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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11화 (90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11화

세라 (11)

베니고어와 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 인형, 전형적인 성기사들이 착용할 것 같은 갑옷, 커다랗게 펼쳐진 날개, 일단 다른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스탯들이 놀랍다.

굳이 비교하자면 라파엘과 비슷한 것 같은 느낌. 대륙 최상위에 선 모험가들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저 정도의 강자는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애초에 라파엘 정도로 올라선다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김현성과 저울질할 때야 이 회색 놈이 하찮게 보이는 거지….

‘비교 대상이 현성이라서 그래.’

현성이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 라파엘 역시 충분한 강자다. 스탯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강자.

외신 전까지만 해도 조금 못 미더운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자기 자신을 비로소 완성한 듯한 느낌, 눈앞에 보이는 정체불명의 인형이 그런 라파엘과 비슷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는 건 충분히 이쪽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녀석이 나와 대척점에 선다는 걸 너무 빨리 가정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마치 외신전 때 사대천사들을 처음 본 것 같은 기분.

이주혁이 녀석을 경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나도 녀석을 경계하고 있으니까.

무표정한 얼굴, 마치 초창기 때의 김현성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외모의 차이는 있다. 놈은 의도적으로 감정을 죽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훈련받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라!”

“이, 이… 이모….”

“괜찮은 거야?”

“흐윽… 이모오….”

한쪽에서는 세라와 한소라가 눈물겨운 상봉을 하고 있는 중, 세라는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정하얀 역시 세라의 눈치를 보고 있다.

“저기…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

“정하얀 님. 세라 왔어요. 세라 좀 안아주세요.”

“잘, 잘… 잘 돌아….”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하얀아. 솔직해져야 된다니까.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보자 어수선한 장내가 눈에 들어온다.

정하얀과 세라핌, 한소라는 한곳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성검용사 파티의 인원들도 각자 자신들이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주혁은 마리엔에게 치료받고 있는 도중, 라파엘은 내게 꼭 붙어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

그 와중에 케루빔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러니까… 죄송….”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케루빔과 세라핌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렴.”

“네.”

굳이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지금 급한 것은 케루빔의 처우가 아니었으니까.

녀석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뭐. 내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템플러 쪽이다.

치료를 마친 이주혁이 현재까지 일어난 상황을 보고하는 와중에 녀석은 말을 이었다. 아직도 커다란 날개를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명예추기경님을 뵙습니다.”

“그렇게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단 호의적이다.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이쪽을 존중하고 있다는 게 전해진다.

내가 녀석을 아무 이유 없이 아니꼽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이해가 가기야 한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나는 베니고어의 아들이었고, 희생과 부활의 신이었으니까.

그것 이전에 놈들은 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당연히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게 맞지.

다른 추기경들에게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젠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일단은 나도 비슷한 스탠드를 취해 줘야지.

따뜻하고 자애롭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륙과 베니고어를 섬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있잖아. 백색의 도화지 같은 사람 말이야.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는 것은 순식간, 은은한 빛을 일부러 뿌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성스러움. 그게 시바. 나야.

“일단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이런 몬스터를…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예상은 가지만 혹시 소속을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녀석은 조용히 감춰진 휘장을 드러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녀석은 본인이 템플러 소속이라는 걸 증명했다.

나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

“그렇군요.”

그동안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양반이 갑자기 왜 자신을 나타냈는지는 모르겠네.

“…….”

“…….”

잠깐 동안의 어색한 침묵,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할지 짧게 고민하는 시간이 만들어낸 정적이 반갑지는 않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어째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힘을 얻으신 것처럼 보이는군요.”

바로 본론.

“최근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 때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만….”

“명예추기경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 템플러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현 상황에 대한 우려를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추기경들의 보호에만 저희들의 임무가 집중되어 있었지만… 특별 파견이라는 형태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그건….”

“그것이 베니고어 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제 모습이 그 증거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베니고어 목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뜻은 개뿔이. 물론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있다.

교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 그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베니고어가 자신들에게 새로운 힘을 내려줬다고 해석할 여지는 분명히 있다.

“그럼….”

“저희들은 저희 나름대로 현 사태를 조사하고 있는 도중입니다. 명예추기경님.”

“네.”

“이에 다른 템플러들을 대표하여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목적이 있어서 찾아온 건가. 아니면 우연히 만난 건가.

“네.”

