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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90화 (88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90화

휴가 (8)

일단 놀라웠던 것은 내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는 블랙마켓 전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메인 경매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 장소는 전성기의 캐슬락을 방불케 했다.

무대가 무척 넓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리 역시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어떻게 이곳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

여기 모여 있는 적폐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 때문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10만 골드… 10만 골드!!”

애초에 왜 소리를 질러?

“20만 골드다!”

경매 방식과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모습, 손가락을 들어 올리거나 표지판을 들어 올리면 사회자가 정리해 주면 되잖아. 뭐 이렇게 시장바닥 같냐고.

“21만 골드! 21만!! 21만!!!”

“제기랄… 24만!”

노예 하나에 지급하기에는 너무나도 높은 가격대도 이상하다. 메인 이벤트 상품에 무언가 딸려온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온갖 놈들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고 있는 모습.

쟤한테는 팔리기 싫어, 진짜.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분위기는 제지시키려는 사회자의 모습이 눈에 띈다.

“여러분 진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정을….”

“27만 골드!!”

“고… 고객님들께서는 정해진 경매 절차에 따라서 경매에 참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정하시고 정해진 경매 절차에 따라서!”

“30만 골드!!”

마치 지옥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인간들의 욕망이 뒤엉키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자리에서 일어난 늙은 부호나 살이 뒤룩뒤룩 찐 권력자들도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지른다.

심지어 귀부인… 쟤는 도대체 왜.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건지, 아니면 사회자의 독단적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이 시장바닥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이끌어 나가기로 한 모양.

가끔은 이런 분위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야 흥행이라면 흥행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비이성적일 정도로 경매에 몰두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면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다.

‘물약이라도 사용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환각 마법의 종류일지도 몰라.

괜스레 주변을 둘러봤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미친놈들이 참 많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만 시야에 비치는 것은 대륙법의 암 덩어리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스쳐 지나간 얼굴들도 보인다.

그야 이런 경매에 참가할 수 있는 이들이 평범한 이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딘가의 재력가들, 권력자들, 내가 모르는 놈들은 대부분 지혜 누나가 알고 있겠지. 뒷구멍에서 돈 버는 놈들일 테니까.

그래. 그래. 너… 어쩐지 구리다 했어.

연방, 연합, 심지어 교국의원도 보이네. 심지어 한 명도 아니야. 너희들 다 뒈졌어. 진짜루. 그리고 너… 너….

그리고.

‘근데 너는 왜 여기 있어.’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쟤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미친 인간들로 가득 차 있는 장내에 유독 앉아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한 녀석이 눈에 띈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짜증 난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놈.

조용히 한숨을 내쉰 이후에는 자리를 뜨려고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 구겨질 대로 구겨진 인상을 보니 놈의 목적은 경매에 취소된 목걸이처럼 보인다.

여전히 비열하고 띠껍게 생긴 외모, 항상 입고 다니고 있는 저 중국풍의 옷은 갈아입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마 저 옷만 여러 벌 가지고 있을 거야. 저 새끼는….

항상 똑같은 표정이라니까. 자신은 여기에 있는 인간들과 다르다는 듯이 내리 깔보는 듯한 표정 말이야.

‘이중적인 가면 쓰레기 새끼. 블랙마켓이 있는지 알았으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해?’

“31만 골드 나왔습니다! 네. 34만 골드! 34만 골드입니다!”

“…….”

“35만 골드까지 치솟아 올라갑니다! 더 없으십니까? 35만 골드!”

경매장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구매할 수가 없으니 힘을 합치려는 거겠지.

그 와중에 몇몇 바람잡이들이 나와 이쪽의 손목을 붙잡는다.

“꺄악!”

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오기가 무섭게….

“37만 골드까지 갑니다! 아니, 40만 골드입니다!”

공화국의 가면쓰레기 진청이 저도 모르게 나를 바라본 것은 내 목소리가 나온 직후.

