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16화
세라 (16)
“이게 얼마 만인가요?”
“아! 마를린 양! 도착하셨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매번 똑같아요.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캐슬락에서 보내는걸요. 제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들이 더 바빠서… 사실 따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답니다.”
“아… 아버님은 잘 지내시나요?”
“네. 항상 정정하세요. 은퇴하신 이후에 조금 힘들어하시기는 하지만 최근에 새로운 취미를 찾으셨는지… 바이올렛 양은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
“…….”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기 싫어진다.
“제가 뭐 하는 일이 있겠어요. 의원직도 떨어지고… 아버님과 어머님 눈치 보면서 저택에서 지내고 있어요. 아버님께서 대륙 보호 위원회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만… 면접도 망쳐 버려서… 이런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지만 제가 아직 여러모로 준비가 안 됐나 봐요.”
“아…. 죄송해요.”
“아니요. 마를린 양이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다 제가 부족한 탓인데… 저에 비하면 마를린 양은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과 모일 때면 항상 마를린 의원의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충분히 대단하세요. 교국의 의원으로서 교국 발전에 기여하시고… 또 여러 가지 책무들도 다루시니까요. 캐슬락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들었는걸요. 공화국의 경계선에 맞닿아 있어서… 힘드실 텐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존경스럽다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마를린 의원은 캐슬락 백작 영애 시절에는 그렇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제국이 교국으로 변화한 이후, 전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화젯거리였으니까.
매번 모이던 사교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모임에서는 언제나 마를린 의원의 이야기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이전의 그녀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주류에서 물러난 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캐슬락 백작령이 자리한 캐슬락은 수도에서 먼 위치에 자리해 있기도 했고, 활기차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던 마를린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 영애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당시 제국에서 캐슬락 백작의 영향력이 아니었다면 사실 마를린은 모임에서 초대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몇몇 모임에서는 배제되기도 했었으니까.’
대놓고 마를린 영애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어울렸던 영애들과 함께 다녔었고….
‘그야 어쩔 수 없었는걸.’
혼자서 이상한 사진을 보고 히죽거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다거나…. 다른 영애들과는 너무나도 달랐잖아.
솔직히 어머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마를린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마를린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거겠지만… 당시에는 불편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마를린 의원 덕분에 이런 곳도 와 보네요.”
“운이 좋았어요. 카트린 의원님께서 제게 갚아야 할 게 있으셔서 정말로 운 좋게 자리를 구할 수 있었거든요. 누구랑 오는 게 좋을까 고민했는데… 마침 바이올렛 양이 기도회에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지 뭐예요.”
“기… 기억해 주시고 계셨군요.”
“그야 물론이죠. 바이올렛 양은… 제 친구잖아요.”
“마를린 양… 그… 래도… 정말로 저 같은 사람이 이런 자리에 앉아 있어도 될까요?”
살짝 옆을 바라본다.
‘정하얀 님이야.’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한소라 님이 분명하리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국의 지도자인 오스칼 님이 자리에 착석해 계신다.
“오스칼 님.”
“마를린 의원.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군요. 옆에는 처음 뵙는 분인데….”
“바… 바이올렛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 친구예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손잡았어. 오스칼 님이랑 악수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말 그대로 이 자리에는 교국의 지도층들이 자리해 있다. 정하얀 님을 비롯한 몇몇의 파란 길드원들, 심지어 신입 길드원들은 보이지 않는다. 두세 번째 줄에 앉아 있지 않을까.
중요한 요직에 있거나, 사회적으로 힘 있는 이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나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영웅들도 눈에 띈다.
누가 보기에도 자신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기도회가 시작되기 이전에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소리들이 무겁게 들려온다.
대륙의 정세에 대해 논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골드 단위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들은 것만 같다.
만약 이곳이 사교회장이었다면 자신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겠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조용해.’
확실히 사교회장과는 다르다. 조용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 느낌, 정숙하고 잘 정리정돈 된 것만 같다.
예전 귀족들의 모임에서도 비슷한 자리는 있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숙하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이 기도회를 존중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긴장한 필요 없어요. 바이올렛 양.”
“아… 네.”
“따로 예법이나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들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다들 스스로 주의하고 있는 걸 거예요. 누구보다도 이 기도회를 기다리던 사람들일 테니….”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바이올렛 양은 명예추기경님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신가요?”
“네….”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베니고어 넷에 올라온 사진들이나 동영상들, 녹화된 기도회의 영상이나 인터뷰, 가끔 매체 나오시는 것들 정도는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분명히 처음이었다.
