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01화
세라 (1)
이 새끼… 이거 진짜….
‘진짜 나도 모질지 못해요.’
[술 한잔 마셨습니다… 오늘은… 오늘은 정말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려고 합니다. 제 사과가… 잘 전해지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기영 씨… 제가 진심이라는 것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어떤 사정이 있였는지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 선택을 후회한다는 진심만 전해졌으면 합니다. 제 사과가 별로일 수 있습니다… 밤낮으로 고민했습니다… 최선을 다헤,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말뿐인 사과가 아닙니다. 저의 진심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셨는지 맞춤법마저 틀린 모습은 가관이라 할 만했다.
김현성이 취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 드래곤이 담근 만년 된 술이라도 마신 것일까.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안 그래도 내 손발이 다 없어질 정도의 게시글,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은 진심이 느껴진다기보다는 김현성 흑역사의 1페이지를 장식할 것처럼 느껴졌다.
관련 커뮤니티가 순식간에 불탄 것은 당연지사. 그날 새벽 자리를 급하게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 시바.’
일단 간밤에 보낸 문자의 답장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
[그만 좀 하세요. 진짜.]
라고 보낸 메시지에는.
[죄송합니다….]
라는 답문이 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다시 답장 보내야지. 너무 차가워 보였으니까.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 살짝 시간이 필요하기는 해… 솔직히 나는 다 풀린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괘씸하니까. 기강 잡는 차원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있지?
어처구니없게도 저 게시글이 먹히기는 했다. 진심이 전해졌다기보다는 녀석이 조금 짠하게 보인 것이 유효한 것이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가 마지막 순간에 상대방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야 온갖 일들을 함께 겪은 나와 김현성이었으니까. 항상 커다랗게 보였던 김현성이 이렇게 작아 보이는 것은 또 처음.
전날 망원경으로 바라본 녀석의 모습은 참혹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녀석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외신 아이들보다 더 서투른 녀석이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거의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었던 분위기, 자신만 빼고 행복한 것 같은 베니고어그램.
의미심장한 게시글들…. 유대감을 나눈 친우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나 그렇듯 실수를 저질러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측은한 애야.’
온종일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다가 시험 기간 끝나고 친구랑 놀려고 하는데 절교당하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 사실 착한 일 하려고 하기는 한 거니까.
[네.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당연히 기다려야지.’
[그리고 베니고어그램, 현성 씨 계정은 삭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말라고.
[네… 기영 씨.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셨으면 합니다.]
[네. ^^]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실수한 게 있다면….]
[아, 그런 게 아닙니다. 맡긴 일은 기대하겠습니다.]
이 새끼 이모티콘 PTSD 걸리겠자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걸 보니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이런 정신병 하나 정도는 있어 줘야 앞으로 잘하지.
침대에서 몸을 반쯤 기울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 오빠 일어나셨어요?”
“응. 하얀이도 잘 잤어?”
“네… 네.”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고?”
“네.”
‘나도 편하기는 하더라.’
무슨 놈의 천막이 이런지 모르겠어. 도대체 가구는 왜 들어가 있는 거야.
침낭도 아니라 침대가 들어 서 있다. 정수대도 보이고, 심지어 업무를 볼 수 있게 만들어진 테이블마저 고급스럽다.
극세사로 만들어진 이불은 내 방에 있는 것보다 더 보들보들할 지경, 그러고 보니….
“아! 오, 오… 오빠.”
“응?”
“김, 김미영 팀장님한테 전화 왔었거든요. 업무 때문에 할 말이 있으시다고….”
“지금 연락해 볼게.”
“그… 그리고 식사 준비해 놨으니까. 통화 끝나면 밖으로 나, 나오시면 될 것 같아요.”
조금 늦게 일어난 것 빼고는 길드에서의 아침과 다름이 없다.
“네.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부길드마스터.
“네. 팀장님. 용건이….”
-말씀하신 대로 길드마스터가 올린 글은 처리했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캡처된 것들이나 베니고어넷에 퍼지고 있는 것은 막고 있지만 관련 글까지는 모두 처리할 수가 없어서… 막스 님께 부탁해서 전면 통제하는 게 어떨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뭐.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언론만 주의해 주세요. 쓸데없는 추측성 글이나 엉뚱한 글도 전부 조치해 주시고요.”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길드마스터.
“네네. 항상 고생 많으십니다. 팀장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김미영 팀장의 전날 업무 보고를 받고, 테이블에 커피랑 신문도 놓여 있네. 사실 손거울로 봐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신문 보는 건 또 다른 맛이 있기는 하니까.
그대로 바깥으로 나가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정하얀이 시야에 들어온다.
녹색 잔디가 깔려 있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꽤 운치 있다.
잠옷 입고 나온 게 조금 그렇기는 한데. 큰 상관은 없겠지.
“다른 사람들은?”
“전, 전부 먼저 먹었어요. 오빠가 조금 늦게 일어나셔서… 피곤하신 것 같아서 깨우지는 않았는데….”
“조금 오래 잤나 보네.”
“저, 저는 안 먹었고요. 오, 오빠랑 같이 먹으려고….”
“그래? 고마워.”
사실 정하얀이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배정된 업무가 없어서이겠지만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기야 한다.
혼자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런 것도 좋거든.
