에서 활동하기 편해서 좋다니까. 혼자서도 많이 돌아다니고.

-…….

-군사님 빨리 안 오면 더 복잡해진다니까요. 추적에 진전이 없어서 곧 민간에도 알릴지도 모른다는데. 교황청도 완전 비상사태고… 그럼 다시 한번 대륙 뒤집어지잖아. 군사님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프로젝트 준비 열심히 했는데 다른 변수 때문에 그거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어요?

-…….

-이것도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응? 프로젝트는 어떻게 성사시키려고 그래? 진 군사. 이렇게 쉬운 일도 제대로 못 다루면서… 어떻게 대륙을 맡길 수 있겠냐구. 내 말이 틀려요? 지금 지혜 누나 믿고 이러는 거면 나 상처받아. 실질적인 관리자가 누군지 잘 알아둬야 한다고. 엄밀히 말하면 내가 총 책임자라니까. 어? 어? 진 군사 지금 속으로 욕한 거 아니지? 상사라고요. 상사. 당신 상사가 나야.

-…….

-어이 진 군사. 내 말이 우스워요? 내 말이 우습냐구. 지금 내 말이 말처럼 안 들려요?

-제기랄….

-그렇지.

-제기랄 이기영 개자식. 네가 닦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다. 애초에 그 힘만 센 멍청이를 맡으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미 도시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이 개자식.

-현성이요? 걔 잘 지내지?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게 하지 말란 말이다. 나도 할 일이 있고… 그 멍청한 놈 붙잡고 있기가….

-원래 인턴 때는 여러 가지 잡일에도 투입되고 그러는 거야.

-제기랄. 역겨운 자식. 내가 어째서… 제길.

-아, 때려치우고 싶어?

-…….

‘때려치우기는 싫자너.’

-때려치우고 싶으면 때려치워도 돼. 우리 인력 많아.

-웃기는 소리.

‘들켰네.’

-인력이 많은 건 아니고… 뭐. 자꾸 군사님이 이런 일로 스트레스받고 이러니까. 내가 이 자리 제안한 게 미안해서 그렇지. 군사님 할 일도 많다며… 굳이 대륙프로젝트까지 신경 쓰게 되니까… 그냥… 조금 그러네요… 괜한 부담 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군사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감당하기 벅차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

‘이 새끼 삐졌나 봐.’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말을 못 하겠던가. 그만두지 않겠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겠지만 한번 고기 맛을 본 놈이 어떻게 이걸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까.

대륙을 관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넣어 성사시킬 수 있는 메리트는 그 어떤 것과도 바꾸기 힘든 달콤한 과실처럼 느껴질 것이다.

특히 우리 같은 인간들은 더욱더 그렇겠지.

‘개고생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프로젝트 펑크 났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허무하겠어.’

-군사님. 내가 말이 좀 심했나 봐.

-…….

-연구비 지원 낭낭하게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몸 조심히 와요.

-…….

‘이 새끼 진짜 삐졌어.’

-…….

-약속은 지켜라.

그 와중에 연구비 지원은 놓칠 수 없나 보다. 녀석의 말에 슬그머니 침대로 이동한다. 슬슬 활동할 시간이었으니까.

“젠 님.”

“…….”

“젠 님… 일어나실 시간이에요.”

“아… 제가… 늦게 일어났군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요. 어젯밤에 고생하셨으니까요. 도시락은 싸 뒀으니 오늘 일 나가셔서 드세요.”

“아… 이럴 필요 없으십니다. 이기영 님.”

“저도 함께 가고 싶지만 지금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으니까… 젠 님께서 골드를 모으실 때까지는 이런 일이라도 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리는…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아직 잘 움직이지는 않지만 걸을 수 있답니다. 보고 계신 것처럼요. 아마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질 때 즈음이면 건강해질 것 같아요.”

‘그러게, 개고생하기 싫으면 골드 좀 많이 챙겨오지 그랬어. 달랑 60골드, 로자리오까지 팔아먹고, 새 신분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알았나 봐.’

동정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장 몸은 괜찮아졌지만 일전의 사고로 인해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빛의 성자.

다리를 절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팔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한쪽 눈은 잘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고, 먹은 것은 금방 토하기 일쑤, 꿀꿀이죽은 더 이상 들어가지도 않는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힘들게 될 정도로 몸 곳곳이 망가져 버렸다.

물론 꿋꿋한 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힘차고 기운차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이기영답다.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이 창문을 열자 따가운 햇빛이 쏟아진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 언제나 자유를 갈망하던 명예추기경은 따사로운 바람과 햇빛을 온몸으로 반기며 입을 연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네. 정말로 좋은 것 같군요.”

“이기영 님.”

“네.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오늘도 바깥으로 나가실 생각입니까.”

“네. 장을 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커피도 마시고. 간만에 힐링 좀 하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우리 생활비 아껴야지 빨리 돈 모으지. 그리고 왜 내가 하는 것마다 네 허락이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저번에도 이러다가 이 꼴 난 거 알지? 네가 지지해 주지 않으면 지금 누가 날 지지해 주겠어.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도 별일 없었으니까요.”