‘어. 시바.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너 돈 좀 있잖아.’

우리 눈 마주쳤자너.

눈치채 줄 수 있지? 아니, 솔직히 벌써 눈치챘지? 다들 김현성처럼 눈치가 없는 건 아니야. 특히나 쟤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니까. 바로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도, 도와주세요.”

애달픈 목소리를 괜스레 내뱉는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조신과 순백의 상징과도 같은 그녀, 경매장에서 뿜어져 나온 추악한 욕망과 더러운 시선들을 견딜 수 없었던 탓일까.

마음속에 더러움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던 이기연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생소하고 두려울 뿐이다.

다시 한번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너 이 개새끼. 못 본 척해?’

못 볼 걸 봤다는 눈,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모자라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꼴은 가관.

서둘러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짐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쓸데없이 황당한 상황에 휘말리기 싫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것 같았지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군사님. 왜 사람을 못 본 척하고 그러십니까? (0/1)]

[진청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진청은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사 줘.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아보세요. 우리 거래 좀 합시다. 제가 지금 좀 상황이 꼬여서 그래요. 콜로라도 날아가게 생겼으니까. 빨리 경매에 참여 좀 해주시면 좋겠네요. (0/1)]

[진청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진청은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빨리.

[희귀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그래. 시바. 말 씹고 간다 이거지. 어째서 블랙마켓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회할 겁니다. 장담하건대 후회할 거예요. 제가 공짜로 해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퀘스트 보상도 등록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봐. 시바. 그래. 일어나 봐. 어? 지금 일어난 거 맞아요? 일어난 거 맞습니까? 다시 앉아야지. 어? 너 진짜 그냥 가게? 가지 마. (0/1)]

[진청에게 희귀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합니다.]

[명예추기경과의 티타임 (0/1)]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도 결국에는 한계가 온다. 못 들은 척, 모르는 사람인 척해보지만 귓구멍, 아니, 뇌 속에 계속해서 목소리를 때려 박으니 기분이 나쁘다는 듯 중얼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제기랄. 더 이상 네놈과 연관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분명히 네놈도 동의한 내용이 아니었나?

물었네.

-도대체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하는… 이 미친 개자식. 제기랄! 어쩐지 오늘 일진이 더럽더라니. 제기랄!

[연관되지 않고 싶다고 하고 계시는 것치고는 통신 채널도 그대로 가지고 계셨네요. (0/1)]

-이번에는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인데 갑자기 여기서 네놈이 그딴 모습으로… 아니, 물어보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 취미 한번 고약하군.

[설명하자면 깁니다, 군사님. 솔직히 저도 정신이 없어서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렸는데. 아니, 드리긴 드렸구나. 계속 무시하시더라고요. 언제 한번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계속 린델에 붙잡혀 있는 바람에 인사를 못 드렸네요. 어떻게… 그간 평안히 잘 지내셨습니까? (0/1)]

-네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평안 했었….

[아! 사정을 설명하자면 깁니다.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런 모습으로 여기 서 있고 싶겠어요? 여기 블랙마켓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군사님이야말로 여기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대답 여하에 따라서 조금…. (0/1)]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나. 최소한 네놈이 지금 그 모습으로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것 보다는 덜 이질적이겠지. 아무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해두고 싶군. 용무는 끝났나?

[용무가 끝나긴 뭐가 끝나요? 그냥 좀 사 달라고요. 제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0/1)]

-내가 협박 따위에.

[청탁입니다. (0/1)]

-…….

[쓸 만한 자리 하나 만들어 드릴게. 군사님은 현 대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 대륙, 공화국과 교국이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륙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말씀드리건대, 현재의 대륙은 인재를 필요로 하고…. (0/1)]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아무튼 우리가 처음에는 악연으로 시작했어도 이제 막 좋은 관계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시점이 아닙니까? 같은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운 이후에 사이가 좋아지는 전형적인 클리셰 있잖아요. 군사님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군사님을 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동료잖아요. (0/1)]

-지랄.

