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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73화 (86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73화

시나리오의 끝 (6)

“지랄하지 마! 이 개새끼야!”

‘이게 맞아. 이게 정답이야.’

“웃기지 마! 이 개새끼! 맞기는 뭐가 맞아! 도대체 뭐가 맞다는 거야… 제기랄… 도대체… 뭐가 정답이라는 거야….”

녀석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녀석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지다 흐릿해진다.

저건 도대체 뭐야. 넌 도대체 뭐냐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는 모습은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정신을 부여잡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녀석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네가 원한 거였어?

“이 꼴 보자고 기억에 손을 댄 거였어?”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정신은 또렷하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계속해서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빛이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는다.

억지로 주먹을 쥔다. 어떻게든 뇌로 공기를 내보내기 위해 호흡을 크게 들이마신다.

들이마시고 내뱉고를 계속해서 반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후우… 후우….”

내 잘못인 거야?

“후우… 하아…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어디서부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아… 후우… 후우….”

금방 괜찮아질 거야. 금방… 금방 괜찮아질 거야.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아질 거야. 별거 아니야. 아직 내 손을 벗어나지 않았어.

전부 다 되돌릴 수 있어. 매번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아. 아직 패는 많아.

정 안 되면 다음 회차로 나가면 돼. 일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그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선택지가 있으니까. 보험은 있는 거야. 그러니까 초조해하지 마.

“하아….”

평소처럼 사고할 수 있는 상태가 됐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직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억지로라도 떠올려야 한다.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현재의 상황을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퍼즐이 잘못 맞춰진 건지 생각을 해봐야 했다. 엎어지는 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감정들을 쳐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은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후우….”

저 개새끼 손에 놀아난 건가.

내 안에 1회 차 이기영의 잔존사념이 있을 수도 있단 가설은 꽤 오래전부터 세워왔던 것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 번의 전조현상이 있었으니까.

그게 블러핑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내 착각일 가능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걸 꾸민 일이 1회 차의 이기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1회 차의 이기영의 목적이 김현성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모든 게 완벽한 극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보다 더 완벽한 복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무엇보다 잔인한 복수의 완성이었으니까.

김현성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며, 마지막의 순간에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게 만드는 것.

대륙에 김현성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녀석의 희생으로써 모든 것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것.

정말로 행복했던 순간을 안겨주고, 종국에는 그것을 빼앗아버리는 것.

살아가고 싶다는 감정을 선물해 주고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

아주 완벽한 스토리텔링이었다.

“그래. 시발, 아주 완벽한 이야기였어.”

김현성은 웃으며 사라졌지만 마지막 순간에 녀석이 정말로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많은 감정이 거세당한 1회 차와는 달랐으니까.

2회 차의 녀석은 살고 싶어 했다. 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 싶어 했고, 일상을 얻고 싶어 했다. 취미나 관심 있는 일들도 많이 생겼고 그것들을 누리고 싶어 했다.

놈의 말처럼 무서웠을 것이다. 두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네가 아니야. 쓰레기 새끼야. 나는 빛의 아들이라고. 개자식.”

네가 무슨 일을 꾸미고, 뭘 하든 간에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이죽거리지 마. 모든 게 끝났다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지 마.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시작이야.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거라고….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이미지들이 떠오르지만, 녀석이 뭘 보여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구태여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굳이 떠오르려고 하지 않았다. 1회 차의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거 하나다.

김현성이 내 거라는 거.

“내 걸 건드리면 다 뒈지는 거야. 알아들어? 이 쥐새끼야. 너는 네가 한 짓을 후회하게 될 거야. 네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내 머릿속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필코 찾아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거야.”

‘나는 너야.’

“지랄하네. 네가 무슨 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관심 없지만 전부 다 필요 없게 되겠네. 븅신 새끼. 네가 한 짓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나는 새로 시작할 거야. 네 헛짓거리는 전부 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는 거라고.”

‘소용없을 텐데.’

“소용없는 게 어디 있어?”

‘3회 차는 없어.’

“엿이나 먹어.”

‘김현성의 존재는 지워졌을 텐데… 3회 차가 시작돼도 김현성은 없을 거야. 노을빛의 검사는 죽은 게 아니야. 신격을 얻은 그가 느껴지기는 해?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내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자기 위로 하는 걸 보니 비참해. 불쌍한 새끼.’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여전히 이죽거리는 놈의 모습을 보고 손이 떨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정보가 부족하다. 떠올리는 게 가장 중요해. 어떤 방법으로 한 거지. 녀석은 뭘 알고 있지. 놈이 알고 나는 모르는 게 도대체 뭐지.

