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22화
젠 (1)
깨닫기까지 조금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녀가 세라핌에게 더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 이러니저러니 해도 녀석을 아끼고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다.
유능하거나 유능하지 않거나, 성과가 있거나 없거나는 애정을 주는 데 그다지 상관없다는 걸 받아들이자 저도 모르게 녀석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닐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의식 한편에서는 놈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좋은 신호기는 해.’
좀 짜증나기도 하고 속이 쓰리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게 원래 맞지. 세라핌이 정하얀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면 굳이 내 쪽에서 그놈을 쳐낼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아니, 이유는 많은데 내가 뿌린 씨앗이니 어쩔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정하얀을 저렇게 만든건 그녀의 가족들이었지만 나도 아주 조금은 기여했으니까.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히힛….”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
“정말로 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용….”
물론 곧바로 세라에게 달려간다든가 하진 않는다. 대신 정하얀이 선택한 것은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
정신없이 울고 불며 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인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본인이 지금 엉망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최대한 예쁘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만 같다.
“헤… 헤헤….”
귀엽기는 해.
“저… 예뻐요?”
“으응….”
“좋아요?”
“아… 응.”
“어떤 점이… 좋아요?”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는 태도가 좋아. 다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아끼는 모습도 좋아. 공부할 때 집중하는 모습도,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좋아. 무엇보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점이 좋아.”
립서비스 하나는 일품이자너. 반 정도는 진심이니 말하기도 쉽다. 이렇게 한번 띄워줘야지 하얀이도 기분이 좋아지겠지. 아니나 다를까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었는걸.”
“네… 네에?”
거짓말은 아니기는 해. 처음 봤을 때부터 얘는 꼭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 로맨틱한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붙여 오는 게 자연스럽다.
내가 봐도 좀 촉촉해진 것 같은 분위기가 낯설다.
정하얀은 고개를 45도로 내린다. 왼쪽 얼굴에 더 자신이 있었던 걸까. 대놓고 왼쪽 얼굴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덕분에 목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짧게 입을 맞추자 헤실 헤실 웃고 있는 얼굴.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명예추기경님.”
“하얀아.”
“쉿. 지, 지,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오빠.”
‘아니, 시바, 밖에 사람 왔다고.’
“본, 본능에 몸을 맡… 겨요.”
‘무슨 시바 본능에 몸을 맡겨. 그런 말은 어디에서 주워들었어. 김예리야? 매혹의 춤 강좌라도 들었어?’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얼굴을 구기는 모습.
“명예추기경님. 늦게 죄송합니다만….”
“일어나자. 하얀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 같네. 그리고…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니까. 제출해야 할 서류들은 제출해야지. 징계는 가볍게 내릴 것 같아… 그리고 사라진 마력에 대해서는 함께 알아보자.”
‘아마 오늘 안에 회복하겠지만.’
“네, 네… 어, 어, 어쩔수 없죠. 그, 그럼 이… 이따가 봐요.”
여기 오게?
“응. 일만 끝내고 보자. 바로 연락할게.”
“네… 네!”
정하얀이 문을 열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관 한 명이 시야에 비친다.
오랜만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놓친 정하얀은 잠깐 신관을 째려본 이후에 바깥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신관은 고개를 숙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이쪽에 찾아온 건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아마 녀석은 바젤 교황 쪽의 인사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바젤 교황 쪽의 사제가 이런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올 확률은 없거니와… 녀석은 내게 익숙한 얼굴도 아니었으니까.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네.’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막 이쪽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리도 없고, 제 발 저려서 먼저 접선을 원한다고 봐도 되는 거겠지. 이대로라면 자신들의 계획이 엉망이 될 테니까.
현재 권력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금방 깨달았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명예추기경을 잡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으니….
‘행동이 참 빨라.’
그만큼 본인들이 궁지에 몰려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눈치도 빠르고.’
아직 일이 시작되기도 직전이자너. 이지혜가 퍼뜨리고 있는 소문이 벌써부터 흐르고 있을 리도 없고, 바젤 교황 쪽에서도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다는 건 감각이 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거겠지.
템플러 젠은 아닌 것 같고, 요한 추기경이나 템플러 시몬? 둘의 합작품일 수도 있고… 뭐 누가 되든 사실 상관은 없다.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떤 용무로 찾아왔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템플러 젠께서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건 의외네.
“네?”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템플러 젠 님이….”
“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 해서….”
“그렇다면 허락하신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군요.”
옷은 그냥 일반 사제복 같은 거나 한 벌 주워 입어야지. 화려하지 않은 거. 딱히 장신구 같은 걸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비밀리에 접선하는 거니까.
대동할 길드원으로는 김창렬과 박리안이 괜찮을 듯 싶다. 얘네가 입도 무겁고, 은근히 할 때는 하는 애들이지.
