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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60화 (85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60화

마지막 (93)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이지혜가 김현성을 제거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지혜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김현성을 견제해 왔었고 알게 모르게 그것을 표현해 왔었으니까.

김현성이 우리의 적이 됐을 경우를 가정한 것도….

‘누나였지.’

그녀가 김현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요소는 많다.

대체 불가능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나를 넝마로 만들어 죽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누나나 나나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는 성격이잖아.

이유야 어찌 됐든 자신에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빌드를 준비해 놓은 것도 이해가 된다 이거야.

합리적이다 아니다를 따지기 전에 일단은 계속해서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감돈다.

지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제가 작업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

-물론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느끼고는 있지만 구태여 오빠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그럴 이유는 없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러 가지 수에 전부 대응하겠어요? 물론 김현성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저는 그것 이상으로 이기영이 중요해요. 오빠를 1순위에 놓고 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에요.

“…….”

-저는 상황을 이끌어갈 능력은 있지만 상황을 바꿀 능력은 없어요. 물론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네요. 몇 번을 봐도, 수십, 수백 번을 봐도 미래는 똑같았으니까. 한 가지 결론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겠죠.

‘이게 맞는 미래라는 결론?’

-이게 정답이에요. 오빠는 이 미래를 바꾸기 싫었기 때문에 기억을 지운 거라고요. 다른 미래로 향하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예요.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누나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정황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지혜의 입장이었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결단을 내렸을 테니까.

누나는 내가 변수를 배제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고 게임에 임했다.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의 미래가 김현성의 죽음이라면 그게 정답이라고 판단할 여지는 있다.

아마….

‘실제로도 그렇겠지.’

물론 이게 정답이라고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겠지만 보여지는 정황상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개연성도 들어맞지. 만약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김현성을 뒈지는 것에 주사위를 던질 리가 없을 테니까.

녀석이 한 번 세라핌의 검에 넝마가 되었을 때 약간 동요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래.’

이기영은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

-오빠 스스로도 오빠가 변수라고 생각했었던 거예요.

“그럴지도….”

-오빠 스스로도 오빠를 믿지 못했던 거예요. 평정심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거겠죠. 저도 그렇게 판단했어요. 자기가 설계한 미래를 망칠까 봐 결단을 내렸다고. 제 말이 틀려요? 저는 제 판단에 확신할 수 있는데.

“근데 누나는 왜 나한테 이걸 말해준 거야?”

-아까 말했잖아요. 오빠야 언젠가 알게 될 거고… 괜한 원망의 대상이 되기는 싫었거든요. 또 하나. 발버둥 쳐봤자 바뀌지 않을 미래라고 확신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너무 멀리 왔거든요. 지금 와서 브레이크를 밟거나 핸들을 돌린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미 코앞까지 왔다 이거지.’

-근데 오빠 반응을 보니까 괜히 이야기해 줬나 봐.

조용히 창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말을 잇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창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을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다.

‘자기 사람 아니라고 너무하네.’

아마 김현성의 포지션에 하연수가 있었다면 얼굴 벌겋게 붉히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을까.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마요. 다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정말로 오빠가 김현성을 죽이는 데 주사위를 던질 리는 없잖아요. 사실 저는 오빠가 보험을 들어 놨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오빠가 김현성한테 몹쓸 짓을 하고는 있지만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자신감 있게 주사위를 던진 걸 보면 뭐가 있기는 있는 거예요.

“그것도 맞아. 누나 말이 맞아. 내가 그걸 모르고 있어서 문제지. 보험이 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문제라고.”

물론 생각나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지혜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게 있을 정도로 가능성 높은 가설이 존재한다.

‘내기의 보상이 이기영의 부활이 아닐 수도 있어.’

김현성의 부활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내기의 내용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지도 모르지. 애초에 그렇잖아.

“김현성이 나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소리야?”

-네. 카스가노 유노가 본 광경은 김현성이 흩어지고 오빠가 눈을 뜨는 거였어요. 정황상 김현성이 오빠를 살렸다고 보는 게 맞겠죠?

내기의 내용은 김현성이 자신을 희생해 나를 살리느냐 살리지 않느냐일 수도 있지.

“지금 우리가 신성을 모으고 있는 이유는 이기영의 부활이 아니라 김현성의 부활일 수도 있겠네.”

-저는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겠어요. 그냥 오빠한테 맡길래. 이것저것 생각하기에는 너무 머리 아프거든요.

“아니야. 아마 맞을 거야. 그게 맞아. 그래야 말이 돼. 몇 가지 걸리는 게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확률이 높아. 만약 내 계획이 실패해도 루시퍼를 통해 김현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

-보험이라고 하기에는 위험하지만요. 어찌 됐건 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예요.

“최대한 많이 땡기는 거?”

