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19화
세라 (19)
-바젤 교황 그 할아버지 성깔 아직 안 죽었네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바로 머쓱해졌지.
사색이 된 요한 추기경의 얼굴이 기억 속에 맴돈다.
사실 녀석과 템플러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직면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템플러들을 이끌고 작업을 치려고 했던 타이밍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이 새끼들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째서 몬스터들이 나를 노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겠지만 오늘 일어난 사건이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 때문에 일어났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진상이야 내 작품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놈들이 내가 베니고어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마 본인들끼리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는 것이 한계일 것이다.
베니고어의 피를 마신 몬스터들이 명예추기경에게 이끌렸다든지, 던전이 오래 지속되면서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겨났다든지, 공략되지 못한 던전이 변질된 이후에 던전 안에 있는 몬스터들이 뛰쳐나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다.
교황청 내의 파벌싸움에 집중하기 전에 본인들의 예상을 빗나간 기현상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겠지.
-누나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진짜루.
-그러지 못해서 아쉽네요. 진짜 재미있었을 텐데. 아무튼… 원하는 건 거의 다 얻었네요?
-그렇지 뭐.
-교황청 안으로 파란 길드원들을 들이는 것도, 교황청 내에 일어나고 있는 파벌싸움을 수면 위로 드러낸 것도… 바젤 할아버지한테 힘을 실어주는 것도 전부 다.
-…….
-그럼 슬슬 작업 시작하는 거예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이쪽에 줄을 대줄 사람들을 선별해 봐야지. 요한 추기경 쪽에서도 꽤 경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는데. 지가 그럴 여유가 있겠어. 허겁지겁 남아 있는 증거물을 치우는데 정신없을걸. 아! 일단 여론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 이번 일이 워낙 큰 사건이어야지.
-그야… 기도회 중에 빛의 성자가 습격당한 전대미문의 사건인데… 벌써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기는 해요. 근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오빠? 나까지 여기 투입되면 위에 일은 군사님 혼자 맡게 될 텐데… 물론 혼자 알아서 잘하는 양반이기는 한데… 최근 김현성이랑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니 상태가 조금 안 좋아요. 맨날 맨날 오빠 욕만 한다니까.
-어차피 중요한 일도 없잖아. 잡일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지 않을까. 그렇게까지 무능하지는 않잖아. 지금은 이쪽이 더 중요해. 내가 여기 잡혀 있으니까. 누나가 발로 뛰어줬으면 좋겠는데….
-저야 오랜만에 파티에 가는 거니까 상관없기는 해요. 사람들이랑 수다 떠는 것도 원래 좋아하던 일이니까. 오히려 휴가처럼 느껴진다니까요.
-적성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사실 오빠가 가고 싶은 거 아닌가 몰라. 오빠 뒷담화 하는 거 진짜 좋아하잖아. 왜. 교국 혁명 때 진심으로 기뻐 보이던데.
-그런 성격은 아닌데.
-아니긴… 아! 일단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요.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망원경으로 그녀를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누나도 참 성격 이상해.’
그야 뒷담화 하는 게 진짜 재미있기는 하지.
-연수야. 이만 출발하자.
-네. 언니.
-스케줄은 전부 다 잡아놨지?
-네. 근데 잡혀 있는 파티는 전부 취소됐어요. 대신 다과회나 소모임이라는 형태로….
-뭐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어? 사회 분위기상 파티는 취소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누구보다도 수다 떨 사람들이 필요할 거야. 일주일 안에 돌아볼 수 있는 파티, 아니, 모임이 몇 개인지만 전부 확인해 줘.
-기부자들 위주로 알아보면 되는 거죠?
-응. 물론이지. 압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안 그래? 솔직히 이런 쪽은 내 본업은 아니기는 한데…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아니. 누나도 충분히 잘할 것 같은데. 그리고 내 본업도 아니야.
-그런데 언니… 언니도 지금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굳이….
-왜. 잡일 같이 느껴지는 일에 내가 괜한 힘을 쏟고 있는 것 같아?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닌데. 굳이 바쁜 언니한테 이런 일을 맡긴 게… 조금….
-오빠는 타이틀이 필요했던 거야. 검은백조에서 입수한 정보라는 타이틀.
맞아.
-원래 물타기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니.
-…….
-이번 같은 경우에는 얻을 수 있는 게 큰 만큼 리스크도 크니까 더욱더 그래. 적당히 줄타기해 주면서 교황청에 거대한 기부금을 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주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요?
-교황청에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거든, 거기라고 전부 깨끗한 건 아니잖아. 이단심문관, 사제, 성기사단의 유지비, 교황청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자선 사업들이나 봉사 같은 것들 역시 골드가 꽤 많이 들어가니까. 주교 이상급 되는 사제들의 품위 유지비가 연간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자기 배가 부르니까 신앙 활동도 하고 있는 거야.
-…….
-파벌들한테 간접적으로 알리는 거지. 당신들은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싶으면 어느 쪽으로 줄을 서야 하는지 확실히 하라고. 걔네들이 모시는 건 베니고어뿐만이 아니라니까. 몇몇은 짭짤한 골드도 함께 모시고 있다니까. 그러니 얼마나 재미있어?