자신과는 접전이 없기도 했고… 솔직히 그간 일로 기도회에 나올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오늘 일은 자신으로서도 무척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를린 의원은 명예추기경님과… 사적으로 만나신 적이 있으시죠?”
“네. 사실 최근에는 전혀 만나 뵙지 못하고 있지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는 한답니다. 그마저도 한 달에 한 번 정도이기는 하지만… 가끔 답장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아… 명, 명예추기경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마 바이올렛 양이 상상하시는 그대로일 거예요.”
‘내가 상상하는 그대로의 모습.’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잠시 후에 보게 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장내를 꽉 채우는 중, 커다란 소리는 시끄럽다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천장에서는 빛이 쏟아져 내리고 성가대가 입을 모으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각자 안부를 묻고 있었던 이들 역시 어느새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 목에 걸린 로자리오를 꽉 쥔 이들과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들, 마를린 의원의 말처럼 자신들 나름대로 예의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계속해서 쿵쾅거린다.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제님들이 내리는 성스러운 빛이 계속해서 떨어져 내리고 아름다운 빛무리들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아!”
“…….”
“하읍!”
저도 모르게 내지른 탄성, 그 뒤에 숨을 꽉 참을 수밖에 없는 외견. 어째서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지 이해가 된다.
누구라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마 신도들이 실수하는 걸 배려하기 위해서이리라.
이 기도회에 여러 번 온 이들도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신다. 마를린 의원도, 오스칼 님도, 정하얀 님도 넋이 나간 얼굴로 저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 아아….”
“신이시여….”
“빛의 아들이시여….”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빛의 아들, 희생과 부활의 신, 베니고어 님의 상징, 대륙의 자랑.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어떤 치장을 한 것보다 더욱더 성스러워 보인다.
천국을 형상화해 짜놓은 것 같은 옷.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목걸이.
조금은 나풀거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얇은 천 때문인지 움직일 때마다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만 같다.
‘무슨… 무슨 망측한 생각을….’
의식을 위해 맨손과 맨발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모습. 분명히 음악 소리로 공간이 꽉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천과 천이 부딪치는 스르륵거리는 소리 역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들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억지로 저 소리를 인식하는 것만 같다.
“신이시여….”
그 뒤로는 빛무리가 떨어져 내린다. 명예추기경님의 뒤에 나타난 빛의 날개.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그 날개에서 빛이 퍼져 나간다.
천천히 흩날리기 시작한 빛은 천천히 바람을 따라서 떠다니다 사라진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고 싶어졌지만 눈물로 얼룩진 성자의 얼굴을 보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
“빛의 아들이시여….”
마치 죄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이러할까. 눈앞에 계시는 빛의 성자가 나의 죄를 짊어지고 계신 것일까. 모든 대륙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계신 걸까.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마치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이들도 멍한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대륙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시금 현세로 내려오신 성자.
그 누구보다도 대륙을 아끼시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성자.
그분의 깊은 뜻을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저 눈물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종국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의식은 진행된다.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고, 성수를 뿌리고 손을 모은다. 교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양식, 정해진 그대로이지만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맨발로, 맨손으로, 베니고어 님에게 직접 기도를 드리는 행위가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진다.
“아아아….”
마치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기 때문이리라.
회색빛의 용사가 조용히 다가와 명예추기경님의 위에 투명한 천을 덧씌운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 성직자들이 약속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의식을 치른다.
성가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다시 한번 하늘에서는 빛무리가 떨어져 내린다.
명예추기경님의 손을 올리자 소매가 밑으로 떨어져 내린다.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지만 의식은 그대로 진행된다.
발걸음을 옮겨 베니고어 님의 석상 아래에 무릎을 꿇고, 명예추기경님이 가지고 계신 신성력을 올리고 계신다.
“제 모든 것을 베니고어 님께 바치겠습니다.”
거대한 빛이 퍼져 나가며 하늘로 솟아나는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내가 지금 천국에 와 있나 봐.’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해볼 정도였다.
“소, 소라야. 다, 다 찍었지? 그… 그렇지?”
“네. 물론이죠.”
“계, 계속 찍고 있어야 돼.”
“마를린 의원.”
“…….”
“마를린 의원. 괜찮으신가요?”
“네.”
마치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린 것만 같은 그 광경. 빛의 성자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틀어박힌다.
“베니고어 님의 말씀입니다.”
성스러운 민주주의의 구절을 조용히 낭송하시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고하노라.”
저 목소리가 뇌를 주무르는 것만 같아.
“빛의 아들이시여.”
“빛의 아들이시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자욱한 연기와 함께 눈에 들어온 것은,
신성한 날개를 달고 있는 괴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