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91화
휴가 (9)
‘어떤 미친 새끼가 노예한테 100만 골드를 태워?’
녀석을 바라보는 모두의 얼굴엔 놀라움과 의아함이 가득했다.
내 옆에서 진짜 또라이가 나타나면 오히려 제정신으로 되돌아가게 마련, 지금 장내에 서 멍하니 놈들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그랬다.
처음부터 뭔가에 조종당하던 것처럼 이어지던 경매, 애초에 10만 골드도 적절한 가격이라고 볼 수 없다.
노예 거래금지법 때문에 공급이 힘들어졌다고는 해도 가격대가 가격대였으니까.
10만 골드만 있어도 초보 모험가 파티가 중급으로 올라설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 아니, 구매하고도 남는다.
그 와중에 더 현실성이 없었던 100만 골드가 등장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뭐.
‘다른 새끼들은 전부 다 가짜 광기였자너.’
진청이 그 정도 자금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놈은 공화국의 상징이었고 나처럼 이것저것 하고 있는 게 많았으니까.
더 이상 레이스에 따라올 이들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다시 한번 오만한 얼굴을 보내고 있는 꼴은 가관.
본인이 노예에 100만 골드를 태운 미친놈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막말로 제정신으로 벌일 수 있는 게 아닌 거지.
“미친….”
“공화국의 진청. 생각한 것보다 더 호색한이었나.”
호색한이라는 단어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치. 너 몇 년도에 태어났어.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네요. 깨끗한 척, 자신들은 남들과 다른 척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저런 사람들이 속은 더 더럽고 추악한 법 아니겠어요?”
네. 귀부인 사루비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림자의 영웅이니 공화국의 상징이 추악한 욕망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벌써 태세전환 하는 사람들도 보여. 너 아까까지만 해도 목이 터지라 소리 질렀잖아. 질투하는 건가 봐.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0만 골드를 지른 진청의 입장만 난처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블랙마켓의 회원이 되려면 보안 유지는 필수 사항이다.
오늘의 거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그림자 영웅 진청, 공화국의 상징 진청이 블랙마켓에서 노예를 100만 골드나 주고 구매했다는 사실은 좋은 뉴스거리임이 틀림없으리라.
아주 약간의 조치만 취해주면 이 새끼 이미지 끝장내는 건 일도 아니라 이거야.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나 정도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101번 고객님께서 100만 골드… 에… 네… 더 없으시다면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낙찰. 낙찰. 낙찰.”
녀석이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눈에 비쳤다.
본인도 짜증 나는 상황에 휘말리는 걸 아는 건지 조금 인상이 구겨지기는 했지만 한 번 잡은 컨셉을 도중에 취소하는 게 더 추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
‘진짜 이 새끼는….’
“여러분들의 대단한 성원에 감사드리며 오늘의 경매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블랙마켓을 찾아주신 모든 고객님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 와중에 마무리 멘트를 내뱉는 사회자, 욕설을 내뱉거나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며 바깥으로 나가는 이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너무 뻔해 굳이 들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마켓 안에서 할 이야기들이 많겠지.
언제적 마무리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고풍스러운 음악과 함께 꽃잎이 떨어진다.
나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용히 경매장의 안을 빠져나간다. 아마 몇 가지 절차를 진행하러 가는 거겠지.
덩치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로 한참이나 걸어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것은 고풍스러워 보이는 방 안.
경매장 관계자처럼 보이는 여자 하나와 진청이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왔군요.”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진청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고객님. 그럼 상품의 배송은….”
“직접 데려가지.”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만 아직 교육이 완료되어 있지 않은 상품입니다. 사전에 예고드렸던 대로 원하시는 옵션을 무료로 처리해 드리고 있습니다. 옵션의 목록은 말로 설명드리는 것보다 안내된 책자를 보는 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안내된 책자에 여러 가지 옵션이 쓰여 있었지만 저걸 굳이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진청도 쓰윽 한 번 시선을 보낸 이후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넘긴다.
“그냥 데리고 가겠다. 지금 당장.”
“저….”
“이전의 인장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가격을 깎을 생각도 트집을 잡을 생각도 없으니 빨리 처리해 줬으면 좋겠군.”
“…….”
“더 이상 날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소리다.”
‘폼은 오지게 잡네. 이 새끼.’
아마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 녀석과 마주 보고 있는 경매장 관계자도 똑같은 생각 하고 있을걸.
어찌 됐건 간에 놈은 노예에 100만을 태운 욕망의 화신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관계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씀하신 대로 이후의 처리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묵으시고 가셔도 됩니다. 만약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길….”
“…….”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다.
“…….”
“…….”
“제길.”
“…….”
“이제 된 건가?”
“일단 퀘스트 보상부터 받으세요. 시바. 여기는 차도 안 내주나? 군사님, 저기 호출 벨 좀 눌러서 차랑 입을 만한 옷 좀 달라고 하시죠.”
“…….”
“참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보니 막 옛날 추억도 생각나고 그렇지 않아요?”
“개소리. 그리고 그 퀘스트 보상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제 용무는 끝난 거겠지. 나는….”
