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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31화 (92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31화

젠 (10)

-나 좀 구해달라니까. 누나?

-지금 저도 바빠요. 그리고 이왕 고생하는 거 확실하게 하세요. 오빠가 거기서 더 고생할수록 여기는 더 불타고 있으니까. 애초에 원한 그림이 그거 아니었어요?

-…….

-여론도 완전히 뒤돌아섰고, 교황청 개혁도 착착 진행되고 있는 도 중이고요. 국가 위기잖아.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라니까. 애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있고… 곧 있으면 던전도 발견될지 모르잖아요?

-그냥 내가 고생하는 게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설마요. 내가 정말로 그럴까 봐? 우리 오빠 오늘은 밥 안 거르고 잘 먹고 있는지, 자는데 춥지는 않은지, 목욕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하루 종일 오빠 생각밖에 안 한다고요. 근데 어떻게 해요. 조금 더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게 이득인 것 같은데. 무엇보다 쌓이고 있는 신성이 장난 아니라니까요. 우리 준비해야 될 사업도 있잖아. 사제들이 기도를 평소보다 더 많이, 진심으로 드리고 있는지, 위에 있는 베니고어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니까.

-아니.

-땡길 수 있을 때 땡기는 게 맞아요.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둬야 나중에 긴말 안 나오죠. 우리 진 군사가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 비용 감당하려면 이번 기회에 단단히 한몫 챙겨야 돼.

-벌써 걔한테 프로젝트를 줘?

-그나마 걔가 김현성 붙잡고 있어서 지금 대륙이 무사한 거라니까요. 김현성이 멍청하기는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감정노동, 정신노동, 훌륭히 하고 있는 진 군사도 얻는 게 있어야 업무 능률이 올라가죠. 그리고 그렇게 나쁜 프로젝트도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는 힘든데….

-초짜가 뭘 알겠어? 누나, 자꾸 내 앞에서 진 군사 편들려고 하는데… 나 그거 좀 불편해.

-나는 언제나 오빠 편이지. 근데 진 군사 참 유능하잖아. 김현성 마크하면서도 일은 척척 잘하고, 시간 남을 때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랍시고 가져오는데 어떻게 안 예뻐할 수가 있겠어요? 아! 혹시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개뿔. 시바.’

-우리 오빠 질투도 하고 그러나 봐. 왜 이렇게 귀여워? 안심해도 돼. 걔가 능력은 있어도 생긴 건 재수 없게 생겨서 내 타입이랑은 거리가 머니까.

-걔가 재수 없게 생기기는 했어.

-맞아. 뭐라고 표현 못 할 재수 없음이 있기는 있어요. 특히나 프로젝트 제출할 때 얼굴이 얼마나 띠꺼운지, 나도 모르게 딴지 걸고 싶어진다니까요. 본인도 본인이 유능한 걸 아니까. 근데 또 그걸 티를 내니까. 재수가 없는 거야. 분명히 지구에 있을 때도 상류사회에 있었을걸요.

-…….

-아. 젠인가 뭔가 하는 템플러는 잘해줘요?

-잘해주기는 해. 그것밖에 없어서 문제지. 얘가 융통성이 없다니까. 아무튼 나 진짜 못 참겠어. 조금만 더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진짜 하얀이 부를지도 몰라. 누나.

-그럼 불러보시던지… 아무튼 여기까지 할게요. 꿀꿀이죽 맛있게 먹어요.

-아….

-푸흡.

‘시바. 이거 분명히 나 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이득을 보는 건 보는 건데, 그거랑은 별개로 나 먹이려고 그러는 거라고.

물론 이 누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여러 가지로 이득 보는 측면도 있으니까. 최근 이벤트다운 이벤트가 없었던 만큼 땡길 수 있을 때 더 땡기고 싶겠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내가 이런 생활을 하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연락할 때마다 꼭 자기 지금 뭐 하고 있다고 사족 붙이는 것도 그렇고….

