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76화 (86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76화

시나리오의 끝 (9)

그리고….

천천히 하늘이 열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거대한 빛이 대지를 가득 채운다.

시스템이 알타누스의 의지를 존중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녀석은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놈은 그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다. 무엇이 법칙에 더 어울리는지, 어떤 게 만들어진 세계에 가장 이상적이고 덜 해로운지.

알타누스의 유산이나 의지는 개뿔 관심도 없겠지. 내가 내린 퀘스트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녀석의 관심사는 하나다. 충돌하는 오류를 수정하는 것 딱 하나.

“타협이야. 공존이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야.”

사실 타협이고 공존이고 개소리지만 놈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배짱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버그와 오류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되돌려 달라는 거지. 받아들이라는 거야. 여기가 개판 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인체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다름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해로운 바이러스는 아니야.

공존할 수 있는 바이러스라고 네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는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어.

오히려 인체를 더 강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라니까. 면역력은 더 높아지고 더 안정적으로 이걸 관리할 수 있어. 그러니까 함께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응?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니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회귀자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0/1)]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4,397)]

제발 받아들여. 나쁜 거래는 아닐 테니까.

[퀘스트 클리어 보상-미래(0/5,132)]

“일어나라… 흐으으윽… 흐윽… 하으윽….”

눈물 한 번 쏟아주고….

“흐으으윽… 흐으으으으윽….”

성스러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거. 이 장면 중요해. 그렇지?

“일어나라… 노을빛의 검사여. 그리하면… 흐윽…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반응은 즉각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놈은 시스템이었으니까.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가 오히려 더 쉽다.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정말로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겠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떨어지는 빛이 눈에 보였으니까. 김현성이 있던 곳으로 말이다.

다시 한번 시야가 뒤바뀐다.

뭐야.

빛 안으로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풍경이 뒤바뀐다. 바닥에 닿은 왼쪽 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풍경이 변화는 광경은 이질적이지만 아름답게 느껴졌다.

박덕구도 정하얀도 다른 이들도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나 내 정신이 또 가출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졌으니까. 지금 이 공간이 정확히 뭔지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아마….

“피드백이 온 거네.”

피드백이 온 거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 않을까. 모든 게 흰색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 미로 같은 벽에 둘러싸여 있다.

혹시 사후세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생생했다.

“좀 주려면 편하게 가져다주든가. 아니면….”

허락해 주지 않는 거일 수도 있지. 그래도… 퀘스트는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는 중이야… 누나와 베니고어가 뒤처리를 해줄 테니까. 아직 여유는 있어.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향하는지, 이 미로 같은 백색의 공간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알타누스의 유산이 마련한 장소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그런지 생각이 많아진다. 시스템이 나를 버그로 인식해 격리한 장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섣부르게 움직이는 게 독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주사위를 던지기 적절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만큼 절박했으니까.

도박을 싫어하는 것치고는 꽤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벽면에 화살표를 남긴다.

‘목이 마르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아. 최소한 적대적이지는 않다는 거지.’

행복회로를 돌리려면 이렇게 돌려야 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현세에는 아직도 내가 남아 있나? 정신만 이곳으로 온 건지 궁금한데.

명색이 희생과 부활의 신이잖아. 갑자기 사라져도 되나 몰라.

희생과 부활의 신이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사라진다는 기믹을 넣고 싶지는 않은데. 조금 이상해 보이잖아.

빛과 함께 부활하는 거지. 모습을 감추면… 조금… 멋없어 보이지.

어디에선가 질질 짜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흐윽….”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흐으윽….”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한번 발을 내디딘다.

“김현성?”

“흐윽… 흐으윽….”

“아주 지랄을 해요. 지랄을 해. 또 질질 짜고 있어?”

“흐윽….”

“징하다. 진짜.”

계속해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울음소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는 줄어든다.

질질 짜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 공간 어딘가에 김현성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계속해서 이곳을 돌아다니는 게 내 마지막일 수도 있고, 정말로 시스템이 나한테 벌을 내린 걸 수도 있겠네. 버그로 규정당했나 봐.

여기서 계속해서 김현성 질질 짜는 소리나 들으면서 미로 탐험하라는 형벌이야? 아주 좋네. 극적인 신화니까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긴 하겠어.

“흐어엉… 흐으윽….”

그렇게 몸을 움직인다.

사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간 감각이 없었으니까. 계속해서 같은 공간을 맴도는 것 같아. 벽면에 새겨진 화살표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난 거지?”

어느 시점부터는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되돌아갈 방법을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곳과 저곳의 시간관념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곳에서의 며칠이 저곳에서는 찰나일 수도 있지. 김현성의 머릿속 안에서도 비슷했지.

적어도 일주일은 지났을 것이다. 아니, 한 달일 수도 있고 반년일 수도 있어. 그래도….