-네. 최대한 많이 땡기는 거.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실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계속해서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지 않으면 초조함 때문에 침이 마른다.

‘이게 맞아.’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 노을빛의 신이 빛의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빛의 아들은 눈물 좀 흘려주면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거지.

어차피 노을빛의 신은 돌아올 테니까.

그런 기적이 또 어디 있겠어. 서사적으로도 완벽한 그림이고 어디 나무랄 데가 없잖아. 보험도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고….

근데, 시바 불안해. 이거 안 될 것 같은데. 정말로 안 될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

방법은 떠올리면 돼. 일이 터진 이후에 수습해도 늦지 않아.

조금만 더 심호흡하면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천천히 하나하나 경우의 수를 떠올려 보는 거야.

손이 덜덜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호흡이 계속해서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만 같다.

식은땀이 흐르고 기절할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을 부여잡기 힘들었지만, 천천히 눈을 매만지자 마음이 안정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버릴 리가 없어.’

옥이야 금이야 키워온 회귀자를 이렇게 버릴 리가 없다. 이렇게 내다 버릴 거였다면 애초부터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화 등급의 회귀자 사용설명서까지 얻은 마당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대륙에 온 이래로 얻은 것 중 절반, 그 이상을 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현성의 안전이 아니라 이기영 자신을 위해서라도 분명히 보험을 들어 놨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흡이 안정되는 것은 물론 천천히 미소가 지어진다. 평소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 뇌 안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이 헤집고 지나간다. 잠깐 동안 몽롱해질 정도로 말이다.

‘이제 조금 안정되자너.’

“준비된 것 같은데? 누나?”

-아, 그리고 아까 조건에 하나만 더 붙일게요. 아무래도 오빠는 나랑 같이 상담 한번 받으러 가는 게 좋겠네요.

“누나가 좀 필요한 것 같기는 해. 혼자 가기 부끄럽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전혀 부끄러워할 게 아니니까. 당연히 같이 가줄 수 있어. 누나.”

-…….

다시 한번 김현성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럼 일할 시간이네.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무감각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언뜻 보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장면이기는 하다. 우리 현성이가 인류의 적이 돼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니. 누가 봐도 조금 그렇잖아.

하지만 전후 사정이 있다고요. 대륙 여러분들. 이것 좀 보세요.

사실 여러 가지로 편집이 필요하기는 하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노을빛의 검사. 지금 이게 무슨 짓… 입니까….

-살… 살려… 살려… 괴물… 괴물이….

-으아아아아아아악!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저희가 잘못… 죄송합….

-맞서 싸워라. 그래 봤자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응, 아니야. 걔는 이제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래.’

그 방법이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다는 느낌은 있었으니까. 이것과 연루된 이들 모두에게 최악의 고통을 안겨 주겠다는 듯한 모습이라 묘사하기가 힘들다.

계속해서 사방으로 붉은색들이 튀어나가고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봐도 지옥도처럼 보일 지경.

그 와중에 녀석은 노을빛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녀석이 루시퍼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이 선택이 노을빛의 신으로서의 선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근데 괜찮아. 이해할 수 있어.’

아마 대륙인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이기영의 시신을 본다면 아마 노을빛의 검사가 왜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라이오스 빼고 띄워야겠네.’

하얀이가 알면 안 되니까.

이지혜 감독과 로노베 카메라 감독에게는 굳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륙 전체에 커다란 여신의 거울이 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완전히 넝마가 되어버린 명예추기경의 시신이 신대륙 보호 위원회에 있다.

노을빛의 검사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검을 휘두른다.

-어째서….

-…….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도대체. 왜.

-…….

-그 사람은 너희들을 사랑했어.

-…….

-그 어떤 것보다 너희들을 사랑했다고.

-…….

-너희들은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이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어째서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했었던 거야. 안 그래도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야. 죽는 그 순간까지도 너희들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그렇게 모든 걸 빼앗고 가져가야 했어? 이 개자식들아.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

-제발… 살려… 줘.

-그 사람은 너희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할 거야. 괜찮다고,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이건 의미 없는 짓이고, 나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겠지. 근데 나는 용서할 수가 없어. 도저히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어. 이게 기영 씨를 슬프게 할 거라는 건 알아. 내가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나는 도저히 너희들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

-몇 번을 생각해도 도저히….

아까부터 느껴지기는 했지만 반쯤은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게 긍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을 정도의 장면이기는 했다.

아마 이걸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됐든 간에 지금 김현성이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도 신앙이야.’

신에 대한 경외뿐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두려움 역시 신앙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경외심보다도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지. 솔직히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나. 그렇지?

아마 지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녀석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왜 몰라주시는 겁니까. 노을빛의 신이시여.

-…….

-왜 이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나의 신이시여.

한쪽 눈을 붙잡으며 놈은 발을 내디뎠다.

무대 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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