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23화
젠 (2)
“일단 도와주신 것에 대해 미리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만약 그때 젠 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섰을 겁니다.”
‘이 새끼 왜 이렇게 빼고 있어?’
감사하다는데 왜 그래.
“언제나 겸손하시군요… 젠 님은…. 혹시나 제 말이 젠 님을 불편하게 만든 것인지요.”
내가 자꾸 감사하다고 말하는 게 불편해?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 순수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만약 신경이 쓰이신다면….”
내가 잘못한 거 맞네. 명예추기경이 잘못한 거네. 시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명예추기경이 큰 실수를 했네.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아보자 단순한 호의로 나온 감사의 인사였지만 외부와 단절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템플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직접 나서서 빚을 만들어준다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녀석이 조금 놀란 표정을 보낸 것은 바로 그때.
“제가….”
심지어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은 가관이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그렇게 느끼실 거라고는….”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무슨 중세시대 기사도 아니고.
“일어나세요. 젠 님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불편한 분위기를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네요. 일단 자리에 앉는 게 어떻습니까?”
“…….”
“자리에 앉아주세요. 젠 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첫 만남 때보다 오히려 더 경직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물론 당연히 경직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부터 녀석은 이런 체질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이 방으로 부른 의도 자체가 불순했으니까.
본인에게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원치도 않는 임무를 해야 하니… 하지만 그것만이라고 하기에는 묘한 태도가 신경 쓰인다.
이를테면 방금 전 황급하게 무릎을 꿇었던 행동 같은 것들 말이다. 단순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너 이 새끼 희생과 부활의 신한테 완죠니 감겨버렸구나.’
녀석이 의식하고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지난번의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효과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이전의 기도회에서 보여줬던 모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녀석이 상상하던 명예추기경으로서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걸 희생한 성자라거나, 훌륭한 성인이라거나.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이미지들이 있지 않았을까.
최근 어떤 일을 계기로 그런 생각들이 변하거나 더 신성시하게 됐을지도 모르지.
녀석의 태도는 평범한 사람을 대한다고 느껴지기보다는 윗사람을, 혹은 모셔야 하는 사람을 마주한 것 같다.
“커피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제, 제가 하겠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아니요. 앉아계셔도 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젠 님께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거든요.”
맛없을 거야.
“그건… 죄송합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성기사분들이나 기사분들은 대개 이런 일들을 조금 어색해하시니까요. 오히려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듭니다. 그럼…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시바 커피가 없네.
수납장 같은 곳에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시바, 무슨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해?’
대신이라고 뭣 하지만 포도주가 놓여 있기는 하다.
“커피가… 없군요.”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젠 님. 다른 사제님들이 불편해하실 테니… 포도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명예추기경이 직접 내리는 포도주자너.
“사실 술을 마시며 베니고어 님의 대해 논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만….”
“…….”
“가끔은 저도 이런 일들을 즐기기도 한답니다. 혹시 명예추기경이 와인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너무 샌님은 아니라 이거지. 방금 대사 진짜로 괜찮았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취하는 걸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는 것은 즐거운 일이더군요. 네. 오늘 같은 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한데… 이곳이 평소에 젠 님께서 지내는 곳인가요?”
“제가 지내는 공간은 아닙니다만….”
“그렇군요. 평소에는 그럼….”
“아마 재미없으실 겁니다. 제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탁자에 읽을 수 있는 책들, 무기들이 전부니까요. 방 안에서 보내는 곳도 무척 짧고… 사실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에서 보냅니다. 임무를 수행하거나 훈련을 하거나,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명예추기경님께는 조금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럴 리가요. 교황청의 비밀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템플러 젠 님의 이야기가 재미없을 리가 없지요. 오히려 조금 더 자세하게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실 크게 관심은 없다. 이 새끼들이 하는 일이야 뻔하지. 뭐.
그래도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신전 내에 있는 비밀무력집단, 세상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명예추기경이 환장할 만한 소재잖아.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것은 물론 잔뜩 흥분했다는 인상을 남기도록 하자. 그래야 말하는 사람도 재미있을 테니까.
원래대로라면 보안이 걸려 있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정보는 용인해 줄 가능성도 크겠지?
그야 명예추기경의 환심을 사는 게 놈의 임무인데… 분위기 좋게좋게 갈려면 어느 정도는 털어내야 할 거 아니야. 보안에 걸리지 않은 정보들 말이야.
“물론 불편하시다면….”
“아닙니다. 그저… 어떤 것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그럼 젠 님께서 어떻게 템플러가 된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저는 성기사단에서 훈련된 것이 아닙니다.”
