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95화
휴가 (13)
인간은 위기의 상황이 오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지금의 이기연의 상태가 그랬다. 메소드 연기 그 이상의 텐션.
다소 뜬금없고 갑작스러웠던 싸다구의 개연성이 충족되는 듯한 표정이라 할 만했다.
눈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이기연의 눈물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준 자신에 대한 자괴감, 어째서 지금 이기연을 찾아온 것인지에 대한 원망….
힘들었던 그동안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듯한 감정씬은 내가 느끼기에도 예사롭지가 않다.
일단 한 대 더 때려야지.
짜악!
솔직히 내 손이 더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부딪히고 있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때문인지 고통스럽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왜! 제 앞에 나타난 건가요! 왜!”
본격적으로 두들겨 줘야지. 그래 봐야 투닥거리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기연은 발작하듯 울부짖으며 손을 휘둘렀다.
김현성이 내 손을 붙잡은 것은 바로 그때,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양손을 잡으며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흐윽… 흐으윽… 흐으으으으윽….”
여기서는 그대로 허물어져야지. 모든 감정을 소비했다는 듯이 말이다.
어색하게 이쪽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툭툭 두드려 주고 있는 모습, 아마 녀석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정석대로라면 포옹이라도 해줘야 하는 타이밍이겠지만 지난날의 기억 때문인지 그런 무리수를 던져오지는 않는다. 그저 따뜻한 위로를 보낼 뿐이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도 도움이 된다. 지금의 이기연에게는 김현성의 저런 모습이 많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기연이라는 캐릭터에게 잠깐 빙의하다 보니 그래도 이 새끼가 미워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 테니까.
하지만 마음을 다시 한번 꼭 다잡는다.
‘그래도, 시바, 다 소용없어. 이 나쁜 새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시바. 넌 나중에 두고 봐. 진짜 설명해야 할 게 많을 거야. 정말로 뭐라도 변명거리를 찾아 놔야 할 거라고.
내가 진짜 요즘에 너무 풀어주기는 했나 봐. 형제가 다시 한번 요단강을 건너야 정신을 차려요. 꼭.
물론 이해는 돼.
억지로 한 번 이해해 보자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한다는 거지.
딱 봐도 위험한 상황이고, 위험한 장소잖아. 어떻게 김현성이 위기에 빠진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어.
이기영과의 식사가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이기연이 위험해 보이니 급한 불부터 꺼야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물론 그래도 용서가 되는 건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은 해줄 수 있다고.
아마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금방 날아올 수도 있었을지도 몰라.
‘분명히 그랬을 거야.’
이기영과 이기연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상황과 상황의 대결이었다는 게 더 알맞지 않을까.
워프게이트도 없으니까 당장 빠져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맞기는 할 거 아니야.
‘아니, 근데 이 새끼는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도대체 어쩌다가 워프게이트 타고 여기로 흘러들어온 거냐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직까지도 김현성은 이쪽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주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말이다.
먼저 운을 띄워주는 걸 살짝 기다렸지만 이 새끼가 그런 눈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조용히 지켜봐 주는 건 좋은데. 너무 조용히 지켜보기만 해. 시바. 너무 조심성이 많다고.
“죄송해요. 파란 길드마스터.”
“…….”
“…….”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이렇게까지 소리 지를 일도, 현성 씨에게 화풀이할 일도 아니었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못난 모습이라니….”
김현성의 태도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선조의 지혜를 몸소 보여주는 것처럼 어휘 선택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
한편으로는 초조해 보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인연에게 멍청한 실수를 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인 걸까. 아니면 카운트다운이 세 시간이라는 것에 초조한 걸까.
근데 어차피 약속은 취소됐으니까. 후자라면 걱정 넣어둬. 앞으로 당분간 볼 일 없을 듯.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바보 같은가요?”
“아니….”
“그렇게 당당하게 떠난 주제에…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연락도 없었던 주제에…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다니… 한심하죠?”
촉촉한 눈망울 일발장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나를 봐도 나쁘지 않은 모습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자조와 후회가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다. 뜬금없지만 3% 정도의 교태도 섞어 줘야지. 그게 아이덴티티니까.
“솔직히 파란 길드마스터가 제게 작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슬쩍 던져본 말을 녀석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시바. 그래서 형제를 버렸다 이거지.
“…….”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일단은 말하는 게 좋겠지. 조금 각색을 섞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다시 한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균열랜드에서 헤어지고 난 이후의 이야기들, 김현성이 알지 못하는 이기연의 이야기.
사방이 개판이 나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유독 김현성과 내가 있는 공간만 조용하다.
조명이 꺼져 조금은 어두워진 공간에 나는 쪼그려 앉아 중얼거렸고 김현성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이기연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부터….
“여관에서 종업원으로 일했었어요. 조금 보람차기도 했었고. 아, 모험가 길드에서 접수원 생활도 잠깐 동안 했었네요. 정말로 재미있었는데. 물론, 그 와중에도 파란 길드마스터의 소식은 듣고 있었답니다.”
