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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71화 (86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71화

시나리오의 끝 (4)

‘얘가 왜 이렇게 진지해.’

물론 김현성이 진지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평소보다 더 굳게 마음을 먹은 듯한 얼굴이 신경 쓰인다.

‘뭐, 진지하면 좋은 거지. 더 몰입 되자너.’

노을빛의 날개를 활짝 편 채로 눈앞에 있는 거대한 빌런을 바라보고 있자니 확실히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하기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의 입장에서도 이번만큼은 일을 망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있겠지.

평소보다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건 파란 길드원들이 함께 만들어준 기회였으니까.

투자한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파란 길드는 무적이 아니다.

계속해서 마력을 충전할 수 있는 정하얀과는 다르게 다른 길드원들이 쓸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엘레나와 선희영의 신성력에게도 한계가 있었고, 황정연의 마력은 물론이거니와 전위들의 체력적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녹초 상태가 되어버린 이들이 눈에 띈다. 몸 곳곳에는 아직 신성력으로 치료하지 못한 상처들이 있었고 장비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를 상대로 여기까지 김현성을 끌고 왔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옳다.

‘임무가 여기서 끝난 것도 아니잖아.’

파티의 목적은 최대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 김현성이 안전한 환경에서 싸울 수 있도록 최대한 그를 보조하는 것.

김현성의 싸움만 험난한 것이 아니라는 거다.

길드원들은 방진을 펼친 채로 곧바로 다음 전투에 대비한다. 적 진영 한가운데에 포위된 채로 전투를 이어나가는 것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들조차 선호하지 않는다.

파란도 예외는 아니다. 조혜진의 특기는 봉쇄당할 것이고, 작은 손으로 후위들을 모두 보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선희영과 황정연이 근접장비를 착용하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리라.

“형씨. 다녀오슈.”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드마스터.”

“힘내. 오빠.”

“길드마스터.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왕!”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김현성을 배웅한다. 심지어 흰둥이마저 말이다.

녀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한번 날개를 활짝 펼쳤다.

송수경이 뭐라고 지껄이고는 있지만 녀석은 동요하지 않는다. 목적이 명확했으니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김현성이 튀어나가기가 무섭게 파티원들은 전투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파란 길드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싸움에서 물러서는 사람은 없다.

여기저기에서 폭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빛의 아들을 외치는 목소리와 노을빛의 신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린다. 사제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환한 빛을 내 뿜는 노을빛의 검사를 바라본다.

아마 용기를 얻고 있을 것이다.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고 있을 것이다.

희망을 얻고 있을 것이다.

김현성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녀석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다.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표정과 행동은 저절로 녀석을 따르게 만들거나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송수경이 김현성에게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핀트는 조금 다르겠지만 김현성은….

‘넌 진짜 영웅이야.’

김현성은 영웅이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이상적이고 멋진 영웅. 시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을빛의 검사와 빛의 아들의 영혼을 삼킨 송수경이 부딪친다.

김현성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을빛이 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불그스름한 빛이 계속해서 공간을 메우고 있는 모습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풍경은 나쁘지 않네.’

거대한 촉수가 날아 들어오지만 김현성은 신경 쓰지 않는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정하얀의 마법에 튕겨 나간 촉수는 그대로 힘을 잃는다.

-기영 씨.

어?

-감사합니다.

뭐야? 갑자기….

-정말로… 제가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아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긴 알아서 다행이네.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게 조금 많아. 그래도 지금 돌려받으려고 하는 거자너. 기특하기도 해.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계속해서 전하고 있는 거야? 혹시 형 들으라고? 이거 지금 안 들려야 되는데. 답장 못 해도 이해해.

김현성은 검을 휘두른다. 수십 갈래의 빛줄기가 검에서 뻗어 나가고 붉은 악마의 몸에 깊숙이 틀어박힌다.

-여러 가지로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에 대륙에 왔을 때와 지금을 생각해 보면 달라진 게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기영 씨도 한 번 언급하셨지만 그때의 저는….

그래. 그렇기는 했어.

-그때의 저는 제가 어째서 회귀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하거나 제 처지에 대해 원망밖에는…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었습니다. 기영 씨도 아시다시피 저는 조금 멍청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아냐,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아. 너무 자책하는 것도 안 좋아.

-기영 씨는 제가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람입니다. 이곳도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이에요. 관점을 바꾸니 많은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항상 짜증 나게 느껴졌던 원정이나 던전 탐사. 쓸데없는 회의나 훈련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즐거워졌어요. 취미가 생겼습니다. 수집하고 싶은 것도 생겼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래. 그래. 다 들었던 이야기잖아.