“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본래는 교단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지냈었지만 어느 날부터….”
“그렇군요. 분명히 고된 훈련이었겠지요?”
“육체가 힘들다고 느낀 적은 있습니다만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베니고어 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항상 머릿속이 성령으로 충만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평범하게 지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지만 저는 제가 선택받았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모든 일에 감사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니까요.”
“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베니고어 님의 은총 때문은 아닐 겁니다. 젠 님의 생각이, 젠 님께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분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낸 그 노력이, 지금의 젠 님을 있게 한 거겠지요.”
“아….”
“언제나 젠 님을 지켜본 베니고어 님께서도 분명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셨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훌륭한 템플러가 되어 베니고어 님을 찬양하고 드높이며 그분을 더 빛내주시는 역할을 부여받으신 걸 겁니다.”
‘이 새끼 그냥 처박혀서 살았구나.’
“그렇군요….”
“물론 저는 베니고어 님의 대변인이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이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명예추기경님.”
네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 보냈던 시간들이 무가치하지 않았다고 말해줬으니까.
이미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베니고어의 아들을 통해 직접 듣는 건 또 색다른 기분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이 보인다.
포도주도 홀짝이다 보니 한두 잔씩 계속 들어가고 있었고 분위기도 생각보다 좋은 것 같은 느낌, 아마 내가 용건에 대해 묻지 않은 게 유효한 것 같았다.
어서 빨리 원하는 걸 말하라고 압박하기보다는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리액션도 과하게 해주며, 눈도 초롱초롱 빛내주니 이런 분위기가 나오는 거겠지.
녀석 역시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게 느껴진다.
“그렇군요. 그런 훈련도 받으셨습니까?”
“네.”
쉽자너.
“뭔가 예상은 했었지만 조금 신기하군요. 저는 대륙에 넘어와서 베니고어 님을 만난 터라… 태어났을 때부터 베니고어 님과 함께한 기분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너무 정보를 빼고 싶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으니 강약 조절도 중요하고.
“대단하네요. 하하.”
과장하듯이 손뼉을 치면서 웃는 모습도 보여준다. 사실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명예추기경은 언제나 단정하고 조용하고 만인의 선망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어울리지 않게 손뼉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이상함을 넘어 이질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그 명예추기경이 포도주 한 잔에 취한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실망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눈 앞에 있는 녀석은 아니다.
오히려 이게 명예추기경의 탈을 벗은 이기영의 본 모습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언제나 과중한 책무와 짐에 억눌려 있지만 실상은 세상을 즐기고 싶어 하는, 누구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설정이 먹힌다.
이 새끼들이 여기 포도주를 가져다 놓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내게도 기회가 된 것 같았다.
정말로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나오는 편안한 미소.
조금 알딸딸해졌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손 부채질을 한다든가 머리를 잠깐 턱에 괸다든가 하는 액션을 추가한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녀석은 나를 걱정하고 있고 말이야. 이 새끼가 나를 납치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한 게 무색해질 정도의 표정, 본래부터 말도 되지 않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떠올린 내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지네가 더 손해지 뭐.’
명예추기경이 교황청에서 갑자기 사라져봐. 그럼 진짜 난리가 날 텐데.
바젤 교황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신도들이 발광을 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요한 추기경과 템플러들이 이번 일의 흉수라고 지혜 누나가 작업까지 쳐주고 있으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 만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기사단과 이단심문관들이 요한 추기경에게 들이닥칠 테고 놈은 온갖 고문을 당하다 목이 뎅겅 달아나지 않을까.
‘어?’
남아있는 템플러들도 국가 차원에서 척살당할 가능성이 높다.
‘어어?’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가 곧바로 공개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머리 아파지는 여러 가지 과정을 스킵할 수 있기까지 하다.
‘어어어?’
슬그머니 템플러 젠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놈은 여전히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임무는 까맣게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새끼 이거 작업 치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한 달? 일주일? 그 정도면 지혜 누나가 전부 처리해 주려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이만 돌아가시는 게….”
앞으로 이런 만남이 계속해서 생길 여지가 있겠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이 접선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을 테니까.
‘한번 작업 쳐봐?’
조금 뜬금없어도 포도주에 많이 취했다는 설정이니까. 빛의 성자는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콜에 약하자너. 약간은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어보자.
“젠 님.”
“네.”
“젠… 젠 님께서는….”
“네.”
“세상을… 대륙을 많이 둘러보셨나요.”
책임과 짐덩이 속에 갇힌 성자.
그 성자를 납치할, 아니, 자유롭게 만들어줄 기사가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