“아니, 왜 이렇게 사람 성격이 급합니까? 여기 혼자 놔두고 가려고요? 제정신이에요? 여기 혼자 다니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라고… 최소한 바깥까지는 데려다줘야죠. 저 그리고 배고픕니다. 밥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거울연어 있으면 그걸로….”
“…….”
“…….”
“우리가 거래한 내용은….”
“샀으면, 시바, 책임을 져야죠. 앉아요.”
이 방 고급스러운 거 봐. 내 방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 같아.
다리를 얼마 만에 쭉 펴보는 건지 모르겠다.
소파에 반쯤 누워 눈앞에 놓인 다과를 우물우물거리자 짜증 난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이 들어왔다.
‘시바 적당히 해야겠다. 진짜로 빡친 것 같자너.’
갑자기 나타난 최악의 손님이 자신의 휴가를 망쳤으니 얼마나 짜증이 날까.
원래 선이라는 건 넘을 듯 말 듯 넘을 듯 말 듯 해야 의미가 있는 거지 무심코 넘어버리면 재미없어지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어.
진청과 내가 새로운 우정을 유지하는 이유가 뭐겠어. 선을 안 넘어서 그런 거지.
“사람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혹시나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네놈의 존재 자체가 실수라고 말하고 싶군.”
“…….”
“그리고 그 말뿐인 사과는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매한가지다.”
“그런 식으로 너무 매정하게 굴지 말고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조금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이 말입니다. 블랙마켓은 언제부터 알게 된 거예요? 꽤 오랫동안 이용하신 것 같은데. 알고 계시는 것 좀 공유해 봅시다.”
“…….”
“트집 잡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평범하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충 이해할 수는 있으니까. 콜로라도가 어떤 상태인지는 아십니까?”
“콜로라도?”
“네.”
“멍청한 놈. 이곳은 콜로라도가 아니다.”
“…….”
잠깐 동안 허벅지를 톡톡 하고 두드리게 된다.
‘내가 그렇게 멀리 왔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계속해서 바깥을 살펴본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상으로 콜로라도를 벗어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폰을 타고 날아온 것도 아니고 워프게이트를….
“콜로라도에 있는 워프게이트를 통해 올 수 있는 곳은 맞지만 정확한 위치는 나도 잘 모르겠군.”
“어떻게 워프게이트를 통해서 올 수 있다는 겁니까? 워프게이트는….”
‘하얀이가 설치한 거잖아.’
“그건 내가 네게 물어야 하는 말이 아닌가. 방법이야 많겠지. 워프게이트의 코어를 훔쳤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워프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다른 마법사가 있을지도 모르지.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만…. 이곳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네 말대로 나는 필요한 물건을 구하면 그만이니.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으음….”
“낯짝을 보아하니 네놈은 콜로라도에서 잡혀 온 모양이군.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했길래 그런 모습으로.”
“아. 거기서 물약이 유통되고 있더라고요.”
“뭐?”
“아니, 그것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멍청해 가지고….”
“…….”
“기본적으로 환각성과 중독성을 띄고 있는 약물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네요. 지금 중요한 건 여기에서 물약이 유통되고 있다는 것 뿐이니까.”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네.’
스무스하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미간을 찡그린 것을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을 수도 있고… 멍청하다고 한 방 먹은 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 내가 대륙의 일에 무신경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워프게이트를 통해서 올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어쩌면 콜로라도뿐만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블랙마켓의 규모나 크기를 생각하면 다른 지역에서도 이곳으로 연결된 워프게이트가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겠지. 그래 봐야 몇 개 되지는 않겠지만….
“공화국 쪽에도 워프게이트가 있습니까?”
“…….”
긍정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코어를 도둑맞은 적이 있었나?
정하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이런 워프게이트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녀석의 말대로 도둑맞았거나 하얀이도 모르는 사이에 빼돌려진 게 몇 개 있을지도 몰라.
정황상 마탑에 반동분자 몇 놈이 있었을 수도 있고… 설치 작업은 하얀이 혼자 한 게 아니니까.
마탑도 한번 들쑤셔야 하나.
‘덩치가 커지면 이게 문제야.’
콜로라도처럼 눈에 안 닿는 문제들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없다.
“그걸 알면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거 더럽게 틱틱거리네. 진짜.’
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말씀하신 차와 식사거리를 가지고 왔….”
엿이나 먹어보라지.
“군, 군사님… 제, 제발! 제발!”
“뭐?”
“아흑! 주인… 님! 아흐윽! 그곳은….”
“너 이 개자식!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더 이상은… 아아아아악!!”
“이 미친! 당장 닥치지 못해!!”
“읍! 으읍! 읍!”
그러게 잘해줬어야지. 나를 조커로 만들지 말라구. 평범한 기연이 린델 조커 되는 거 순식간이야.
“말, 말씀하신 것은… 문 밖에 내어… 놓, 놓겠습니다. 부… 부디 평안한 시간 되시기를….”
밖에 있는 사람 많이 당황했자너.
한껏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놈의 얼굴, 단언컨대 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