중간중간 배경 설정에 맞춰 적당히 이야기를 지어내는 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확인도 안 될뿐더러 대륙의 사정을 나만큼 잘 알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소소한 에피소드에는 잔잔히 미소 지어주기도 했고,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는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새삼스레 구두를 놓고 온 사실을 깨달았지 뭐예요.”
“아직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돌려드리려고 했지만….”
“어머. 정말인가요? 후훗.”
중간중간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것보다 이 새끼 진짜로 비치렐라 구두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나 봐.
물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서자 표정을 굳힌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이지후와 만난 이야기. 멍청하게 함정에 빠져 노예의 인장을 새기게 된 일, 이지후의 저택에서 메이드로 일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된 일….
김현성은 다른 코멘트를 해오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분노하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전해져 온다.
사실 듣기에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블랙마켓에 들어가게 되고, 100만 골드에 팔려 공화국의 군사와 함께 지냈다는 말을 했을 때는 주먹을 쥐기도 했다.
진청 너 이 새끼. 이제 큰일 났다.
“그게 벌써 2개월 전이네요.”
“…….”
“그런데. 파란 길드마스터는 어째서 여기에 계신 건가요?”
약간의 의심의 눈초리로 놈을 바라보자. 혹시나 놈도 진청과 같은 목적으로 블랙마켓을 찾은 것은 아닌가 하는 얼굴로 말이다.
당연하지만 눈에 띄게 당황하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솔직히 이건 이기연이 아니라 이기영이 더 궁금해. 너 이 새끼 진짜 도대체 왜 여기 있었던 거야? 나 몰래 엄한 짓이라도 하고 있었어?
시바. 블랙마켓이 원래부터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던 거 맞지? 진짜 숨겼으면 실망했을 것 같아.
“혹시….”
“그, 그런 게 아닙니다. 기연 씨.”
“그럼요?”
“…….”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부탁이요?”
“네.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며칠 전입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지만 길드의 일 때문에….”
‘아, 이게 새 지부 세우는 일이랑 관련이 있어?’
“그러니까….”
‘이 새끼 주저하는 거 봐.’
“그 친구분의 부탁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일단 내 부탁인 건 맞는 것 같다.
김현성이 확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대충 퍼즐이 맞춰지기야 한다.
‘이 새끼….’
아마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던전을 털어먹는 것보다 블랙마켓을 털어먹는 게 더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공화국에도 워프게이트가 있다고 했으니까. 블랙마켓을 정리한다면 공화국에서의 인지도도 올릴 수 있었을 거고 말이야.
정리해서 나온 자금이나 장물들을 써먹으려고 했던 건가 봐. 그렇게 침투에 성공한 다음에는 갑작스럽게 워프게이트가 닫히게 된 거고….
이거 맞나….
일단은 가능성이 크다. 더 자세한 건 이기영이 돼서 물어보는 게 맞겠지. 나름 길드의 대외비니까. 외부자라고 할 수 있는 이기연한테 말할 수는 없었나 봐.
“제게 상담하셨던 문제는 잘 해결되셨나 봐요.”
“네. 그렇습니다. 덕분에 말입니다. 기영 씨와는….”
“명예추기경님 이셨군요. 그때 현성 씨가 말한 사람이….”
“…….”
“…….”
“네.”
“어떤 사람인가요. 명예추기경님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근데 시발로미 날 버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사람이고 저를 지탱해 주는 사람입니다. 제 어설픈 말주변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친우입니다.”
근데 날 무시해? 네가 사람이냐. 시바. 나는 희생도 했어.
“기연 씨에게도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
잠깐 동안의 침묵이 장내에 감돌았다. 김현성이 다시 한번 말을 꺼낸 것은 이 약간의 침묵이 지겨워질 때 즈음, 조금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나름 중요한 발언을 할 모양이라 나도 살짝 진지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저… 기연 씨.”
“네?”
아마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나름 용기를 낸 발언이겠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
“파란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너 웃긴다. 시바. 네가 뭔데. 이기연을 파란으로 데려오려고 그래. 평소에는 인사에 관심도 없더니.’
약간은 충동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기연 씨가 가지고 계신 문제들을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단순한 동정이나 기연 씨가 겪고 계신 상황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아마 기영 씨도 기연 씨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서… 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튼 간에… 저,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
“평소에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이렇게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때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평소에는 이러지 않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라고 말이에요. 전형적인 작업 멘트인가 봐요.”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김현성은 약간은 충동적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사실 자기 자신이 이기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추억은 아름다웠지만 그걸로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건 쉽지 않잖아.
그냥 자기도 모르게 막 질렀다고 봐도 되겠지. 이기연에 대한 동정도 섞여 있을 거고, 약간의 호감도 있을 수도 있어.
응 인정해.
근데 있잖아.
“죄송해요.”
“네?”
“정말로 죄송해요. 파란 길드마스터. 저는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
나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이지후 도련님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거든요.”
이 새끼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였자너.
“저도 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
“사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니까요.”
명대사 오졌다.
김현성의 두 눈이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 시바 차였다. 0고백 1차임.
이 새끼 진짜 레알루 쌤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