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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4화 (85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4화

마지막 (97)

그것은 마치 세계의 종말을 놓고 싸우는 신화 속의 전쟁처럼 보였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신념을 위해 싸우기보다는 한계에 내몰린 이들의 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것보다 더 숭고하고, 뭐라 설명하지 못할 감정을 느끼게 했다.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위를 올려다보는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숨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노을빛의 검사를 응원하는 이들과 기도를 드리는 사제들,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꽉 차 있었다.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저 역시 완전해질 수 있어요. 빛의 아들의 영혼을 제 것으로 만들 겁니다. 그의 영혼을 취하고 그도 저도 아닌 존재로 새로 태어날 겁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요. 이제는 정말로 완전해질 겁니다.

-…….

-당신도 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에는 제가 옳았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실 거란 말입니다.

마침내 빛의 아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빛의 아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참혹했다.

그의 육신을 욕보이는 것으로 모자라 영혼까지 취하려고 하는 붉은빛의 악마는 지금까지 대륙이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 잔인하고 비열하고 기괴했으며 정체 모를 두려움까지 느끼게 했다.

저 자리에 자신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빛의 아들이시여.”

“제발 신이시여. 저희의 목소리가 닿는다면 빛의 아들과 노을빛의 검사를 구원해 주소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빛의 아들을 지키지 못한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압니다. 염치없이 다시 한번 기도드리건대 제발 그들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십시오.”

“빛의 아들을 구원해 주세요. 신님. 평생을 대륙을 위해 희생하신 그분을 또다시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베니고어시여….”

“엘룬이시여. 저들에게 작은 힘을 보태주십시오. 제발….”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륙의 최남단에 속해 있는 이곳에서도 그들을 신전에 모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선 한 인형 역시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는 게 눈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과 뒤섞여 손을 모으고 있지만 입술을 꽉 깨문 모습은 이 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진지해 보인다.

“제발 형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제발….”

“…….”

“…….”

결국에는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으니까.

“라파엘 괜찮아?”

“…….”

“응. 마리엔. 괜찮아.”

“역시… 걱정되는 거지?”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누구보다 빛의 아들을, 교국의 명예추기경을 따르던 것이 바로 라파엘이었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말을 받은 것은 같은 파티로 활동하는 이주혁이었다.

“주혁아.”

“의미 없는 질문이다. 마리엔. 정말로… 의미 없는 질문이야.”

그 말이 맞다.

친형으로 따르는 사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사람.

교국의 명예추기경은 파티의 리더인 라파엘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살아 있는 신앙 그 자체였으며 평생을 대륙을 위해 희생한 성인. 그것 이상의 의미를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고 싶겠지.”

“주혁아.”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을 거다. 녀석은 그런 놈이니까.”

‘얘는 가끔 이상하게… 분위기 잡으면서… 부끄러워지는 말을 한다니까.’

벽에 팔짱을 낀 채로 말하는 모양새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주혁이 이런 사람이라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빛의 아들은 녀석을 구원한 사람이다.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매번 말이다. 명예추기경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도, 그의 정신이 무너졌을 때도, 그가 자신을 내버리고 스스로를 희생했을 때도, 자신의 희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도, 라파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러니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거다. 마리엔. 상상이 가나. 녀석이 어떤 심정일지. 얼마나 비참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지.”

“…….”

“최소한 저 노을빛의 검사는 그를 구하려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있으니 상황이 나은 편이다. 라파엘은 이 곳에서….”

“주혁아. 말이 조금….”

“나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야.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다. 아마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울 거야. 여기서 기도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차라리 물어보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군.”

“우리는 기도드리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야. 알고 있잖아. 우리가 맡은 임무가 뭔지. 카스가노 님은 이곳을….”

“그래. 예상하지 못한 적이 침입한다는 건 알고 있다. 매번 귀 아프게 듣던 이야기였으니까. 이 사태를 막을 파티가 기껏해야 우리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느낄 공허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라파엘. 너는 정말로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냐.”

“그만해! 이주혁!”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라파엘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괜찮아. 마리엔.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돼.”

“이주혁.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거 알고 있잖아. 우리가 간다고 해서 변하는 게 없을 거라는 것도 이미 전해 듣지 않았어? 우리는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티야. 이지혜 님께서도….”

“어차피 노을빛의 검사가 무너진다면 대륙에 희망은 없어. 저 악마가 정말로 빛의 아들의 영혼을 먹어 치운다면 아마 가장 상상하기 싫은 사태가 벌어질 거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어?”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뿐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건 내가 아니라 멍청하게 기도나 하고 있는 녀석에게 물어봐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파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떨리는 팔이 보인다.

왜 자신을 바라보냐는 얼굴로 반문하고 있었지만 꽉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주혁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장내를 뒤덮은 이후, 이윽고 라파엘은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

“가고 싶어.”

“…….”

