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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29화 (92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29화

젠 (8)

모험은 개뿔. 시바.

“정말로… 이래도 괜찮을까요?”

“네….”

“정말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네. 괜찮을 겁니다.”

“저는 무섭습니다. 젠 님. 이런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지, 정말로 베니고어 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실지…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 제가 대륙을 저버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이미 이기영 님께서는 많은 것들을 희생하셨습니다.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륙이 있을 수 있었고,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 교국이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타인을 먼저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일을, 진짜 이기영 님을 찾는 일을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말은 청산유수야.

이 대책 없는 새끼… 계획도 조금 청산유수처럼 짜 놨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조금 더 드시겠습니까?”

“괜… 괜찮습니다.”

꿀꿀이 죽은 님이나 처먹으세요. 진짜.

여섯 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이 범죄자 새끼한테 납치된 이후에 딱 여섯 시간.

“지금 정확히 여기가 어디 즈음인가요?”

“라이오스의 마경의 숲입니다.”

“아! 라이오스로군요.”

“네.”

“라이오스에 몇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이곳에 들어온 건 처음이네요.”

라이오스의 숲속에 들어와 야영을 한 이후에 맞는 첫 번째 아침, 첫 식사는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죽.

어제 대충 만들어놓은 잠자리 때문인지 등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조금 고난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우가 좋지 않다.

당연히 이 어리바리한 놈이 제대로 된 계획을 준비했을 리 만무, 교황청을 빠져나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짐 같은 걸 챙길 여력이 없다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책 없이 나왔다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얼마나 있어?’

1,000골드 정도는 챙겨 왔겠지?

허름한 간이 텐트를 보고 있자니 라파엘의 안락했던 보금자리가 떠오른다.

걔는 그래도 삼시 세끼 고기 먹이기라도 했지. 처음 납치했을 때도 부식으로 거울연어가 나왔는데…. 그때는 자존심 때문에 안 먹었었는데. 이건 진짜로 먹을 수가 없다고.

혹시나 지금부터 삼시 세끼 이걸로 처먹는 건 아닐까. 잠자리도 맨날 이러면 어떻게 해? 침대 정도는 만들어줘야 되는 거 아니야?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젠 님께서 직접 해주신 음식인걸요. 그저… 생각이 조금 많아져서….”

“…….”

“근처 소도시까지는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기영 님.”

“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어쩌면 추격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날아서 이동하는 건… 여러모로 위험할 겁니다.”

“그… 그렇군요.”

‘왜 더 처먹으라고 하는 건지 알겠다.’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못 한 것은 당연지사. 내 구겨진 얼굴을 보고 조심스러워진 녀석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곧바로 환한 미소를 머금자 조용히 풀어지는 얼굴, 아직도 내가 빛의 성자와 이기영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일까.

“그렇군요. 정말로… 지금부터… 모험을 하는 거군요.”

“네.”

“더 많이 먹고 힘을 내야겠네요.”

꽉 쥔 주먹을 힘차게 흔드는 리액션. 한 번의 실수로 저 꿀꿀이 죽을 다시 한번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다.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간이 캠프를 정리하는 도중, 개인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일이 많았는지 제법 익숙한 몸짓이다.

앞으로 펼쳐질 여행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포근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하… 시바. 짜증 나.’

아직 씻지도 못했어. 라이오스 안 그래도 덥다고….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행군을 해? 그리고 이 꿀꿀이죽도 먹기 싫다고. 진짜.

물티슈로 얼굴 닦는 게 씻는 거야? 발 아파. 허리 아프고 무릎도 아파. 모험은 개뿔….

“소도시로 이동한 이후에는 보급을 마치고 곧바로 공화국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화국 말인가요? 어째서….”

“제법 유명한 소도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모험가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고 어쩌면 새로운 신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골드도 조금 챙겨 왔고요.”

“얼마 정도….”

“60골드입니다.”

‘하… 시발….’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새끼. 그걸로 되겠어?

“새로운 신분이라… 정말로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거군요.”

“네. 모험가 길드에 등록을 마치면 던전 탐험이나 대륙 곳곳에서 의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바다로 나가거나… 이기영 님이 원하시는 모든 도시와 신기한 곳들을 둘러볼 수 있을 겁니다. 조금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이런 것 역시 소중한 경험이니까요.”

“와….”

“상상만 해도 기대되시나 보군요.”

너무 기대돼서 널 죽이고 싶어. 언제 씻을 수 있어? 아니, 여기 근처에 있는 도시에서 보급할 수 있는 건 맞아? 거기까지 사람이 깔려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이제 슬슬 시작될 거야. 내 생각이 맞으면 어쩌면 소도시까지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안 그래도 라이오스라며. 그리고 이 모포 좀 어떻게 벗겨주면 안 돼?

“멋진 풍경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하늘을 바라보며 공감을 바라는 범죄자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는 것은 녀석 쪽이 아니다.

‘슬슬이지.’

몇몇 사제들이 문을 똑똑 두드리는 것이 망원경 속에 비친다. 당연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사제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돈다. 당연히 저럴 만도 해.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명예추기경은 언제나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사제들을 먼저 기다리게 만들 일도 없었고 언제나 항상 밖에 나와 단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잖아.