조혜진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보낸 이후에는 거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 모습을 바라기 시작, 딱히 모나 보이는 건 없는 정도로 만족스럽다.
조금 피곤해 보이고 아파 보이는데. 오히려 이런 부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럼 가시죠.”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교황청의 저녁은 어둡다. 간혹 기도나 업무를 하기 위해 깨어 있는 사제나 수도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용하고 어두운 편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은 나를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인사를 건네고는 있지만 따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마 요한 추기경 쪽의 사람일 것이다.
이쪽 성기사들도 근무를 돌아가면서 설 테고… 마침 요한 추기경 쪽의 사람들로 교대된 타이밍에 나를 부른 거겠지.
그렇지 않은 이들은 매수했을 수도 있고… 바젤 교황 쪽에 간자가 있을 확률도 높다.
‘생각보다 더 체계적이야.’
기존에 상정하고 있는 것보다 이 파벌싸움이 규모가 크기도 한 것 같고… 본래 성기사들이 돌아다녀야 할 장소에도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를 안내하는 사제 하나와 나만 넓은 복도를 걷고 있자니 조금은 무서운 생각도 든다.
‘이 새끼들 시바. 이거 담그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너무 바보같이 온 건가.’
김창렬이랑 박리안이 템플러 둘을 상대할 수 있나?
조혜진에게 미리 말해놨기 때문에 별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고….
만약에 정말로 저쪽이 이쪽을 해코지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는 게 맞지.
지네들 무덤 지네들이 파는 건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자너.
걷는 게 지루하니 괜스레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오, 오빠가… 나, 나를 좋아한다고 했어. 예쁘고… 사, 사랑스럽대.
-정말요? 제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정하얀 님.
-오, 오빠는 내가 마력이 없어도 상관없나 봐. 그, 그냥 내가 좋, 좋은 건가 봐. 마법을 안 써도 내가 좋은가 봐.
-저도 그런 걸요. 아마 다들 그럴 거예요. 네.
-내, 내가 좀 예쁜가 봐. 소라 눈에도 내가 예뻐 보여?
-네. 당연히 예쁘시죠. 얼마나 사랑스러우신데요.
-헤… 히히힛.
-하… 하하….
-아! 세, 세라는?
-글쎄요. 아마 지금 자고 있을 텐데…
-아, 그, 그럼 됐어. 내… 내일 같이 세라 보러 갈까?
-네? 정말요?
-으… 으응.
-세라도 정말 좋아할 거예요. 정하얀 님.
-같, 같이 신전 구경하면 되겠다. 그렇지?
-부길드마스터도 함께 가시는 건 어때요?
-오, 오빠가 시간 되면….
글쎄 오빠는… 시간이 안 될 것 같기는 한데…
“명예추기경님?”
“…….”
“명예추기경님.”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군요.”
“도착했습니다.”
“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네.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가 조용히 멈춰 선 곳은 자그마한 문이 있는 공간이었다. 실내가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꽤나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나를 부른 녀석 역시 시야에 비친다. 이전에 봤던 그대로의 모습. 기본적으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많은 의미를 담은 눈빛들이 신경쓰인다.
“무례한 초대를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필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안 그래도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물론 정치적인 이유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템플러라는 녀석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표현이지.
아직까지 빛의 성자는 템플러들이 모습을 숨겨야 하는 이들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다시 한번 뵙고 싶기도 했고요.”
내 말에 아주 약간의 죄책감도 드러난다.
‘이 새끼 이거 떠밀린 거구만.’
성향을 보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떠밀린 것 같은 느낌, 템플러 시몬이나 요한 추기경에게 명예추기경과 대화를 해보라는 미션을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큰 것처럼 느껴진다.
녀석의 얼굴에는 불편함이 감돈다. 정확히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안쓰럽게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그런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야 명예추기경이자너.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똑똑하지만 세상의 악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성자잖아. 모든 인간을 억지로 믿기 위해 살아가는 성자.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수도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황청의 파벌,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버린 가련한 명예추기경.
‘시바 설정 죽이기는 해.’
그런 명예추기경의 환심을 사라는 임무를 받았을 확률이 높았으니, 미안함을 담은 놈의 표정이야 당연히 이해한다.
어째서 나를 피해 다녔던 녀석이 나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템플러 젠은 지금 추악하고 더러운 정치판으로 순진한 성자를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명예추기경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정체불명의 호감을 무기로 말이야.’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백색의 도화지를 어떻게 물들이려고.
‘이 비열한 새끼.’
이 역겨운 새끼.
‘이 추악한 새끼.’
“템플러 젠과 나누었던 대화가, 그때 함께 보았던 풍경이 자꾸만 기억에 남더군요. 기회가 빠르게 온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일단은 환한 미소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역할이었으니까.
“밤새도록 신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