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859화 (85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859화

마지막 (92)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내가 오빠한테 묻고 싶은 말인데. 잘 지내고 있었던 건 맞죠? 아니,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잘 지내고 있었을 텐데. 재미있었겠네요. 아주 재미있었겠어요.

‘말 속에 뼈가 있자너.’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시작될 것 같지는 않았다.

“누나 왜 그래….”

-내가 왜 그러는지 말로 설명해야 하나 봐.

나름 감동적이었던 재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만남이라는 따뜻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지혜 쪽에서 보여주는 반응에 조금은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조혜진에게 말했던 것으로 상황이 처리되겠지만 이 누나가 또 마음을 바꿀 수도 있었으니까.

기왕이면 비위를 맞춰주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느껴진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입에 담은 이후에 조용히 말을 꺼내는 것이 맞다.

모두한테 먹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신하게 나가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내가 누나 없이 어떻게 잘 지냈겠어. 매일매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밥이 제대로 넘어갔겠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겠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더라. 누나 없는 내 삶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지 뭐야.”

-…….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사람이 곁에 없으니까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더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보고 싶었지만 정말로….”

-…….

“이지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지랄하지 마요. 진짜.

“정말이라니까. 누나 목소리도 너무 그리웠고…. 누나 미소도. 누나 웃음소리. 누나랑 나누는 대화들도 얼마나 그리웠는데. 우리 영혼으로 이어져 있잖아. 그렇지? 누나도 알고 있잖아. 내 소울 메이트.”

-글쎄요. 나랑은 말만 영혼으로 이어진 거지, 어디 영혼으로 묶인 새끼는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요? 오빠 배 찌른 그 새끼랑 영혼으로 이어져 있잖아. 눈도 공유하고 좋으시겠네. 이제 와서 약 팔지 마요.

“아니, 왜 그래. 누나. 응? 왜 여기서 걔 이야기가 나와. 걔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지. 누나가 상심하고 화가 났다는 건 나도 당연히 이해해. 내가 미안하고 잘못했다는 거 알아. 그래도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까. 전부 설명 못 하지만… 내가 누나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잖아….”

-참나. 누가 누굴 생각한대.

“지혜야아아.”

-집어치워요. 진짜 징그럽게.

“응? 지혜야아아아.”

-왜 이래? 진짜?

“내 영혼의 단짝. 내 사랑. 나 안 볼 거야? 나 안 볼 거 아니지? 이지혜. 나 용서해 줄 거지? 우리 변하지 않는 거지?”

-…….

솔직히 안 먹힐 줄 알았어.

그런데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한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효과 있어야지. 희라 누나 때처럼 격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한 거라고 봐도 돼?’

사실 확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이쪽에서 애교와 교태 섞인 목소리로 그녀의 비위를 맞춰준다고 한들, 그녀의 마음이 풀리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내게 협력하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라는 거다.

물론 협력할 가능성이 높고 이미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능동적으로 움직여 주는 것과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어처구니없다는 것처럼 피식거리며 콧방귀를 끼고 있었지만 원래 이런 종류의 작업은 반복과 정성, 일관성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겨우 그딴 거 가지고 되냐고 묻겠지만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방법이 아닌가.

아첨은 패배하는 법이 없다.

-짜증 나네.

“왜.”

-다 아는 수법이라서 짜증 난다고요. 어차피 협력하기로 되어 있는 거니까. 그만하고 오빠가 줄 수 있는 것부터 이야기해 봐요. 아니, 그냥 내가 말 할래. 설마하니 꽁으로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죠?

“설마.”

물론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다.

-이지후. 이기연.

“어?”

-그냥 가볍게 그걸로 해요. 쿨하고 섹시하게.

“그게 무슨 뜻인데….”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아요.

“아….”

-부족하지만 만족스러운 거래가 될 것 같네. 기연아.

“…….”

-…….

“…….”

-아무튼 오빠 말대로 시간 없으니까. 쓸데없는 잡담은 여기까지 하는 거로 해요. 궁금한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그렇게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계속 속삭일 거예요? 나중에 데이트할 때나 그렇게 해요. 괜히 지금 힘 빼지 말고. 자존심 상하기는 하는데 나도 집중 안 될 것 같으니까.

“…….”

-아! 사실 제가 여기까지 상황을 그린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확인하기는 했지만 모든 일에 절대라는 건 없는 거 알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혜진이한테 해준 말이 전부 거짓말이겠어요? 오빠가 죽은 이후에 카스가노 유노를 찾아가고 계획을 세우고 여기까지 온 게 전부 우연이겠어요? 오빠가 저를 찾은 이유가 루시퍼와의 내기 때문인 거 맞죠? 나라면 그 사실을 전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확신은 없었겠지만 제가 오빠를 도와주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거 아니에요. 크게 한탕 해야 하니까.

