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14화
세라 (14)
“오랜만입니다. 바젤 교황님.”
“오오! 명예추기경!”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바젤 교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껏 미소를 띤 얼굴에는 반가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얼굴이 들어서는 중, 그중에 존경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리라.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내 뜻을 바젤 교황이 애써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명예추기경은 희생과 부활의 신은 베니고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실제로 하늘로 올라간 경험도 있으니 저런 표정이 이상하지도 않다.
‘근데 이 할아버지 이거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
많이 늙으셨네.
기분 탓이 아니라 보지 않는 동안 많이 늙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짠해지기도 했다.
‘덕구도 나이 먹으려나.’
기본적으로 마력이 높아지면 노화가 느려지고,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김현성이나 나, 라파엘, 정하얀, 차희라, 이지혜는 늙지 않지만 나머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거지.
특히 박덕구는 마력 수치도 낮으니까.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화로 인해 신성력 수치까지 내려가 있는 바젤 교황을 보고 있자니 잠깐 동안 이 건에 대해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메이스 휘두르면서 화도 버럭버럭 잘 내고, 항상 기운차던 양반이었는데… 이거 메이스는 들 수 있을지 모르겠자너.’
“하하하. 어서 들어오게나. 명예추기경. 그동안 우리 명예추기경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야 보게 되는구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바젤 교황님.”
“내가 어찌 명예추기경의 마음을 모를까. 그저 아쉬움에 한번 중얼거렸을 뿐이라네. 가장 외롭고 힘든 곳에서 베니고어 님과 신앙을 위해 힘써주고 있지 않은가. 모두 교단에서 해야 할 일들이지만 그 짐을 명예추기경에게 떠맡긴 것만 같아 미안할 뿐이야.”
“교단이 아니었다면….”
“말뿐이라도 고맙네. 명예추기경.”
“그렇지 않습니다. 바젤 교황님. 어떻게 교단이 하는 일들을 무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대륙이 있게 된 것 역시, 신도들의 기도와 믿음 때문입니다. 모두 바젤 교황님께서 훌륭히 교단을 이끌어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겠죠.”
“하하하하.”
여전히 아부에 약하기는 해.
“그나저나 기도회라니….”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라네. 명예추기경. 전 대륙의 모든 신도가 기다리고 있는 일이 아닌가. 심지어 나도 깜짝 놀랐지 뭔가. 미리 연락을 해줬다면…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알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시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럼 바젤 교황이 뭐가 되겠냐고.’
안 그래도 바젤 영감님이 교단 내에서 힘이 약해지고 있는 타이밍이라면 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사건이라기보다는 작은 헤프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헤프닝에도 아주 민감하다.
명예추기경의 기도회 소식이 공식적인 루트가 아닌 라파엘의 개인 계정을 통해 알려졌다는 걸 일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뻔하자너.’
명예추기경과 바젤 교황이 갈라졌다느니,
더 이상 명예추기경이 바젤 교황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느니,
불화설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날개 달려 있는 놈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는 타이밍에 이러면 더 안 되지.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바젤 교황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신도들에게 내가 아직 바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으니까.
지금 같은 민감한 상황에서는 이런 소소한 움직임도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주변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띈다.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 심문관, 대부분이 바젤 교황의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물론 다른 이들도 눈에 띄기야 한다.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규모 기도회 전에 잠깐 모여 밀린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교황청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파티 자리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 다들 종교인들인 만큼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훈훈하지는 않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마치 귀족들의 사교회장을 보는 것만 같다. 무리 지어 있는 것도 보이고 귓속말을 주고받거나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들이 자꾸만 시야에 비친다.
굳이 내가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리가 나누어져 있다. 나를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보내고 있는 이들도 있고, 바젤 교황을 견제하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내오는 놈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먼발치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추기경 하나.
녀석이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명예추기경님.”
“요한 추기경님 아니십니까.”
“바젤 교황님도 계셨군요.”
“어서 오게. 요한 추기경.”
“환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젤 교황님. 그리고… 명예추기경님. 오늘 기도회 기대하고 있습니다.”
“평소와 다름이 없는 기도회일 겁니다.”
“명예추기경님이 직접 주도하시는 기도회가 아닙니까. 명예추기경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한들, 대륙의 신도들은 그리 느끼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부족한 기도가 성에 차실지….”
“베니고어 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명예추기경님께서 올리는 기도가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사람을 하나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데….”
“네?”
“이리로.”
“네.”
요한 추기경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 보는 인물.
‘이 새끼….’
“시몬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템플러시군요.”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시몬 님을 뵙는 건 처음입니다만… 다른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지레짐작했을 뿐입니다.”
“역시 명예추기경님이십니다. 하하.”
