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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84화 (87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84화

휴가 (2)

-휴가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걸 하자는 거 아니에요. 그냥 데이트나 하자고요. 오빠.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힘들었잖아. 어차피 또 바빠질 텐데…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요? 몇 년 뒤에 또 이벤트 벌여야 될 거 생각해 보면 지금 미리 해놔야 돼요. 벨 이사랑 기획 회의 일정도 잡아야 하는데….

“흐음….”

-벨 이사가 내놓은 기획안 때문에 벌써 이해관계가 갈리고 있더라고요. 베니고어 쪽에서는….

“대미지를 최소화하고 싶겠지. 일리는 있어.”

-성장 방향의 문제니까요. 베니고어 측에서는 대륙의 안정화가 덜 이루어졌기 때문에 피해수치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방향이고… 벨 이사 쪽에서는 충분하다고 판단한 거 같아요. 벨리알은 더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신성을 끌어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기획안 보면 딱히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양측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앞으로 몇 년간 계속 조율하면서 의견 맞춰줘야 할 텐데… 그거 생각해 보면 진짜 이번밖에 기회가 없다구요.

“누나 말이 맞아. 확실히….”

-그냥 놀자는 것도 아니라니까. 어차피 우리 이 모습으로 갈 거 아니잖아. 오빠 저번에도 서민체험 하러 나간 거니까.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자고요.

“대륙인이나 일반 모험가들이 어느 정도인 건지 확인해 보자는 거지? 그거 이미 하고 있기는 하잖아. 심리상담 치료센터도 운영하고 있고 검은백조에서 제출한 표본도 있지 않아?”

-물론 표본이 있기는 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거랑 차이가 있기는 하겠죠. 자기 정신병 있다는 설문조사에 체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모험가들은 특히 그런 거에 더 민감한데.

‘아, 이 누나….’

왜 이렇게 일리 있는 말만 해.

“검은백조에서 그렇게 어설프게 통계를 냈을 리가 없잖아. 왜 그래?”

-통계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느껴봐야 한다는 거예요. 현재 대륙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륙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들어가서 함께 호흡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요.

“언제부터 대륙인들 정신건강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제가 진짜로 관심 있어서 이러겠어요? 그래야 조율하기 편해지니까 그렇죠. 솔직히 요즘 계속 서류 만지다 보면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감이 떨어진단 말이에요. 오빠도 그럴 거예요. 직접 피부로 느끼는 거랑은 차이가 있다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느껴지기야 한다.

다음 이벤트를 위해 벨리알과 베니고어, 양 측 입장의 조율도 조율이거니와 현재 대륙인들이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아래에서 보고를 받는다고 한들,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이번 기회에 나들이라고 생각하고 다녀오는 것도….

‘괜찮기는 할 것 같아.’

무엇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게 크다. 누나와는 거래가 있었으니까.

굳이 피해 다니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이밍이 나왔다면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신용은 생명이지. 아무리 이지혜와 내가 각별한 사이라고 한들, 한 번 신용을 어기게 되면 조금 그렇자너.

“근데 그거 휴가가 아니게 되는 거 아니야?”

-충분히 휴가예요. 같이 오랫동안 나들이 나갔다 오면 그게 휴가지, 다른 게 휴간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다는 건… 특혜라고요. 연방 쪽이 피해가 가장 컸으니까 그쪽에 다녀와 보는 게 좋을까요? 모험가 길드에 등록도 하고… 던전도 한번 돌아보고. 컨셉도 좀 잡고 놀러 갔다 와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통화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얘들한테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잠깐 일 좀 보고 온다고 하면 되잖아요. 저희 쪽에서 호위 붙을 거예요. 혜진이한테 말해놓을게. 말이 안 통하는 두 사람이 문제기는 한데. 정하얀 쪽은 제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방법이야 찾아봐야죠. 근데….

“김현성이 문제지?”

-걔는 오빠가 좀 어떻게 해봐요. 이런 시국에 몰래 빠져나갈 수는 없으니까.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가자 인사를 해오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준다.

