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905화 (89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05화

세라 (5)

분위기를 보면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보인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 형제들이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미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중에서도 의외였던 것은 쓰로누스. 무척 우유부단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노선을 정한 모습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게 한다.

‘쟤는 한 번 손절당하더니 아주 충성 충성 하자너.’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런 자세 아주 좋다구. 역시 사람은 한 번쯤 손절을 당해봐야 돼. 아, 쟤는 두 번 당했었지. 세 번까지 가면 학습 능력이 없는 거지. 그렇고말고.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어. 케루. 내가 너를 상처 입히게 하지 마. 나도 이러기 싫어….

-쓰로. 세라는….

-모든 건 아버지가 결정하실 거야. 그게 어떤 일이든 간에 우리는 따라야 해. 세라의 처우에 대해서는 나도 함께 말씀드려보겠지만…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위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야. 정말로 네가 아버지를 거역하려고 하는 거라면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아버지가 얼마나 아파할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쓰로누스….

-아버지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있겠냐고. 너만 아픈 것이 아니야. 케루빔.

우리 언제 밤하늘에 떠다니는 별 보러 같이 가야겠다. 그렇지. 아빠가 귀여워 해줄게요.

-아버지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케루. 우리는 아버지의 은혜로 태어난 거야. 아버지의 기대를 배신할 생각이야?

-하지만… 나는 세라를 저버릴 수 없어. 만약에 아버지가… 세라를….

-함께 아버지에게 말씀드려보자. 도미도 같이 말이야. 도미. 세라를 데리고 와줘.

-아… 응.

뒤늦게 온 도미니온스가 슬그머니 세라를 붙잡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케루빔이 몸을 비튼 것은 바로 그때.

-너!

쓰로누스가 당황한 사이에 케루빔은 쓰로누스의 검을 벗어난다.

사실 저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쓰로누스가 진심으로 케루빔을 해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실 전투력도 조금 달리는 편이고…. 무엇보다 녀석의 협박이 말뿐인 위협이라는 걸 케루빔 역시 알고 있지 않았을까.

곧바로 도미니온스에게 쇄도한 녀석은 발을 뻗는다. 도미니온스가 잠깐 주저했던 그 몇 초 사이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발은 도미니온스의 복부에 닿는다.

도미니온스가 날아가는 사이 곧바로 세라핌을 한 손에 안고 달리기 시작한다.

-앗!

-제길!

“쫓을 필요 없다.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죄… 송합니다.

“사과할 필요도 없다. 너희들이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구나. 너희들에게는 상을 내리도록 하마.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아.”

-감… 감사합니다. 아버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 보인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에게 검을 들이밀었다는 죄책감과 아버지의 뜻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망감.

세라핌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작은 안도감과 함께, 이런 상황에서도 상을 받는다는 말에 기뻐하는 정체 모를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는 것만 같다.

아마 배덕감일지도 몰라. 쓰로누스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아버지, 케루빔과 세라핌은….

“그 아이들에 처우에 관해서는 천천히 생각을 해보도록 하마. 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그렇게 하려무나. 도미니온스.”

-케… 케루빔은 많이 혼란스러울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어요. 제가 실수할 때마다… 어린아이들을 원래 실수하게 마련이라고.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더 많이 실수해 봐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세라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지금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아버지가 사랑할 수 있는….

“네가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아니다.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지. 나도 이지혜도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단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니 재고해 보도록 하마. 네 말대로 케루빔과 세라핌이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너희들은 돌아오는 대로 라파엘의 일을 도와주도록 하거라.”

-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이 가족싸움은 아니었으니까. 두더지 성녀인가 뭔가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런 일이 터진 것도 참 웃겨.

시선은 케루빔과 세라핌에게 고정시킨다. 내가 망원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부모님의 뜻을 저버리고 배신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무서울 것이다. 이제는 사랑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어떤 고통보다 고통스럽게 녀석들의 정신을 갉아먹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정신붕괴의 영역까지 갈지도 모르지. 삶의 목표가 사라진 것 같을 테니까.

-괜, 괜찮아… 케루?

-응… 난 괜찮아. 세라.

-흐윽… 끄윽….

-울지마. 내가 있잖아. 나한테도 네가 있으니까.

-아버지… 흐윽… 엄마… 흐으윽….

-울지마. 세라… 울지… 끄으윽….

-엄마… 엄마아….

케루빔에게 반쯤 안겨 있는 세라핌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조용히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을 때 한소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길드마스터.”

“…….”

“부길드마스터?”

“네. 소라 씨.”

“정말… 정말로… 세라를 없애려고 하는 건 아니시죠? 그냥… 겁만 주시는 거죠?”

“…….”

“그냥 경고만 하시는 거죠… 그렇죠?”

“…….”

“제발….”

“글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흐윽….”