“교황청의 이목이 연합 쪽으로 쏠린 것 같습니다만 이곳도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누군가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나 혹시라도 추적당할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약속하시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곳만 들르시고, 말씀드린 길만 이용하셔야 합니다. 혹여나 다른 곳은….”

“네. 시장만 빠르게 다녀올게요.”

“후우….”

장비를 입고 있는 녀석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다.

하룻밤 사이에 깨끗해진 자신의 장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하지 않은가.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올 거야. 내가 헌신할수록 녀석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입을 다물기 시작, 다시 한번 슬픔과 감동의 늪에 빠진 것일까.

다리를 절며 힘들게 움직이고 있는 명예추기경을 바라보는 놈의 눈시울이 축축해지는 것이 보인다.

눈물을 감추기 힘든 것인지 곧바로 등을 돌려 장비를 챙기는 모습. 그 뒷모습이 유난히 작게 느껴진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젠 님.”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째질 것 같자너.

“오늘은 최대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네.”

“그리고….”

“네?”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인걸요.”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다녀오세요.”

주접 떨지 말고 빨리 나가. 나도 좀 자유시간 좀 가지자.

한참 동안이나 문을 서성이던 녀석은 이윽고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 이쪽 역시 곧바로 세탁을 마친 모포를 뒤집어쓰고 바깥으로 나선다.

세탁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결한 모포, 하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나가는 것이 맞다. 녀석의 말대로 아직은 위험한 타이밍이기는 하니까.

머리를 모포까지 푹 눌러 쓴 이후에는….

‘커피 마시러 가자.’

아침부터 도시락 만들고 장비 닦느라 힘들었는데. 이 정도 힐링은 필요하지.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새로 자리 잡은 도시의 분위기는 제법 특이하다. 암시장들이 많은 지역이라 낙후되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느낌.

모험가들은 일반적으로 처분할 수 없는 장물들을 처분하거나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대놓고 만들어진 블랙마켓처럼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적당히 사람 사는 냄새가 들기야 한다.

이 정도라면 공화국에서 암묵적으로 이곳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벌어들이는 수익도 짭짤할 테고,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제법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진청 이 새끼한테 물어보지 뭐.’

물론 전형적인 암시장 같은 곳도 존재하기야 한다. 젠은 주로 그곳에서 의뢰를 받거나 물건을 처분하지만 그건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시장에 들러 사흘 동안 먹을 만한 음식을 사고…

‘카페다.’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던 바로 그때였다.

“파란 길드다.”

라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린 것은 당연지사.

‘뭐야. 여기 없을 텐데.’

걔네 지금 연합 가 있잖아. 그리고 리안이랑 창렬이가 여기 오는 거 막는 거 아니었어?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누군데? 아는 얼굴들이 아닌데?”

“공화국 지부에서 입단한 파란 길드원들이잖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공화국 지부의 설립을 맡겼으니 길드원들도 새로 받았겠지.

아마 임시직으로 고용됐거나, 인턴 활동 비슷하게 하고 있는 모험가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김현성 이 새끼가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모양, 진청이 대부분을 관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현성이 나쁘지 않은 결과를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새로 사업도 벌였을 거고, 그사이에 던전에 들어가 있었을 수도 있겠네.

‘어디 갔어?’

“어어?”

새로 들어선 길드원들의 스펙이나 성향들도 궁금해진다.

굳이 몸을 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은 느낌. 어차피 쟤들은 모르고 있을 테니까.

다만 후드를 조금 더 푹 눌러쓰고 주변을 둘러본다.

“파란 길드 인장을 여기서 다 보네.”

“저기. 튜토리얼 던전을 단시간에 끝내고 온 유망주들이라고 들었는데. 결국 파란 길드에 들어갔나 보네요. 연봉이랑 계약금도 많이 받고 들어갔다죠 아마. 부럽네요. 오자마자 장밋빛 인생….”

“공화국 길드에서는 따로 오퍼가 없었대?”

“파란 길드마스터가 직접 뽑아 간다고 했는데 뭐라 말이 나올까 봐요. 돈, 권력, 힘 따라 입단한 거죠. 웬만한 공화국 길드는 파란 길드에서 내건 조건에 반도 못 채워 넣을걸요?”

“그건 그렇지.”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제법 잘 알려진 이야기인 것 같았다.

‘관심 좀 가졌어야 했나.’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흥미롭기는 하다. 김현성이 직접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파란 길드원들이고, 나중에 얼굴을 한 번쯤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제 막 튜토리얼을 졸업한 놈들이니만큼 정식 길드원으로 불려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재능이 있어 보이면 조금 키워주는 것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을 때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밀려난 것. 항상 다리를 저는 연기를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몸이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나뒹굴어진다.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가장 먼저 시야에 비친 것은 가슴에 달려 있는 파란 길드의 인장.

그 뒤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 거렁뱅이는.”

뭐라고?

“길바닥에 웬 거지새끼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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