[아, 빨리 사 달라고요. 다른 말 하지 말고. 정말로 후회하고 싶은 거 아니죠? 그렇죠? (0/1)]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착석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럼, 그래야지.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얻어낼 게 있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더 이상 네놈과 연관되지 않는 것 하나야. 솔직히 네놈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기영 네놈에게 빚을 만들어 놓는다면 지금 같은 개짓거리에 나를 다시 한번 휘말리게 하지는 않겠지.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아, 근데 좋은 자리가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나중에 따로 제안서를 보내드릴 테니까. 읽어보시고 결정해 주세요. 아. 경매 끝나겠네요. 빨리요. (0/1)]

“42만 골드입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입니다. 방금 전에 42만 골드로 저희 경매장에 최고 경매가를 갱신했습니다. 이번 상품을 구매해 주시는 고객님에게는 원하시는 옵션을 제공해 드릴 예정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손가락 두 개를 들고 펼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네. 42만 5천 골드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아직 교육되지 않은 상품입니다.”

“43만 골드!”

“44만! 44만이다!”

이번에는 표지판을 들어 올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놈에게는 관심이 없다.

흥분해 있는 인파들 사이에서 놈의 모습이 어떻게 사회자의 눈알에 박힐 수 있겠는가.

본인도 그걸 인지하고 있는 분위기, 짜증 난다는 듯이 자신의 앞쪽에 놓여져 있는 테이블을 탁 하고 내리친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파동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 순식간에 마력이 장내를 휘감는다.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시위한 거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이 쏠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시바. 멋있는 척 오지게 하네, 진짜.’

저 새끼도 은근히 컨셉러니까 저런 거 즐기고 있을지도 몰라.

다리를 꼰 채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다. 갑작스레 침묵에 휩싸인 공간에서 가면쓰레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60만.”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이들부터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는 이들까지, 마치 무대의 주인공이 녀석이 된 것만 같다.

‘재수 없다. 진짜. 와… 뭐가 저렇게 재수가 없냐. 저 새끼는.’

“네… 네… 60만… 60만 골드가 나왔습니다.”

모두가 포기하는 게 맞다고 판단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가 않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 레이스를 이어나가던 살이 찐 권력자를 향해 눈빛을 보낸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이렇게 포기할 거냐고. 당신은 이 경주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녀석이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65만이다!!”

“네. 65만 골드가 나왔습니다!”

아, 거기 아름다운 귀부인. 당신도요. 당신도 포기할 건가요? 저는 제 주인님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는데요. 제발 당신이 날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모시고 싶다구요. 당신 품에서 일어나고 싶다니까요.

“포기할 수 없겠네요. 70만이에요. 저는 70만입니다.”

“경매가가 70만 골드까지 치솟습니다!”

우리 청이 형 표정 곧바로 일그러지자너.

라이벌들 등장했자너.

심지어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는데 빌런이 멀쩡히 일어나서 주먹을 내지르니 얼마나 민망하겠어.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거야. 그래도 그림자의 영웅이고 공화국 상징적인 인물인데, 뭐 이상한 애들한테 발리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 김현성한테 발리는 희라 누나의 심정일 거야.

심지어 내가 보고 있어서 더 쪽팔릴지도 몰라. 가오 한번 잡으려다가 개 쪽을 당하게 생겼으니까….

실실 웃음이 나온다.

아마 녀석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굳이 내 제안이나 부탁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놈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된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젠장. 나는 71만 골드를 내놓겠소!”

멋져요. 콧수염 나신 분.

“72만이에요!”

아름다운 귀부인 성함은 사루비아시네요. 당신이 제일 좋아.

“75만 골드다!”

개판이네.

다시 한번 레이스가 시작된다. 모두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을 때.

녀석은 다시 한번 건방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0만 골드.”

“…….”

“전부 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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