익숙한 길드 하우스의 풍경, 테라스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들어 올리면서 여신의 손거울을 습관처럼 들어 올렸다.

-목적지는 연방으로 해요. 세부 지역은 제가 결정할게요. 컨셉은 이거야. 나는 철없는 귀족 가문의 도련님, 아니, 귀족은 조금 그러니까 유력길드나 유력가문의 도련님으로 할게요. 아주 싸가지 없고 지만 잘난 줄 아는 싸가지 없는 놈. 오빠는 우리 가문에 빚을 지고 있는 하녀라는 컨셉으로 가죠.

“세부 설정까지 짜놔야 돼?”

-기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합시다. 좀.

[연방의 모험가 길드.]

여신의 손거울에 검색하자 여러 가지 정보들이 눈에 보인다.

딱히 새로운 정보라고 할 건 없었지만 등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퀘스트와 공개 던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길드나 클랜에서 의뢰를 걸어 놓은 것들, 휴가라고 했으니 너무 난이도가 높은 것들보다는 단순한 몬스터 사냥이나 중급 모험가들이 할 수 있는 의뢰를 찾아보는 게 좋겠지.

‘고블린 사냥, 코볼트 던전도 있고….’

이런 건 너무 쉬우려나. 모험가들 수준이 전체적으로 올라갔으니까.

적어도 일반 등급 말고는 희귀 등급 이상으로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 아이템으로 무장할 거예요. 누가 봐도 애송이 같은데. 아이템 빨 좋은 그런 거 있잖아요. 부모 믿고 설치는 전형적인 쓰레기. 과시하기 좋아하고 비싼 거 좋아하고….

“왜 그런 걸 좋아해?”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잖아요. 적당한 신분도 빨리 만들어놔야겠다. 오빠 캐릭터 시트 보낼 테니까. 확인 좀 해봐요.

[이기연]

[평범한 모험가였던 그녀의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우연히 이지후를 만난 직후였다. 대형길드(길드명 미정이나 가문 명 미정)의 독자 이지후의 눈에 띈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비열하고 질척한 음모에 휘말리게 되는데 …중략… 결국 커다란 빚을 떠안은 그녀는 매일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중략…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지후에게 호감을 느끼며 …중략… 균열랜드에서 만났던 김현성을 떠올린 그녀, 하지만 결국에는 몸도 마음도 이지후에게 물들며 굴복하고 …중략….]

“아… 시바 이게 뭐야. 누나. 너무 자극적이잖아.”

-그러니까 노는 거라고 했잖아요. 자극적이어야 재미있지. 우리 사이에도 자극이 필요하지 않아요? 우리 앞으로 오래오래 같이 해 먹어야 하는데 이런 게 권태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괜히 역할놀이 같은 거 하겠어? 그리고 계약이잖아.

‘그래 계약이기는 하지.’

-일단 대충 짜놓은 거니까 세부 설정이나 행동방침은 결정되면 보내드릴게요. 오빠는 김현성 해결해요. 그리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결이 끊긴 것이 보인다.

‘이 누나 진짜 제대로 마음먹었네.’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마음먹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결코 하루 아침에 만든 게 아니야.’

빽빽하게 써져 있는 글자들의 내용은 가관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동안 이 누나가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조금 짠해지기도 했지만 설명하지 못 할 광기가 느껴진다.

아마 일하는 내내 이것만 떠올렸을 것이다. 휴가를 받고 해외를 떠날 생각으로 살아가는 직장인들처럼, 일하면서도 틈틈이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놓지 않았을까.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정도의 볼륨이 나올 수가 없다.

심지어 말버릇이나 새로 생긴 습관 같은 것, 그리고 이지후와의 만남이 이기연에게 끼친 영향까지. 당황스러워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누나에게 재충전의 기회가 된다면 좋은 일이다.