커피 마시고 있다느니, 손톱 손질하면서 반신욕하고 있다느니, 힐링하고 있다느니, 그런 말을 왜 하겠어. 악의적으로 나 놀리는 거라고.

‘시바. 진짜 하얀이라도 불러야 되는 건가.’

도대체 왜 안 들키고 있는 거지? 왜 발견이 안되는 거야.

젠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데서 유능한 건데. 시바. 레인저 훈련이라도 받았어?

당연히 받았을 것이다. 아마 받지 않은 훈련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성기사단과 검은백조의 레인저들의 움직임이 무색하게 놈은 너무나도 쉽게 자취를 감춘다.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괜한 자신감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전부 다 쓰러져 가는 폐가. 5평 남짓한 공간. 심지어 지하에 반쯤 처박혀 있기 때문에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다. 여기에 왜 이딴 폐가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썩어 문드러진 나무와 수풀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까.

아마 이전 모험가들이 임시로 지어놓은 캠프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아. 또 물 샌다.’

최근에 비가 와서 그런지 땅이 축축해진 것이 문제, 땅에 반쯤 파묻혀 있는 폐가의 특성상 흙탕물이 자꾸만 집 안으로 침입하고 있다.

허겁지겁 한쪽에 보이는 빗자루를 가지고 침입자들을 밀어내려고 하지만 당최 막아지지가 않는다.

꿉꿉한 냄새는 이미 적응된 지 오래,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지만 그나마 낮이 낫다. 밤이 되면 불을 켤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최대한 치워놔야 안락한 취침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제발 나가. 시바. 나가라구.’

아 짜증 나. 진짜. 나가라구.

한참 동안이나 놈과 씨름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걸레들을 뭉쳐 모서리 쪽을 누르는 것으로 마무리. 오늘은 중요한 일정을 마쳐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에 시간을 쏟을 수가 없다.

어차피 진흙 물 먹은 부분은 젠이 누워 잘 텐데. 그냥 열심히 했다는 시늉만 보여줘도 만족하지 않을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거지. 아직까지 해가 떠 있는 걸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화로에 불을 올린다.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

럼주도 있어.

조금 어설프기는 하지만 그동안 먹던 꿀꿀이죽보다는 괜찮지.

커다란 나뭇잎에 둘둘 말려진 부위를 꺼낸 이후에는 얻어온 양념에 절인다.

빵이랑 감자도 있으니. 나름 균형 잡힌 식단이 된 것 같은 느낌. 곧바로 통나무 식탁을 꺼내고 나무 식기에 녀석들을 대충 덜어놓는 중.

아마 곧 있으면 범죄자 새끼가 올 테니….

‘깜짝 놀랄 거야.’

매일 매일 꿀꿀이죽만 처먹다가 이런 거 보면 눈 돌아갈 만해.

아니나 다를까 인기척이 느껴진다. 곧바로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주변에 처리할 게 조금 남아있는 모양.

위장상태를 확인하고, 마법적인 출입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녀석의 가장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다.

이 양반… 오늘은 뭐 건진 게 있나 몰라. 또 햄비어나 쳐 잡아 온 건 아닐 테고….

“이기영 님.”

“네. 들어오세요. 젠 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네. 주변 경계가 조금 느슨해진 것 같더군요. 내일 오후 즈음에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당연하지만 놈의 시선이 머문 곳은 통나무 식탁이 있는 곳이다.

‘이게 식사라는 거야.’

깜짝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준비해 봤어요. 젠 님.”

“아….”

“매번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도움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쑥스러워하는 듯한 얼굴 한번 보여주고.

“럼주도 있으니 와서 드시겠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다 뿌듯하다.

“이건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네?”

“이것들은 전부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이기영 님.”

“아. 근처에 화전민들이 있어서….”

여기서 아래로 조금만 열심히 걸어가면 쬐깐한 시골 마을 있잖아. 거기 다녀왔거든.

