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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32화 (92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32화

젠 (11)

이 새끼도 면목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기획했던 삶과 지금의 삶이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템플러로서,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길만 걸었던 녀석이었던 만큼 이런 의외의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명예추기경이 납치된 사실이 대륙 전체에 퍼지는 순간 당황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늘 위는 그리폰 부대로 꽉 차 있고, 곳곳에서 레인저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쉴 곳을 찾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포위망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교국에서 템플러로 활동했던 만큼 녀석은 교국의 집단들이 얼마나 유능하고 끈질긴지 잘 알고 있다.

수색대는 검은백조가 자랑하는 레인저 부대였고, 모든 길드와 무력집단들이 유기적으로 통신망을 만들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향한다.

틈새는 매우 작고, 그 틈새를 빠져나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템플러 젠이라고 이런 5평 남짓한 쓰레기 같은 곳에서 빛의 성자를 재우고 싶을까.

이 새끼가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나한테 꿀꿀이 죽만 먹이고 싶겠냐고.

나무라도 걷어 집 안에 빛이라도 들어오게 조치하고 싶겠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화전민 마을에서 기본적인 생필품들을 구해오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분명 그럴 거야.’

결과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2주 동안 교국의 포위망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조심했기 때문이다.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끊임없이 흔적을 지우고, 거북이처럼 숨어 불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녀석이 내게 소리를 지른 것은 이유는 내가 외부와 접촉했기 때문이 아니다.

변수라고는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지금까지 이곳에 들어오지 않은 이유는 내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마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용서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차마 못 보겠는 거지.

‘내가 탈출하고 싶다고 말한 게 아니자너. 지가 날 끌고 온 거잖아. 나는 시바 자유롭게 해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지가 기어코 시바 가자고 해서 간 거자너.’

머릿속은 시바 꽃밭이었을 거야. 하늘도 보여주고, 대륙 여기저기 여행도 보내주고, 하하 호호 웃으며 행복한 생활을 꿈꾸고 있었을 거야.

근데 웬걸. 이런 거지같은 상황이 2주나 계속되니까. 견딜 수 있었겠어? 얼마나 미안하겠어?

내가 이 새끼 생각을 읽을 수가 없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자괴감과 미안함이 폭발했다고 봐야지.

가죽 해체 때문에 퉁퉁 부은 손을 보니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막 생각나고 그랬을 거야.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 환하게 웃어주는 빛의 성자를 보니까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어.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괜히 하게 되고 자신의 선택에 의심을 품게 되고, 내가 제대로 해준 것도 없었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불안하고, 무섭고, 미안하고, 그래서 시바 언성을 높인 거지? 그렇지?

‘…….’

근데 그건 다 이 범죄자 새끼 사정이지.

내가 이 새끼 사정까지 봐 줘야 돼?

어디서 시바 소리를 질러?

이 못난 새끼 고기 한 점 먹여보겠다고 무두질을 했던 게 어처구니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같이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까 정도 들고 그래서 시나리오 수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데.’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망원경 속에 비친 놈은 마음의 심란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꽤 멀리까지 나가 있다.

포위망이 줄어들고, 둘이 아니라 혼자라면 저 정도까지 나갈 수도 있다는 거겠지. 어느덧 날이 밝아 아침이 다가온다.

놈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소도시 안으로 진입할 준비를 마친다.

정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지하수로를 거쳐서 들어가고 있었다.

레인저들이 깔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검까지 뽑아 들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지만… 레인저들은 보이지 않는다.

슬슬 이 주변도 헐거워지고 있으니 저쪽까지 인력을 투입할 수는 없었겠지.

‘소도시에 들어간 이유도 척 보면 척이지 뭐.’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들었을 테고… 오늘 내가 차려준 거 보고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했을 거야.

손에는 고작 60골드밖에 없지만 공화국으로 떠나기 전에 보급을 확실하게 해야 했으니까.

무사히 소도시로 들어온 녀석은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다.

-후….

하는 한숨이 놈이 얼마나 긴장했는지는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인파가 많은 광장에 섞여 모험가 행세를 하며 주변을 돌아다닌다.

-물건을 팔러 왔습니다만.

녀석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상점. 얼굴을 푹 숙인 녀석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무슨 물건이요?

-이것입니다. 얼마나 받을 수 있습니까?

꺼낸 것은 베니고어의 로자리오. 이 새끼가 기어코 신앙까지 팔아치우려고 하고 있다.

-…….

-…….

-이건 어디서 구한 거요?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 굳이 그런 건 아니지만 출처가 있는 게 조금 더 팔기 쉽거든, 대충 봐도 교국 교단의 물건처럼 보이는데… 아마 가져다 주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요. 사실 요즘 뒷거래는 다들 꺼리는 편이라… 내가 제값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줄 수 있는 겁니까.

-끄응. 일단 진품이 맞는지 확인이나 조금 합시다. 제법 높은 신분이신 분이 가진 것 같은데… 혹시나 교단의 고위사제를 죽이고 얻은 물건이라면… 되팔기 더 어려운데… 며칠 전에 여기에 이단 심문관들이 왔다 갔다 하던데 혹시 그거랑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닌가 몰라.