나만 나쁜 사람 된 것 같자너. 사실 그렇기는 해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네.

“죽이는 건 아닙니다.”

“저한테는 같은 말처럼 느껴져요.”

“소라 씨도 마법의 천사 아닙니까. 알 만큼 알 만한 사람이… 그리고 아직 제대로 결정하지도 않았어요. 아니, 결정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제가 결정권을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정권은 하얀이한테 넘길 거예요.”

“…….”

‘솔직히 내가 결정하기는 좀 그렇기도 해.’

마음 같아서는 녀석을 폐기해도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기야 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꼬인 관계이기도 했고, 일손이 급하기는 했지만 굳이 세라핌까지 투입시켜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것은 맞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솔직히 녀석은 아무 상관이 없다.

세라핌이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정하얀이 신경 쓰인다. 만약에 정말로 세라핌을 쳐 버린다면….

‘하얀이가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아.’

한소라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하얀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

한 번 세라핌을 자신의 영역으로 들이기로 한 만큼 쉽게 밀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

정하얀의 인간관계를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가기는 더 쉽지 않지.

“그럼 지금 이건….”

“뭐… 그냥 그것과는 별개로 벌은 받아야 하니까요. 이걸로는 부족하기도 하고 성에 차지도 않지만… 솔직히 하얀이 상태가 신경 쓰이기는 하더라고요. 웃고 있는 모습이 계속 떠오르기도 하고….”

“정… 정하얀 님을 아끼시기는 하는군요.”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길드마스터. 잊어주세요. 그럼 지금부터는….”

“일단 집 나간 애들은 그냥 내버려 두려고요. 집 나가면 개고생인 걸 한번 깨달아 봐야지. 하얀이한테는 간접적으로 물어볼 생각이고요.”

“네?”

“유능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요. 그 생각을 고쳐줘야죠. 그럼 세라핌에 대한 것도 답이 나오지 않겠어요? 솔직히 많이 늦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식으로요.”

“일단 진심을 담은 말로 전하는 게 가장 좋겠네요.”

“네. 정하얀 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못 알아들으면 빼앗아 볼 겁니다.”

“뭘… 뭘요?”

“마력.”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한소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연히 저런 반응일 것이다. 마법의 신에게서 마력을 앗아간다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을 테니까.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불가능하지.’

시스템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하지만 개인적인 능력을 사용한다면, 한시적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시간 동안 마력을 제한하는 포션을 만들면 끝,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정하얀을 촉매로 활용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그녀의 혈액 자체가 마력의 정수였으니까.

당연히 정하얀의 혈액이야 쉽게 구할 수 있을 테고, 애초에 마력 제한 포션의 제조법도 가지고 있으니 금방 커스텀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효력이 얼마나 가냐는 것, 신화급 촉매를 다 때려 부어도 하루를 버티게 할 수 있을까 몰라.

방법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애초에 정하얀은 직접적으로 깨닫는 게 더 빠르니까. 딱히 상담할 사람도 없고… 한 명 있나. 한번 물어볼까.

[저기 군사님.]

[꺼져라. 이기영.]

[혹시 가족 있습니까?]

[꺼져라.]

[사랑하는 사람은요?]

[꺼져라.]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미친놈.]

[혹시 지구에 자식들 있어요?]

[꺼져라.]

이 새끼 언제 한번 손봐주기는 해야 돼.

“아무튼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세라핌한테 뭐 이것저것 지원하고 보내주고 하지 마세요. 제가 속이 조금 좁아서 저렇게 고생하는 모습이라도 봐야겠으니까. 케루빔 쟤도 마찬가지고… 일단은 보류해요.”

“양보… 하신 거네요.”

“원래 내 사람들한테는 가끔 양보하기도 합니다.”

특히 하얀이한테는 더 그렇고.

아직도 울고 있는 모습이 망원경 안으로 들어온다.

[갑자기 미안하지만 혈액 좀 줄 수 있을까?]

[꺼져라. 이기영.]

[잘못 보냈어요.]

이 새끼. 이거 매크로 돌리고 있는 거 아니야?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다시 한번 정하얀에게 전송한다.

슬그머니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킨 정하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얘가 좋아할 줄 몰랐어.

[왜? 왜요?]

[갑자기 간직하고 싶어서.]

더 좋아하는 거 봐. 한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헤실헤실 웃음을 터뜨린다. 슬픈 와중에 기분은 좋았나 봐.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까 저렇게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지만, 잠시 후에는 아주 예쁜 병으로 포장된 혈액을 받을 수 있었다.

11시간 이후에, 정확히는 다음 날 아침을 먹은 이후에 정하얀은 마력을 잃었다.

빛의 연금술사의 부과 효과와 벨리알의 저주, 마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하얀의 혈액을 비롯한 신화급 촉매를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션의 효과는 고작 삼일.

첫 번째로.

정하얀은 자신이 마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