“지난번에 젠 님께서 사냥하신 몬스터의 가죽을 들고 갔습니다.”

그거 가죽 해체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도 못 해. 손이 퉁퉁 붓고 피범벅에. 그래도 전부 해냈다니까.

“맞는 가격을 받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며칠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교환했어요.”

당연히 맞는 가격이지. 오히려 내가 이득을 보면 이득을 봤지 절대로 손해는 안 보지. 잘 거래하고 왔어. 당분간은 거지 같은 꿀꿀이 죽이랑 햄비어 대신에 제대로 된 식사 할 수 있다고. 럼주도 마실 수 있고.

“친절하신 분들이었어요.”

사실 조금 불친절하기는 했어. 근데 대화가 안 통하는 건 아니더라고.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세요.”

자리 잡고 오랜만에 파티 한번 벌여보자, 야. 매일매일 고통스럽게 살면 무슨 의미가 있어. 가끔은 이렇게 풀어주는 날도 있는 거지.

영업용 미소를 띤 이후에 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녀석이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는 이런 것… 부탁드린 적 없습니다.”

당연히 미소 정도는 지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기도 오산.

“네?”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고 계신 겁니까? 화전민 마을에 다녀오셨다니요.”

일그러진 얼굴이 무섭게 보인다.

‘너 시바 왜 그래.’

내가 어련히 조심했겠어?

“정체는 들키지 않도록 잘 조치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젠 님. 비가 와서 흔적도 아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너 뭐야.’

시바 방금 소리친 거야?

“세상은 이기영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모든 사람이 친절하지 않단 말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화전민들은 모두 사연이 있는 자들입니다. 무슨 짓을 당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한때는….”

나도 좀 센데… 근력도….

“그만 좀 하십시오! 이기영 님. 오늘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운이… 운이 좋았을 뿐이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오늘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럼 시발로마 꿀꿀이 죽 좀 쳐 줄이던가. 내가 오죽하면 이랬겠어?

“저라고… 저라고 이런 곳에서 이기영 님을 모시고 싶은 게 아닙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시면….”

언제까지 참으라고 이 새끼야. 언제까지. 네가 아무것도 못 하는데. 시바 나라도 뭐 해야 될 거 아니야.

고기랑 감자에 럼주 처먹게 해줄라니까 뭐라고? 지금 그게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한테 할 소리야? 아무리 짜증 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 무능력한 새끼.

“제, 제가 생각이….”

“지금은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이기영 님에 대해 레인저들에게 알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남긴 흔적을 바탕으로 추적에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유능한 레인저들에게는 비로 지워진 흔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다 알아봤어. 이 새끼야.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대륙은… 세상은 이기영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죄송합니다.”

기어이 내가 죄송하다고 말해야겠냐구.

처연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정신이 들어온 모양, 놈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받은 이기영은 자신의 심정만 이해하고 싶다.

“이기영 님….”

“…….”

“제가… 말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젠 님. 제가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던 것 같아요. 젠 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셨을 텐데… 제가 조금 주제넘었던 것 같네요. 저는 그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아닙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그, 그래도 일단 드세요.”

표정이 말이 아니기는 해. 이 새끼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기껏 세상을 보여준다고 이빨이나 치고 야심 차게 데려온 주제에 이런 폐가에서 2주 동안 처박히게 한 게 면목이 없기야 하겠지.

심지어 성질까지 내버렸으니 얼마나 자괴감이 들까.

죄책감과 미안함에 빠져 버린 명예추기경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발언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바. 이미 늦었어. 후회해도 시바 한참 늦었다고.

마주할 용기가 없는지 등을 돌린 모습.

“저는 잠깐 다시 한번 근처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이기영 님. 식사는 먼저… 드시고 계십시오.”

“그러지 말고 함께….”

“죄송합니다.”

어차피 이 범죄자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지만….

‘넌 진짜 뒈졌어.’

이빨이 아득바득 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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