-그런 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후우… 나는 딱 340골드 드릴 수 있소.

-…….

-제값으로 팔면 1,000골드는 우습게 나올 것 같지만 지금은 워낙 처분하기 어려워서… 등쳐먹으려고 한 건 아니니까 표정 좀 푸시오. 여러 가지 생각했을 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 금액을 맞춰준 거니까.

-…….

-나는 340골드밖에 줄 수 없으니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도시로 가서 팔아 보는 걸 추천하고 싶은데… 솔직히 여기 근처에 있는 다른 놈들은 대부분 사기꾼들이니까 가지 말고… 알고 있겠지만 공화국 쪽에.

-팔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요?

-그렇게 합시다.

-끄응… 당신이 너무 손해 보는 것 같은데… 혹시 골드 말고 따로 원하는 건 있소?

-식료품, 기본적인 생필품이라면 무엇이든지.

-뭐 사연은 묻지 않겠지만…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쇼.

녀석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돈다. 안쪽으로 들어간 장물상이 혹시나 추격대와 함께 등장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직까지 일반에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실제로 도망자들 같은 경우에는 지하 마켓을 이용하니, 레인저들이 몇 번쯤 들렀다고 해도 설득력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변에 다른 장물상인에게는 말을 해 놓았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좋게도 이쪽은 아닌 모양, 적어도 고객을 뒤통수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 같았다.

실제로는 사기 친 이후에 뒤탈이 걱정될지도 모르지. 대충 봐도 위험한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요.

-이 정도만.

-어… 그렇게 하쇼. 별 의미는 없겠지만 10골드 더 넣었으니 주머니도 가져가고.

-…….

-세어보지 않는 거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은 바깥으로 나선다. 빠르게 도시를 빠져나가야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제법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지나치는 중.

이윽고 모험가 상점의 진열대를 보고 멈춰 선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부츠?’

모험가용 부츠와 진열되어 있는 기본 장비들, 움직이기 편한 옷들이고, 더러운 모포보다는 훨씬 나은 것처럼 보이는 장비들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싸구려 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성비가 좋아 보이는 세트 장비. 나름대로 아이템 판정을 받은 물건도 있고….

-부츠는 피로 방지 기능이 붙어있는 아이템입니다. 손님, 흔하지 않은 물건이에요. 나온다고 해도 금방 팔려버리고요. 다른 기능이 없어 모험가분들이 사용하시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관련 기능이 붙어 있는 아이템은 초보 여행가들이 사용하시기에 제격이거든요. 이 세트 아이템은 이처럼….

-주시죠.

-188골드입니다.

-…….

녀석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선다. 입에는 미묘한 미소가 들어서 있다.

실제로 흔한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최근에야 생산직이 많아져 저런 아이템들을 생산하고는 하지만 저런 매물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전체적인 생산직의 수준이 낮기도 하고, 또 품질에도 차이가 많거든.

아예 기능이 붙어 있지 않은 채로 나오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아침 일찍이라서 저런 매물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녀석은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온다.

걱정했던 것치고는 너무나도 무난하게 원하는 것을 얻은 것 같은 느낌.

아마 자기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2주 동안 이쪽 지역을 휩쓸고 간 이후라고는 해도 너무나도 무난하게 도시를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운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아마 레인저들이나 이단심문관들이 교대하는 도중이었다든가, 우연히 벌어진 틈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해졌다고 봐야지.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서 명예추기경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내려온다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되돌아오는 길은 빠르다.

이 범죄자 새끼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손에 물건을 한가득 들고 오고 있는 중.

기본적인 생필품, 식료품, 심지어는 모험가 장비와 부츠까지 얻은 이후인지 발걸음이 더욱더 가벼워 보인다.

이윽고 똑똑 하고 문을 두들기는 녀석.

“이기영 님?”

녀석은 작게 나를 불러보지만 당연히 대답하지 않는다.

“…….”

“이기영 님.”

한 번 더 이름을 부른 이후에 녀석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싸구려 통나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을 확인한 것일까. 심지어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 새끼 오는 거 보고 바로 데웠거든.

“…….”

감동받았을 거야. 그렇지. 아침까지 기다리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든 거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든 건 아니지. 아무튼 계속 온기가 식지 않게 했다 이거예요.

“감사합니다.”

“…….”

내가 잠든 걸 확인한 이후에도 조용히 입을 열어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하는 말로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해.

하지만 놈의 미소가 일그러진 것은 순식간.

“이기영 님…?”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빛의 성자의 모습을 발견한 이후에는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내 몸을 뒤집는다.

불덩이같이 뜨거운 몸,

“하아… 하아… 하아….”

역병이라도 걸린 것인지, 창백해진 얼굴.

“하윽….”

저도 모르게 내뱉는 고통스러운 신음.

행복한 모험이었지만, 연약한 빛의 성자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지난 2주간의 생활이 그의 상처를 벌리고 만 것일까.

이런 개 거지 같은 생활, 햄비어 고기랑 꿀꿀이죽이나 처먹던 생활이 그의 몸을 망치고 만 것일까. 아니면 시바 흙탕물을 밀어내야 했던 노동이 문제가 됐던 것일까.

“이기영…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이기영 님….”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하고 생각했을 거야.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구. 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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