“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라. 방해가 될지도 모르고 또 멍청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형을 구하고 싶어. 하지만….”

“그럼 가.”

“…….”

“그럼 가면 돼.”

“하지만.”

“이곳은 내게 맡겨라.”

“이주혁.”

거대한 소리가 들려온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붉은빛의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투 준비!”

“…….”

“전투를 준비하라!!”

기도를 드리던 사제들과 인파들이 순식간에 혼비백산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전란에 휩싸인 도시에 붉은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들이 쏟아져 내린다.

“움직이자….”

“넌 아니야. 라파엘.”

“…….”

“이곳은 내가 맡는다.”

‘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카스가노 유노 님의 연락입니다. 라파엘 님. 이곳에서.”

“아니. 이곳은 내가 맡는다고 말했다.”

“네임드 개체. 출현. 네임드 개체 출현! 전원 전투 준비!”

거대한 붉은 식물을 다루고 있는 천사가 눈에 띈다. 라파엘이 검을 들기도 전에 사냥개가 몸을 날렸다.

무모한 싸움일 것이다. 이주혁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파티의 사냥개는 가끔 상상 이상의 힘을 보여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벽을 뛰어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이를 악물며 달려드는 모습에 파티원들이 호응한다.

유효타를 맞고 벽에 처박히는 모습이 보였지만 손으로 이곳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처절한 싸움이다. 언제나 이주혁의 전투는 외줄을 타는 것처럼 처절했지만 항상 보던 것보다 더 처절하게 느껴졌다.

쓰러져 발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킨다. 날개에 매달려 목에 검을 쑤셔 박으며 피투성이가 된다. 검을 놓치자 그대로 목을 물어뜯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마리엔 움직여야겠어. 지원을….”

“아니야. 라파엘.”

“뭐?”

“네가 싸워야 할 장소는 이곳이 아니야… 가서 싸워. 빛의 아들을 구해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네가 들어줘. 너는 성검의 선택을 받은 용사잖아. 사람들의 염원을 들어주는 것도 용사가 해야 할 일이야. 우리 파티는 그렇게 만들어졌잖아. 여기는 우리들만으로 어떻게든 해볼 거야.”

“하지만.”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네임드 개체가 바닥에 떨어진다.

“어….”

라파엘은 검을 들어 올렸지만 천사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넝마가 된 네임드 개체의 뒤로 사냥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약하지 않아.”

“…….”

“나는 약하지 않다고. 라파엘.”

“…….”

몸이 성하지 않다. 이주혁의 몸에 생긴 상처는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는 듯, 정말로 네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라이오스로 가면 돼. 라파엘.”

“…….”

“라이오스에 정하얀 님이 계실 거야. 사정을 설명드리고 같이 향한다면 충분히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어. 아직까지는 메인이벤트를 막는 중이시겠지만 네가 갈 때 즈음에는 아마 이벤트를 클리어하실 거야. 시간이 없어. 지금 가야 돼.”

“…….”

“정말로 괜찮겠어? 모두들.”

“나는 네놈이 걱정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라파엘. 나는 네가 걱정해야 될 사람이 아니라 네 라이벌이다.”

‘라… 라이벌….’

아마 이주혁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파티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건네는 게 보인다.

이윽고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는 조용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야. 라파엘. 나는 기적의 사제잖아. 기적의 사제 마리엔. 여기서도 분명히 기적이 일어날 거야. 분명히 말이야.”

파티의 리더가 없이 커다란 전투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무섭다.

아마 모두 자신과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어.’

나는 기적의 사제니까.

‘지켜낼 거야.’

라파엘 없이도 할 수 있어.

“라파엘… 만약 이번 일이 끝나면… 우리.”

“…….”

“…….”

“그래. 마리엔. 같이 형을 만나러 가자.”

“아… 응….”

괜찮아. 나는 기적의 사제니까.

“모두들 고마워.”

회색빛의 용사는 자신의 날개를 펼치며 적을 뚫어낸다.

“길을 뚫는 것은 내가 도와주지.”

파티의 마법사는 파티의 리더를 위해 주문을 외우고. 이주혁도 계속해서 천사들의 목을 베어낸다.

천천히 주문을 외운다. 몸 안에 있는 신성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되새긴다. 기적의 사제라고 불리게 된 순간을.

‘나는 기적의 사제야.’

온몸이 신성력으로 충만해진다.

평소보다 더 찬란하고 신성한 빛, 처음 기적을 일으켰을 때보다 더 강하고 따뜻한 빛.

신의 힘이 몸 안에 넘치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강신… 강림이야. 기적이… 기적이 일어난 거야.’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 선명한 목소리가.

[너희 진짜 제발 지랄 좀 하지 마.]

“네?”

[라고 빛의 아들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나의 딸이여.]

“네?”

[너희 진짜 제발 지랄 좀 하지 말라고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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