‘누나 입 풀렸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목소리가 반갑다. 이런 대화가 필요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 오히려 누나도 나만큼이나 더 기다려왔던 것 같다.

누나답지 않게 무작정 말을 내뱉고 있으니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경.

잠깐 천천히 정리해서 말해달라고 입을 열자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이지혜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도 내기의 내용은 몰라요.

“뭐?”

-저도 확신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예상이 가는 건 있지만 제가 이걸 오빠한테 이야기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 말 못 하겠네요.

“누나 아직도….”

-아니라니까. 물론 화가 나기야 났었죠. 감히 내 걸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어서 움직인 것도 맞지만, 그것 이상으로 저는 오빠가 다시 돌아오는 거에 대해서 관심이 많거든요. 오빠와 루시퍼 사이에 어떤 계약이 있었던 건 알아요. 또 그 계약 때문에 오빠가 스스로 기억을 지워야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편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성벌이가 필요하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죠.

“…….”

-그걸 위해서 이 던전을 만든 거예요.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은 허투루 만들어진 던전이 아니에요. 투자비용 대비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게 설계한 던전이지. 단순히 오빠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처럼 비추어지겠지만 작은 비용을 투자해서 높은 흑자를 남기는 구조를 남기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요.

“그건 고맙기는 한데… 정말로 그것뿐이었어?”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래요? 수틀리면 날려 버리려고 했었던 건 맞다니까.

‘그렇게 안 돼서 다행이네. 진심으로.’

타이밍이 아슬아슬한 것 같았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것 다 제치고 그녀가 많이 벌고 있다는 건에 대해서 충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지혜가 이쪽의 손을 들어준 것 역시 내가 움직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말해주지 못하겠다는 건 어떤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제가 오빠한테 말을 한순간 미래가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걸 경계하고 있는 거라고요. 변수잖아요?

‘변수기는 하지.’

-라파엘을 괜히 저희 쪽으로 데려온 게 아니에요.

“걔 누나가 데리고 있었어?”

-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걔도 변수였거든요. 얘가 기운은 넘치는 데 너무 감정적이고 잘 휩쓸리는 성격이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앞서서 일을 망칠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생각해 봤지만 누나의 선택이 옳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걔는 좀… 그렇기는 해….’

저 표현보다 어울리는 말을 더 찾을 수가 없다. 아마 그냥 내버려 뒀다면 이지혜의 말처럼 분명히 어딘가에서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으리라.

조용히 이지혜를 바라보자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눈에 비쳤다.

조혜진은 선희영이나 카스가노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 와중에도 둘은 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마 이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만 누나 입장에서는 최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 저런 거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아마 누나의 모든 행동이 변수를 최대한 지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설계한 대로,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설계한 대로 내버려 둔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 그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

근데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모르고 있어야 하냐 이거야.

이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야기다. 중간 과정에서라면 참을 수 있더라도 현시점에서는….

‘알아야 돼.’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 누나.”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네요. 그 성격 어디 가겠어.

“누나가 걱정된다면 전부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누나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왔는지는 알아야 될 것 같아. 정확히는 카스가노 유노가 뭘 보고 있는지.”

-다른 게 있겠어요? 오빠가 부활하는 장면이지.

“내가 살아나기는 한다는 거네.”

-그런 게 안 보였으면 제가 이 고생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겠죠.

“근데 그것뿐만이 아닐 거 아니야. 누나가 말해줄 수 있는 게 더 있잖아.”

어떻게 살아나는지가 더 중요하지. 어떤 방법으로 다시 땅을 밟는지가 더 중요해.

굳이 변수를 만드는 게 걱정이 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걱정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더 크다.

누나 말 대로 내가 컨트롤 프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떤 식으로 맺어질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이지혜는 조용히 스카프를 목에 감으며 입을 열었다.

-동요하지 마세요.

“뭐?”

-솔직히 나도 내가 맞는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어. 근데. 오빠라면 지금 이 시점까지 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고 싶어 할 것 같거든. 내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알게 됐을 것 같아.

“…….”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괜한 짓 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김현성은 죽을 거예요.

“뭐?”

-김현성은 오빠를 대신해서 죽을 거예요.

“…….”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오빠가 알고 있을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미래는 없어요. 김현성은 죽을 거예요.

‘왜… 세 번이나 이야기해.’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노을빛의 날개를 꺼내든 채로, 만신창이가 된 내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주위에는 목이 날아간 엑스트라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녀석에게 당한 것이리라.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에 폭음이 들리며 사방에서 공격들이 쏟아진다.

김현성은 몸으로 시신을 막으며 울음을 삼켰다.

화살과 마법의 세례 속에서 조용히 날개를 펼치며 검을 휘두른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며 주변이 터져 나간다.

그렇게 김현성은.

인류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아마 그렇게 결심했을 것이다.

‘얘가 왜 죽어?’

“현성이가 왜 죽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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