뭔가 일상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 장소는 다르기는 했지만 최근에 평범하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이런 게 그리웠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일어나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신문 읽고 식사하는 거.
“식사는 이쪽 파티에서 준비했대요. 라파엘 그, 그 사람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애가 세심하기는 해.’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훈련에 한참이다.
어제 늦게까지 자리가 있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일찍 일어나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 어제 훈련을 봐 준다는 게 그냥 한 소리가 아닌 모양인지 아침부터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라파엘과 쓰로누스가 검을 부딪치고 있었고, 케루빔은 사냥개와 대화를 나누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훈련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거 보니까 말이야.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는 라파엘, 쓰로누스는 날개까지 펴가며 본인의 장검을 휘둘러보지만 너무나도 쉽게 막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라파엘도 많이 성장했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저 밀어붙이기만 하던 이전의 모습은 없다.
본인에게 부족했던 테크니컬한 부분이나 경험이 채워진 게 눈에 보일 정도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녀석을 바라보게 된다.
김현성보다는 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건 라파엘의 개성인 것처럼 느껴진다.
놈은 정교한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았으니까. 김현성 같은 검술은 애초에 무리라고 생각해서 미리 선을 그은 거겠지.
“이야앗!”
내가 나왔다는 걸 눈치챘는지 쓰로누스는 커다란 기합을 내지르며 뭔가 보여주려고 하지만 형편없이 나뒹군다.
“이익!”
하면서 땅을 박차는 것도 괜히 그림 같네. 옛날이었으면 네가 더 강하기는 했을 거야.
반면 이주혁과 케루빔은 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조용히 낫을 휘두르던 케루빔을 이주혁이 제지하는 것이 보인다.
“이제 그만.”
“네. 후우….”
“대충 알았다. 케루빔 네가 어느 정도인지 말이야.”
“어떠셨나요?”
“네 레벨.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네…?”
“훈련도 실전처럼 해야 한다. 용병여왕님께 배운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
“네게 훈련이란 무엇이냐.”
“네?”
“내게… 훈련은 살인이다.”
‘이주혁 저 새끼 얘한테 이상한 거 주입시키지 마.’
“하하… 이상한 녀석….”
거기 파티원들도 호응해 주지 마. 시바.
“와라. 잠깐이지만 상대해 주지.”
이윽고 두 명도 몸을 부딪친다. 사실 이주혁이 케루빔을 가르치는 게 무리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의외로 조합이 나쁘지 않다.
물불 안 가리는 녀석 때문인지 케루빔이 많이 당황한 것 같다. 라파엘의 라이벌이기를 자처하는 녀석인 만큼 그동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한 게 느껴진다.
한쪽 손에 달려 있는 작은 석궁이라든가, 변수를 만들기 위해서, 어쩌면 라파엘이 저만큼 성장한 것도 이주혁이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저 새끼 생각보다 세네.’
케루빔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있다.
결국에는 케루빔의 긴 머리카락이 녀석의 손에 붙잡힌 모습, 대롱대롱 이주혁의 손에 매달려 있는 녀석을 보자 웃음이 튀어나온다.
녀석한테 시선을 고정시키는 사이에 훈련을 마친 쓰로누스와 라파엘이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어떠셨습니까? 라파엘 님.”
“확실히 괜찮은 것 같았어요. 형. 조금만 더 다듬으면 금방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벽에 막힌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쓰로누스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전의 교육방식이 문제였던 것 같아서요.”
“네?”
“저도 그 사람한테 배워서 알고 있잖아요. 파란 길드마스터는 학생을 배려하지 않거든요.”
‘그래?’
“그 사람이 검술의 천재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가르치는 것과 재능은 별개니까.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나저나 형, 그리고 정하얀 님 식사는 어떠셨나요?”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잘, 잘, 잘 먹었어요.”
“라파엘 님. 쓰로누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확실히… 그럴 수도 있기는 있겠네. 하얀이한테 마법을 배운다고 천재가 되는 건 아니니까.’
“쓰로누스. 너도 잠깐 앉아서….”
‘사실 현성이도 쓰로누스를 많이 답답해하기는 했어. 재능이 없다든가. 조금 쓸 만한 정도라든가. 그 정도로만 표현했지.’
혹시나 조금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불안해진다. 정하얀이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든 것을 바로 그때였다.
“세, 세, 세라는 조금 어떤가요?”
조금은 갑작스러운 질문이다. 정하얀은 세라핌에게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대부분을 한소라에게 맡겨놓을 뿐이지 사실 제대로 관여하지는 않는다.
아마 쓰로누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다 보니 본인도 한번 던져본 것이 아닐까.
“아. 그건 직접 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정하얀 님. 세라핌은 이주혁이 맡기로 해서….”
때마침 세라핌과 대치하고 있는 이주혁이 눈에 띄었다.
“와라. 꼬마.”
작은 손에 검을 들고 있는 세라핌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면 녀석은 입을 꽉 다문다.
“이야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세차게 휘두른 녀석, 얼마나 세게 휘둘렀는지 녀석은 검을 놓쳐 버린다.
초보자도 하지 않을 어처구니없는 실수, 심지어 놓친 검은 내가 자리해 있는 테이블로 날아오기 시작한다.
‘암살이야. 뭐야.’
당연하지만 굳이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게 막힐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에 허무하게 튕겨 나간 검.
“이, 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곧바로 정하얀이 언성을 높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