명예추기경님? 이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다.

문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눈 직후에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린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사제 하나가 어디론가 뛰어 들어간다. 이윽고 도착한 것은 제르니한 대주교.

-명예추기경님.

응?

-제르니한 대주교입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래. 빨리 들어와 봐.

-명예추기경님! 제르니한 대주교입니다.

녀석의 얼굴에 불안함이 감돈다.

-들어가겠습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성기사들이 문을 부순다.

-아… 아아아아….

당연하지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평범한 풍경이 아니다.

짐을 챙기느라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된 방안,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역력한 그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기사들은 숨을 멈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방안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허겁지겁 주변을 살핀다.

창밖으로 사람이 빠져나간 흔적, 격렬한 말싸움과 저항이 오고 갔던 흔적.

누가 봐도 추악한 범죄가 느껴지는 듯한 현장에 제르니한 대주교는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래. 내가 저걸 왜 찢어놓고 왔겠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구겨진 문서들을 짜 맞추고 있는 모습.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손으로 하나하나 글자들을 맞추고 있는 대주교의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는 하지만 절망으로 가득 찬 대주교의 얼굴을 보니 내가 떡밥을 잘 뿌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르니한 대주교님….

-뭔… 뭔가를….

-명예추기경님의 서랍 속에서 발견된 편지입니다. 제르니한 대주교님께 남긴 듯하여….

구구절절 이런저런 이야기가 쓰여 있는 편지.

템플러 젠이 수상하다는 것, 요한 추기경이 날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이 모든 일이 그들의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것. 베니고어 님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번 일들은 그들이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놨어야 했던 진실들. 베니고어 교단의 평화를 위해서 혼자만 감당해야 했던 가슴 아픈 진실들.

-요한… 요한 추기경… 요한 추기경!!! 이 개자식! 이 개 같은 자식!!!

-…….

-지금 당장 이단심문관들을 부르시오! 성기사단을… 성기사단을! 바젤 교황님께 지금 이 문서를 전달하고 지원병력을 요청하시오!

파르르 떨리는 수염.

-아아… 이 일을…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피드백은 빠르다. 정확한 증거가 눈앞에 있다. 주저할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다.

-요한 추기경!!

-뭣들 하는 겁니까! 지금 추기경께서는 기도를 드리는 중입니다! 용건이 있으시다면….

-닥쳐라! 이 짐승 같은 놈들아!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알고 있다!

-신성한 신전의 안입니다! 무기를 꺼내시다니요! 베니고어 님의 앞입니다! 제르니한 대주교!

-베니고어 님께서 네놈들을 벌할 것이다. 이 추악한 놈들! 여신의 분노가 네놈들에게 닿을 것이니!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이단심문관들은 저 추악한 놈들을 당장 끌어내라! 헬레나 이단심문관! 성기사단은 명예추기경님을 찾아라! 어서 빨리! 한시가 급해… 한시가 급하다!

-아아아아악!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검을 뽑다니요! 저희는!

-닥쳐라! 이 이단 놈들! 그분의 아들을 해하려고 하는 네놈들이 어찌 베니고어 교단의 신도들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요한 추기경을 잡아서 끌어내라! 저항하는 놈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마라.

-아아아아악! 베니고어시여! 베니고어시여!!!

-어찌 그 더러운 입으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인가! 이 지옥에 떨어질 구더기 같은 놈들아!

-살려… 살려….

-저 이단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라!

신전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병력이 한 건물 안으로 들이닥치고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제들이 피를 질질 흘리며 끌려나온다.

비명 소리는 끊이지 않고, 요한 추기경의 서재 안까지 들이닥친 병력들은 신성 마법으로 문을 두들긴다.

-템플러… 시몬! 시몬 님!

‘진작 손절했을 거야. 걔도 자기 살길 찾아야지. 아마 던전에 짱박혀 있거나 숨어 있지 않겠어?’

-이거 놔라! 지금… 지금 네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닥쳐라! 이 더러운 이단아! 명예추기경님은 어디에 있지?

-그… 그게 무슨 소리….

-네놈이 명에추기경님을 해한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제르니한 대주교! 정말로…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뭐?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제르니한 대주교! 이건 뭔가 이상… 이상하오….

-뭐라?

-나는 모르는 일이오! 이건 누군가의 음모요! 누군가가….

-저 이단 놈의 손목을 으깨버려라!

-아아아아아악! 시몬! 템플러! 시몬! 아아아아악! 나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 않소!

마치 음악이라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녀석이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대답을 요구하듯, 내 표정을 살피며 미소 짓는다.

“정말 멋진 풍경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대답할 수밖에 없다.

“네. 정말로 멋진 풍경이네요.”

-템플러들… 템플러들이 확실합니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풍경입니다. 앞으로 함께 헤쳐나갈 여정만큼이나 말입니다. 젠 님.”

-템플러 시몬은… 아니, 템플러 젠은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긴 여기에서 나랑 같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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