확실히 지혜 누나가 인간 군상들을 보는 걸 재미있어하기는 해.
정확히 말하면 화제를 던져놓고 분란을 조장하는 것을 즐긴다고 표현하는 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도대체 뭣 때문에 성격이 저렇게 꼬인 건지 모르겠지만 대상이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줄수록 즐기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누나가 재미있으라고 일을 던져준 것은 아니다.
‘그만큼 중요하니까.’
같이 다니는 하연수야 왜 검은백조의 이지혜가 쓸데없는 일에 순회공연을 다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누나 말대로야.’
이지혜가 아니었다면 아무한테도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그간 안녕히 지내셨습니까. 이지혜 님.
-최근에 한 번 연락드렸었잖아요. 후후.
-그렇군요.
-제가 가져다드린 선물은 사모님이 좋아하시던가요?
-하하. 안 그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오셨군요. 여기 앉으시지요. 델라루스 의원님.
-이거 정말로 오랜만이네요. 휘트니스 상단주.
-저는 보이지 않는가 보네요. 델라루스 의원님은.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호호. 더욱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이지혜 님.
-아부하셔도 뭐 떨어지는 건 없을 거예요.
-이거 실패했네요.
분위기 좋자너. 확실히 프로기는 해.
화술 역시 기술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 역시 능력이다.
당연히 이지혜는 이런 기술에 능하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에 프로처럼 느껴질 정도.
이야기를 주도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도….
-오늘 바루스 님은 못 나오시는 모양이네요.
-아마 힘드실 거예요. 기도회에 가신다고 며칠 전부터 그렇게 기대하셨는데… 마음을 추스르시길 기도해야죠.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후에는 쉽겠지. 대충 표정 살피면서, 조금씩 조금씩 저들이 원하는 가십거리와 떡밥을 뿌려주면 그만.
-사실 검은백조에서 얻은 정보가 있기는 해요. 아니, 이번 일과 상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황청이 현재 파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지 뭐예요.
-네?
-그 파벌 문제 때문에 명예추기경님의 안전에 구멍이 생긴 것 같다는 말도 있고….
이런 식으로만 말해줘도 충분히 성공이라 할 만하다.
상상력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하고, 현재 파벌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만 알려도 이득이자너.
더 나아가 명예 추기경 암살 미수사건으로 끌고 갈 수 있겠지만 그것까지는….
-네? 그럼… 정말로 요한 추기경이….
-아니요. 확실한 정보는 아니니까 믿지 마세요. 휘트니스 상단주.
정확히 세 시간 이후 쟤네들 저러고 있는 거 보니 기가 찬다.
-아직 검증이 필요하기도 하고… 솔직히 신성력을 사용하는 그 몬스터에 대해서는 아직 들어온 정보가 없거든요.
-정말로 명예추기경님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 말입니까?
-쉿! 목소리가 커요.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확대해석하기도 아직 이르고요. 아직 흉수가 누구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 다만 교황청 내에 명예추기경님과 바젤 교황님을 반기지 않는 세력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또 그 파벌 문제로 인해서 명예추기경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건 확실한 것 같지만….
-허… 요한 추기경…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러니까. 아직 요한 추기경이라고 정해진 게 아니라니까요. 휘트니스 상단주.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는 기분입니다. 이지혜 님. 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참… 모두가 명예추기경님 같았어도….
-그런데 이지혜 님. 그럼… 지금 명예추기경님이 교황청에 있어도 안전하신 게 맞나요?
-다행히 파란 길드원들을 교황청 내에 체류하는 걸 허락해 줬다고 들었어요. 바젤 교황님께서도 명예추기경님이 걱정되신 거겠죠.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명예추기경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네. 의원님.
-교황청에서 시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는데… 그게 이번 일에 연관이 있을까요?
거기까지 갔어?
-제가 알고 있는게 없어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혹시나 요한 추기경이 명예추기경님의 몸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그건 무슨 소리야.
-이번에 일어난 일도 조금… 상황이 맞아 떨어지지 않나요? 이지혜 님?
-설마 그럴 리가요.
‘갑자기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해.’
물론 저게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건 저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미있으니까 음모론을 확대시키고 있는 거겠지.
몇몇 가지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검은백조의 이지혜라는 타이틀은 별것 아닌 개소리도 그럴듯하게 만든다.
최소한 파벌 문제 때문에 명예추기경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만 알려지면 50점, 요한 추기경이 그 파벌의 중심에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100점짜리 답안지가 완성된다는 거다.
‘아예 쓰레기로 만들어버려도 상관없고 뭐.’
소문의 확대 재생산은 사흘이면 충분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고….
베니고어넷의 존재는 녀석에게는 악몽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사실 녀석이 실세인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는 똑같을 거야.”
씨앗을 뿌려놨으니 이제는 거둘 차례. 물론 묵혀놨던 문제 역시 해결해야 했다.
“혜진 씨? 혜진 씨!”
“…….”
“혜진아! 야!”
“무슨 일이십니까. 부길드마스터.”
“혹시 하얀이 징계 먹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