‘펜던트. 우리가 넘긴 거잖아. 안 그래?’

“우리라고 하지 마. 이 씨발 새끼야! 나는 동의한 적 없어. 씨발! 나는 동의한 적 없다고! 개새끼야! 내가 이딴 걸 동의해? 내가?”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은데….’

“나는 이딴 거. 동의 한 적 없어. 이 쳐 죽일 새끼야!!”

‘아니야. 알타누스의 유산을 넘기기로 한 건 우리 의견이 일치한 게 맞아.’

머릿속에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울 호수에서 있었던 일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알타누스의 유산을 받고 기뻐하던 김현성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소 짓고 있는 내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이후에 함께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기억들도 머릿속에 맴돈다.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네?’

‘차원의 바다에서 구한 아이템….’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현성 씨가 아니면 쓸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드린 것도 아니니….’

‘그래도 넘겨주신 펜던트는 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가 좋다고 쳐 받고 웃고 있었어 이 멍청한 새끼야.

“그게 뭐 그렇게 기분 좋다고 웃고 있었냐고. 이 뒤통수 맞을 새끼야….”

점점 손이 떨린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김현성은 나를 의심하지 않은 걸까. 아니, 의심하지 않을 만도 해. 김현성은 페널티에 대해 내가 모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저 좋은 선물을 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네가 선택한 거야.’

“아냐. 나는 선택한 적 없어.”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김현성을 지키려고 했어. 그래서 펜던트에 대한 기억을 지웠던 거야.

김현성이 펜던트에 대해 떠오르게 하지 못하도록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놈의 기억까지 봉인한 거야.

혹시나 내가 필요로 하는 일이 없도록… 만약에 필요한 상황이 닥쳐와도 사용할 일이 없도록 스스로 묶어 놓은 거라고.

내 기억까지 손을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블러핑의 블러핑을 일삼아 가며 개짓거리를 계속해서 했던 것 역시, 이 기억을 손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파란 길드원들이 펜던트를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 또한 루시퍼와의 계약을 이행한 이유였을 것이다.

내기의 내용은 김현성이 나를 찌를지 말지가 아니라 살릴지 말지에 대한 것.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시퍼 님.’

‘맞는 말이네요.’

‘펜던트를 사용해야 할지 말지는 노을빛의 검의 선택에 달려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동의해요.’

나와 그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머리를 부여잡았다. 유리 조각들이 뇌에 박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내가 김현성에게 펜던트를 주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떠오르는 것이 없다. 1회 차 이기영의 영향을 받은 건가. 잠깐 동안 1회 차 이기영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건가.

‘아닐걸.’

“입 닥쳐….”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내가 놈에게 펜던트를 넘긴 것일 수도 있어. 보험으로 쓰려고, 나중에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언젠가는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생각해 봐. 사람 하나를 갈아 넣고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유산인데. 이것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

“입 다물어….”

‘우린 원래 그렇잖아. 모든 걸 이용하는 사람이잖아.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계산기를 두드려봐.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유산이야. 가지지 않는 게 바보 같은 행동처럼 느껴지지 않아? 내가 아니라 네가 펜던트를 건넸다고 가정해 봐. 네 스스로가 어떤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을지 가정해 보라고. 장담하건대 나는 후자에 걸게. 너도 나니까. 우리 생각은 우리가 제일 잘 알지.’

“나는 내 걸 버린 적이 없어. 멍청한 새끼.”

‘그래서 뒤늦게 수습했나 보네. 그렇지 않아? 쓸데없는 짓거리까지 하면서… 그렇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현성이 네게 더 소중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김현성과 더 가까워졌으니까. 네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네 공간을 내어줬으니까. 쓰고 버릴 패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그래서 없었던 일로 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지.’

“…….”

‘사람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니까.’

“…….”

천천히 몸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계속해서 하늘에서 떨어지던 빛도 어느새 사그라든다.

내 몸을 감싸던 빛 역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춘다. 다리에 힘이 없었는지 몸이 저절로 주저앉는다.

다른 이들이 깜짝 놀라 다가오는 것이 보였지만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내 몸을 만지는 누군가의 손이 보여 녀석의 손을 팔로 쳐낸다.

구역질이 나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헛구역질이 나온다. 온 얼굴이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시끄러운 환호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웨에에엑….”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꺼져… 제기랄….”

“…….”

“…….”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떠올리게 된다.

“씨이발….”

계속해서 녀석을 떠올리게 된다.

“흐윽… 씨이발… 씨이바알….”

기어가듯이 몸을 움직여. 놈이 있었던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무언가를 붙잡아 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아. 바닥을 꽉 쥐었다.

“…….”

계속해서, 계속해서 녀석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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