‘사실 얘랑도 할 이야기가 있기는 한데.’
다른 템플러의 성향이 어떤지도 궁금했으니까.
차가워 보이는 얼굴, 검은색 단발머리. 키는 김현성과 비슷해 보였고, 눈 색깔이 보라색인 것이 인상적이다.
그나마 어리바리하게 생겼던 젠 녀석에 비하면 조금 더 이성적일 것 같은 분위기.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우리 쪽에 가까울 것 같은 이미지였다. 이지혜 나, 진청 같은 부류.
물론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첫 느낌이 그랬다는 거니까.
아,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지력 수치가 꽤 높아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계산적인 수도사라는 성향도 눈에 보이네.
당연하지만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내게 잘 보이는 게 녀석들의 목적이었던 것 같으니까.
나도 놈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만…,
“죄송합니다만 바젤 교황님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혹시 잠시 후에 제가 따로 찾아 봬도 되겠습니까?”
수법이 너무 뻔히 보여 굳이 어울려주고 싶지 않다.
“아….”
살짝 구겨진 얼굴의 요한 놈. 티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동요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베니고어 님께서 새로운 축복을 내려 주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 맞습니다. 명예추기경님. 템플러 젠과 마찬가지로 템플러 요한 역시… 베니고어 님께 날개를….”
“네. 그 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꼭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다만….”
힐끗 바젤 교황을 한번 쳐다봐 주고…
“저도 사람인지라 오랜만에 만난 교황님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군요.”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제가… 방해가 된 모양이로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교단의 커다란 축을 맡아주시는 요한 추기경님을 그리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교황님께는 기도회 관련해서 드릴 이야기도 있어서… 아무쪼록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례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최대한 호의를 담아 요한 추기경의 왼쪽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환해지는 녀석.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최대한의 예를 표현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템플러 시몬과 눈이 마주쳐 살짝 웃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바젤 교황은 고맙다기보다는 면목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교황님.”
“명예추기경.”
“제가 항상 교황님의 편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 크흠….”
살짝 발걸음을 옮기는 모션을 취하자. 바젤 교황 역시 발을 맞춰온다. 슬슬 옷 갈아입어야 되니까. 어차피 자리를 옮겨야 되기는 하네.
“교단의 상황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베니고어 님께서 템플러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내려주셨네. 교단의 큰 복이지.”
“템플러들이 교황청에 더욱더 밀접하게 개입하게 되겠군요. 일부 신도들 역시 그것을 원하고 있겠고요. 템플러들은… 요한 추기경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겁니까?”
바젤 교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다음 대의 교황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도중이라네.”
“…….”
“명예추기경. 베니고어 님께서는 더 이상 나를 바라지 않는 모양일세.”
“베니고어 님의 축복을 받은 템플러들이 교황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베니고어 님께서 바젤 교황님을 지켜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모든 신도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바젤 님을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뭘 벌써 내빼려고 그래. 우리 조금 더 해 먹어야지. 이 양반아.’
“듣기 좋은 말을 해줘서 고맙네.”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황님.”
일단은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예복을 입혀주는 신도들이 눈에 띄었으니까.
뭐 별로 상관은 없겠지. 바젤 쪽의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소문이 퍼져도 별로 상관은 없으니까.
오히려 좋지. 솔직히 하얀색 천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바젤 교황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어쩌면….”
“…….”
“어쩌면 템플러들은 베니고어 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힘을 훔쳤을 수도 있습니다.”
쨍그랑.
“앗… 죄, 죄송합니다.”
천 너머에 있는 바젤 교황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장신구가 담긴 유리그릇을 떨어뜨린 신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죄송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이를… 이를 어떻게….”
그만큼 충격적인 소리였다는 거겠지.
깨진 유리조각과 섞인 장신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일 것이다. 덜덜덜 떨려오는 손이 안쓰럽게 보인다. 장신구를 떨어뜨려서가 아니겠지.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금 단출하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매번 화려하게 치장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불필요한 것들을 오히려 전부 걷어내자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전신이 시야에 들어온다.
걸려 있는 것은 목걸이 하나. 세심하게 짜여 있는 원단 때문인지, 이 정도로만 나가도 충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차피 사람들은 옷 보다는 날개만 쳐다볼 텐데. 상관없겠지. 오히려 더 성스러워 보이는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런 것도 좋을 거야.
그렇게 준비를 끝낸 이후 천이 걷히자.
악귀처럼 일그러진 바젤 교황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옛날 성격 나오자너.’
“그 말이 정말인가… 명예추기경….”
당장 메이스를 집어 들고 요한 추기경의 뚝배기라도 후려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찢어 죽일 무능한 놈들이… 베니고어 님의 힘을 훔쳤다… 이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