역시나 문제는 김현성. 아니나 다를까. ‘기영 씨!’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팔을 흔드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 달라진 것은 머리 길이밖에 없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뒀던 이전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심지어 조금 짧아진 것 같았다.

아마 머리가 너무 길다고 말했던 것 때문이겠지 뭐.

기본적으로 얼굴이 받쳐주다 보니 전부 다 소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지저분하게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

‘아냐. 그것도 나름 매력이 있기는 했어.’

길들여지지 않은 늑대 같은 느낌. 근데 지금은 백수잖아. 겉모습이라도 말끔해야지.

“기영 씨!”

다시 한번 손을 흔드는 양손에는 묵직한 뭔가가 들려 있다. 안 보인다 했더니 또 경매장에 다녀온 모양이다.

“쓰로누스 교육은 끝냈어요?”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아니, 시바, 교육 잘 끝냈냐고.’

티 없이 순수하고 맑은 모습이 예전과는 다르기는 하다.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김현성은 확실히 달라졌다.

걱정거리가 줄었고,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으리라.

1회 차의 실패를 잘 주워 담아 2회 차에 매듭을 지었다. 자신이 회귀한 이유가 없다는 게 그 어떤 것보다 행복하게 느껴질 것이다.

조금 어울리지 않는 예일 수도 있겠지만 김현성은 현재 자아 찾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저 살아남아야만 했던 1회 차,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해결해야 했던 2회 차가 끝나고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평범한 삶을 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자신이 평범해질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고… 사실 이룰 수 있는 것도 없다.

녀석은 가장 잘나가는 길드의 길드마스터였고, 강함으로 따지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으니까.

무언가를 자신의 손으로 이루고 싶다는 향상심이 없어졌다는 거다. 기껏해야 자신의 짐을 떠안은 형제의 평안을 바라는 거겠지. 뭐.

매일 입고 다녔던 갑옷은 김현성의 개인 창고에 처박힌 지 오래, 사실 필요하지도 않다. 검만 들고 다녀도 김현성을 위협할 만한 게 없을 테니까.

무거운 복장보다는 평범하고 편리한 복장을 입고 다녔고….

“오늘 하루는 어떠셨습니까?”

이쪽에 필요 이상으로 달라붙어 오기도 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요.”

“괜찮은 식당을 알아봤습니다. 함께 밖으로 나가시는 게….”

“오늘은 여기서 먹고 싶습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

“…….”

“후우….”

일단은 한숨으로 시작.

아무 생각없었던 김현성의 표정에 조금 금이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겠지. 사람이라면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 정도는 금방 느끼고 있을 것이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거나, 아니면 고민거리가 있다거나, 어쩌면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는지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웃으며 따뜻하게 대해줬던 엔젤기영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무슨 짓을 해도 모든 걸 포용하고 받아줬던 이기영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사람 하나.

“저, 기영 씨. 오늘 경매장에서 굉장히 희귀한 물건을 구해왔습니다. 기영 씨가 기다리시던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아니지만 루이구찌라는 가죽세공 장인이 만든….”

“…….”

“죄송합니다. 요즘에는 매물이 통 나오지 않는 모양이라….”

‘정신 나가기는 했어.’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최근에 매물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근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확신이 든다고. 시바.

“후우….”

“…….”

“…….”

한숨 한 번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그리고 쓰로누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 방금….”

“네.”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재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기영 씨가 원하는 선까지는….”

“…….”

“…….”

“하아….”

이쯤 되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눈치야 이미 진즉에 보고 있었다.

빌드업은 딱 여기까지.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이다.

“현성 씨. 길드에서 논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너. 시바 왜 일 안 해.’

참다 참다 폭발한 사람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가방을 한 손으로 타악 쳐낸다.

묵직한 가죽가방이 툭 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왠지 모르게 드라마틱하게 떨어진 것만 같다.

“이 가방은 또 무슨 돈으로 사 오신 건데요?”

‘네가 돈이 어디 있어.’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너 이 새끼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혼잣말.

“지긋지긋해.”

작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길드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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