-거울 호수에서의 낚시, 경매장을 들락거리는 것도 좋은 활력소가 됐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내 선물 때문이 아니라 네 스트레스 풀려고 했다는 거지?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바라보거나, 좋은 곳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시는 것, 신문을 읽거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 사소하지만 문자를 보내거나 길드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든 게 즐거워졌어요.

그래.

-제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함께 싸우는 동료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에요.

자꾸 그렇게 띄워주니까 부끄럽네. 내가 사실 많은 걸 해주기는 했어. 네가 조금 과장하고 있기도 한데….

사실 그래. 내가 조금 대단하기는 해. 단단히 얼어붙은 회귀자의 마음을 아주 사르르 녹여 버렸자너.

근데 이 모든 게 개고생은 아니더라고. 나도 너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꽤 재미있었던 것 같아.

조금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김현성은 여전히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공중으로 치솟는 모습이 보인다.

순간적으로 표적이 된 김현성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것들이 쏟아졌지만 김현성은 몸을 비틀어 피하거나 검을 휘두른다.

영혼을 삼킨 버전의 송수경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 녀석은 다시 한번 공중에서 검을 부여잡고 악마를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기영 씨 덕분입니다. 네… 모든 게 기영 씨 덕분이에요.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제기랄!”

아, 그러고 보니 쟤랑도 연결되어 있었지.

나처럼 모든 걸 정확히 받을 수는 없었겠지만 아마 송수경은 김현성이 내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저렇게 흥분하고 있는 거지.

계속해서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이야기까지 전부 풀어나가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솔직히 나도 재미있기는 하다.

우리는 유대감으로 똘똘 뭉쳤으니까. 이런 게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거겠지.

-감사한 만큼 죄송한 마음도 큽니다. 제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제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이런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기영 씨가 저를 생각했던 것만큼 저는 기영 씨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새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 수도 있겠네요.

아주 별별 이야기를 다 해.

-제가 받은 걸 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어서 죄송했습니다. 기영 씨가 가방을 수집하는 취미가 없었더라면 아마 조금 더 마음의 짐을….

아니, 시바 나 그런 취미 없다니까.

-모든 게 기영 씨 덕분입니다. 기영 씨는 저를 바꿨어요. 저는 희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남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기영 씨에게 배운 걸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저는 당신을 보고 여러 가지를 느끼고 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원망스러워요. 왜 당신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어째서 당신이어야 하는지, 어째서 기영 씨가 이렇게 대륙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어째서 당신이 이 장소를, 그리고 이들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현성의 얼굴과 몸을 스치는 촉수들이 보인다. 최대한 빠르게. 녀석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듯이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고 계속해서 빛을 흩날린다.

많은 이들이 녀석을 바라본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노을빛의 신을 바라본다.

큰 목소리로 떠드는 악마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는다. 녀석 역시 조용히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누려야 하는 게 기영 씨라는 사실도요. 제가 아니라 기영 씨야말로 이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받은 모든 걸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아주 좋은 태도야. 그런 자세가 좋더라.

-무섭습니다.

뭐가.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무서워요.

뭐가 무서운데. 정확히 이야기 해야 알아들을 수 있어요.

-차라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제가 할 수 없게 될 일들이, 제가 원하는 걸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무서워요.

왜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면 되는데. 이거 끝나면 우리 고생 끝 행복 시작이야.

-저는 기영 씨와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는 대륙을 위해 희생할 수는 없지만 제게 많은 것을 선물한 기영 씨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기영 씨가 이 장소를,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심정과 비슷할 겁니다. 덜 숭고하지만 제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에요.

그래. 희생 좋은 말이야. 평생 헌신하라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붉은색의 악마와 몸을 부딪친 놈의 얼굴이 비쳤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전형적인 기합 소리도 들려온다.

마치 세상이 환하게 빛나는 것만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김현성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인다.

악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은 녀석은… 검을 그대로 놓은 이후에 내게 손을 뻗는다.

‘좋아.’

계속해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촉수들을 억지로 떼어낸다.

“…….”

“나는… 나는 그저….”

“…….”

허겁지겁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지 오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무척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

“말주변이 없어서 너무 죄송합니다.”

아, 진짜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

“끝까지 저를 지켜주시려고 해주셔서… 너무… 너무….”

무슨 소리야 그건 또.

김현성은 미소 지었다.

“안녕히.”

목에 걸린 펜던트를 꽉 쥐며.

‘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안녕히….”

‘어….’

“언젠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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