“이번 일을 저희에게 맡겨 주셨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처럼, 베니고어 님께서 저희에게 내린 새로운 힘은, 이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이형의 몬스터들의 처리는 신께서 내리신 사명이며, 저희는 이 힘을….”

‘이 새끼 이거 이 말 하려고 왔구만. 몬스터도 있었고 겸사겸사 온 거네. 내 위치도 알고 있었지.’

“죄송합니다만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라파엘 님의 파티에서 주관하고 있는 일이라… 제가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군요.”

“아….”

“네. 라파엘 님은 현재 이 이상 현상이 주변 던전이 폭주하여 일어난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너네 집 지하에 던전 생겨난 거.

“명예추기경님께서… 어떻게든… 해결해 주시지….”

그걸 내가 어떻게 해결해. 물론 하지 말라고 딱 말하면 되기는 해. 그럼 라파엘은 네 형. 할 거야. 근데 그러면 안 되잖아.

“불행하게도 라파엘 님은 파란 길드 소속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모험가 신분으로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퀘스트와 던전에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국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해당 라이센스를 발급했고, 저는 라파엘 님의 뜻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지만….”

“무언가 방법을….”

그러니까 그 방법이 없대도…

“라파엘 님 역시 베니고어 님의 선택을 받으신 분이 아닙니까. 템플러의 뜻은 이해가 가지만 굳이 라파엘 님과 다른 집단을 배제한다는 건 베니고어 님의 진실한 뜻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물론 젠 님의 해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분의 아들로서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뿐입니다.”

“…….”

“대륙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륙의 명운이 걸린 사건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일은 결코 저 개인의 힘이나 신성기사단의 힘으로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대륙의 모두가, 모험가들은 물론이거니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대륙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뜻이 모여 만들어낸 오늘입니다. 만약 정말로 대륙에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 것이라면….”

“…….”

“이는 템플러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할 문제겠지요.”

이 사람 표정 굳은 거 봐.

본인들끼리 해결한다고 하면 이쪽에서 아,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말할 줄 알았나 봐.

지하에서 음습한 파티나 하면서 기도나 드리던 놈들이 뭘 알겠어. 누군가는 알지 몰라도 눈앞에 있는 요 녀석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혹시 이 몬스터의 사체를 양도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라파엘 님에게 맡기겠습니다.”

당연히 녀석의 행위는 스틸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사냥 중인 몬스터의 대가리를 날리고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이런 거 고소 먹으면 당연히 제재 먹어요, 이 양반아. 안 그래도 이게 요즘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니까.

“라파엘 님?”

“아… 죄송합니다만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우리 라파엘이야.

“물론 젠 님의 기여도는 저희 측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소유권을 인정해 드릴 수는 있지만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40% 정도라… 자세한 건 저희 파티 쪽의 변호사와 말을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무적인 모습 새로워. 우리 파엘이.

“후우….”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 하지만….”

“네.”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이번 일에서 물러나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군요.”

“…….”

“어째서 그렇게까지….”

“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말하면 누가 곤란해질 것 같아. 내가? 아니면 너희들이?

정보를 더 얻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하는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아무것도 아닌데 나 혼자 쉐도우 복싱 하고 있었던 거면 어떻게 해. 너무 추잡하잖아.

일단은 살짝만 간만 봐 볼까.

“사실은 저 역시 긴히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젠 님.”

“말씀하시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는 살짝 곤란한 터라… 혹시 잠깐 자리를 옮길 수 있겠습니까?”

“네.”

뭐 별건 아니고….

일단 분위기 좀 잡자.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야.

“사실 최근 들어 베니고어 님의 꿈을 꾸고는 합니다.”

“…….”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꿈이지요.”

“네.”

“제 꿈속에서 그분은 아주 깊은 지하 속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

“자세히 묘사드리기는 힘듭니다만 익숙한 광경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악마들의 소굴 같은 느낌이라. 차마 제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천인공노할 더러운 악마 놈들이 베니고어 님의 성체에 상흔을 입히고. 그분의 혈액을 받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치고 힘들고… 괴로운 얼굴로 말씀하시더군요.”

더러운 악마 새끼들. 진짜. 미친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들. 얼마나 끔찍한 광경이었는지 알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창백한 얼굴, 옥구슬 같이 떨어지는 성스러운 눈물방울….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담은 것처럼,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죄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바라본다.

거칠게 숨을 계속해서 몰아쉬어 주는 것도 포인트.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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