‘조금 더 여유를 가지자.’

“흐윽….”

다시 한번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작정,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이내 발을 멈춘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천천히 벽을 매만진 이후에 입을 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여기 있었네.”

“…….”

“여기 있었구나?”

“…….”

“거기 기어들어 가 있었어? 어떻게 거기로 기어들어 간 거야? 모양을 보면 안쪽에서 막아놓은 것 같은데…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생각하지 마. 입 틀어막아도 소용없어 이 새끼야. 언제부터 숨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알고 온 거니까.”

“누구… 누구세요? 누구세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현성이 맞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앳된 목소리였지만 벽 뒤에 숨어 있는 이가 김현성이라는 확신이 든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니까 조금 섭섭하기는 해. 기억을 잃은 건가. 아니면 무의식인 건가.

진짜 김현성이 아닐 수도 있지만 뭐가 어찌 됐든 녀석을 밖으로 꺼내는 게 맞겠지. 그것 때문에 온 거니까.

“밖으로 나와.”

“…….”

“뭐해? 밖으로 나오라고.”

“싫… 싫어요.”

‘이 씨발 새끼.’

“밖으로 튀어나와. 이 새끼야.”

“싫어요. 나가지 않을 거예요.”

“답답하게 하지 말고 나와. 김현성. 이 벽 부숴 버리기 전에.”

사실 부수지는 못해.

“누구세요.”

“그게 중요해?”

“누, 누구신데 제 이름을 알고 계신 건가요? 혹시 당신이 저를 여기에 가둔 건가요?”

“네가 스스로 처박혀 있는 거잖아.”

“그런 뜻이 아니라… 여기 벽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이곳에 저를 가둔 거냐고요.”

“시바. 퍽이나 내가 너를 여기에 가뒀겠다.”

“그, 그럼 형도 여기 갇히신 건가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계신 건가요? 도대체…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제발 꿈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무슨 인체실험 같은 걸 당하고 있는 건가 봐요. 아니면… 혹시 뭐 알고 계신 게 있나요? 형도 여기로 끌려온 거예요?”

“…….”

“저… 갑자기 이곳으로… 잠깐 정신을 잃었더니 여기에 와 있었어요. 혹시 핸드폰은 가지고 계신가요? 경찰은… 여기는 어딘가요? 형이….”

“그게 중요하냐고.”

“…….”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어째서 네 이름을 알고 있는지. 그게 중요한가 봐? 중요한 건 우리가 여기에서 나가야 된다는 거야. 그 벽에 처박혀서 궁상떨고 있을 게 아니라 뭐가 어찌 됐든 간에 행동해야 된다는 거라고. 의문을 가지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행동해야지. 안 그래?”

“여긴 안전해요.”

“내가 있는 곳도 안전해.”

“…….”

“무,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

“…….”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

“설명하기 어려워요.”

“뭐가?”

“바깥에 뭐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형이 정말로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여기는 안전해요. 최소한 죽을 위험은 없다고요. 그렇잖아요. 바깥은 위험해요.”

“…….”

“어째서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요?”

“똑같은 말 하게 만들지 마. 현성아.”

“형은 착한 사람인가요?”

‘이 답답한 새끼 시바. 그딴 걸 왜 물어봐.’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1회 차 튜토리얼의 김현성인가 봐.’

22살의 김현성이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정확히 상황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벽 너머에 있는 것은 그때의 김현성일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튜토리얼 던전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참 그렇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직접 녀석을 마주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연출도 좋아. 참.’

자기 스스로 이곳에 들어와서 여기 처박혀 있던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저기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네.

본래에 인격이 소멸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녀석을 꺼내온다고 하더라도 그게 김현성이 맞을지….

알타누스의 유산의 페널티를 받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아마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스템이 합의서에 서명하고 알타누스가 내게 기회를 준 것이 맞다면 일 처리를 개뼈다귀처럼 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냥 장치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김현성이 퀘스트 보상을 받을지에 대해 확인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아마 이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지 않을까.

김현성이 퀘스트 보상을 원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가장 처음에 이곳에 도착한 녀석에게 물음표를 던져 보자 이거지.

‘거절할 리가 있겠어?’

“배고프네.”

“…….”

“…….”

“배고파.”

“…….”

“…….”

“배고프다.”

“아….”

“정말로 배고프다… 목도 마르고….”

벽 밑으로 손이 튀어나온다. 검이라고는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손, 지금의 김현성의 손과는 다르다.

굳은살도 없고 흉터도 없다. 정말로 험한 일은 한 번도 한 것 같지 않은 손이다. 팔목도 조금 가느다란 느낌이라 정말로 김현성이 맞을까 하는 착각을 하게 할 정도.

머뭇거리는 것 같은 손짓은 녀석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다.

벽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응.”

“빵… 드실래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