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52화
마지막 (85)
‘멍청하지는 않아서 다행이기는 해.’
주요전력들이 모두 빠진 사이에 시신을 탈취한 건. 그래…. 칭찬할 만해.
‘하얀이 마법은 어떻게 뚫었어?’
이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텐데.
녀석에게 정보를 주기야 했다. 마법을 디스펠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루트도 미리 짜놓기도 했고, 미리 계획에 대해서 언질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녀석이 이 일을 벌였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아무리 정하얀이 지금 라이오스에서 일을 벌이고 있다고 한들, 그녀의 눈을 피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을 테니까.
어쩌면 벨리알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래. 충분히 여지는 있었지만 놈이 이렇게 보란 듯이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놈은 놈답지 않은 유능함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근데 왜 하필 지금이야?’
왜 하필 지금이냐고.
나조차도 무섭다. 솔직히 말하면 배때기 찔리기 전보다 더 무서워.
그만큼 김현성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뭐라고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한쪽 눈을 매만지며 자꾸만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다.
‘느끼고 있는 거야.’
보지는 못하지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망원경으로 곧바로 송수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어두워 보인다. 살이 전보다 더 빠진 것 같았고, 뭔가 정통으로 적혈 감성을 때려 맞은 것만 같다.
이미 악마에게 수차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눈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이고 얼굴은 눈에 띄게 상기되어 있다.
흥분 때문인지 호흡이 거칠어진 것 같은 느낌. 이제 곧 신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손을 연신 움직이며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손 위에서 붉은색들이 제단 위에 뚝뚝 떨어질 때마다 놈이 몸을 흠칫흠칫 떠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 와중에 김현성은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 마! 하지 마!!”
아프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통각은 전달이 되지 않을뿐더러,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김현성이 비명을 지를 리가 없다.
웬만한 상처에 눈도 깜짝 안 하는 김현성이 이렇게 엄살 피울 일이 뭐가 있겠어.
“제길… 제길!!! 아아아… 아아!!”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아마 얘 입장에서는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계속해서 노트북에 꽂혀 있었던 외장하드를 빼내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행동만으로도 과민반응을 보일 정도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아, 큰일 났다. 진짜. 큰일 났다.’
“현성 씨….”
녀석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반응하는 것 같지 않다. 이미 온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다.
제단 위에 선 녀석은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린다. 계속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붉은색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 광경은 무언가 종교의식 같기도 했다. 뭐라 설명하기 좀 복잡하지만 말이다.
엄숙한 손짓과 분위기 때문에 녀석이 흥얼거리는 콧노래마저 가스펠로 들릴 지경.
“아….”
마침내 녀석은 금색의 구를 들어 올렸다.
입꼬리를 광대까지 올리곤 금색의 구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소중한 보물이라도 찾은 것마냥 미소를 띤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증오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황금색 구를 바라보는 얼굴은 솔직하다.
‘진짜 미친놈 같자너.’
원래 이렇게 미친놈은 아니었는데 많이 미친놈이 되기는 했어. 이게 다 내 업보인가 봐.
-이제 된 거야….
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빛의 아들의 부활. 이게 조건이야. 내가 빛의 아들이 되는 거야. 빼앗는 거라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도 영 위험해 보이기 짝이 없다.
-내가… 이제는 내가… 내가 옆자리에 설 수 있는 거야. 하… 하하… 하하하하!
자신의 눈 쪽으로 손을 가져가면서도 계속해서 웃고 있다. 조용한 공간에서 녀석의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놈의 몸이 빛에 휩싸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녀석의 한쪽 눈에 황금색 빛이 계속해서 반짝거린다.
“아으… 흐으윽… 아아아아아… 흐윽….”
‘좀 조용히 좀 해. 이 새끼야.’
-하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이 새끼들. 진짜 양옆에서 시끄러워 죽겠자너.’
-이거였구나. 나와 네가 다른 게 이거였어. 빛의 아들과 내가 다른 게 이것 때문이었다고. 하하… 하하하하… 그분의 옆자리에 설 수 있게 된 힘이 바로 이거였어!
이건 아이템 판정을 받았다고 보면 되는 건가.
반응을 보며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상향판정을 받은 것이 아닐까.
사실 뻔한 이야기다.
정확히 어떤 시스템으로 이 체계가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베니고어의 조각상에서 흘러나온 피눈물을 촉매화시킬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쪽의 시신 역시 마찬가지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생각해 보면 교국이나, 교황청, 파란 길드에서 내 시신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최소 신화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아이템 혹은 촉매. 몸 전체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대륙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유물.
드래곤의 사체만 해도 엄청나게 돈이 되는 판에 신을 담았던 몸이 굳이 말이 필요하겠는가.
교국의 힘이 조금 더 약했더라면, 파란에 김현성과 정하얀이 없었더라면, 대륙인들의 시민의식이 조금 더 낮았더라면, 내 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더라면, 대륙을 전란에 휩쓸리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가장 가치 있는 건 눈일 거고….’
여러 가지 부위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역시나 눈이지.
빛의 아들의 상징처럼 자리 잡은 금색의 눈.
신화 등급의 아이템. 빛의 아들의 눈.
기능은 아마….
‘마음의 눈.’
‘이기영의 망원경.’
‘회귀자 사용설명서.’
추가적으로 신성력 효과나 뭐 대충 이것저것 곁가지 기능이 때려 박혀 있겠지, 뭐.
조금 다른 이야기였지만 내게 커다란 영향이 없을 거라는 벨리알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다. 나와 빛의 아들의 신체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신들이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던전이나 퀘스트, 이벤트나 숨겨진 히든 피스 같은 형태로 대륙에 남겨져 있는 것들. 신의 남긴 유산을 매개로 해 신의 힘을 빌려 쓰거나 흉내 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
내 눈 역시 그런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원본의 다운그레이드이기는 하지만 저것만으로도 활용 가치는 높다.
마음의 눈으로 모든 걸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스탯과 성향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망원경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없겠지만 녀석의 정신력이 허락하는 곳까지는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처럼 정확하게 김현성과 유대감으로 연결되기는 어렵겠지만 놈은 김현성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접할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적지만 어느 정도 영향력은 끼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 본인도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금색의 눈에서는 확실히 신성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심장도 남았으니까.’
놈이 다시 한번 단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인다. 아까보다 더 기쁘다는 표정으로, 더욱더 완벽해질 수 있다는 얼굴로 말이다.
움직임은 조심스럽지만 거침이 없다. 어떻게 보면 허겁지겁 움직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최대한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보인다.
조용히 주문을 외운다. 제단 위의 마법진들이 계속해서 빛나며 녀석의 얼굴을 비춘다.
김현성에게는 그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니, 보이는 건가. 보이는 거 맞아?
“현성아?”
“제기랄… 제길… 죽여 버릴 거야.”
‘안 돼. 죽이면 안 돼.’
“전부… 전부 죽여 버릴 거야.”
‘전부 죽이면 조금 그렇잖아.’
“흐으윽… 흐윽….”
‘미치는 거 아니지?’
김현성이 미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불안정해 보인다.
원래 김현성의 정신상태는 항상 불안해 보였지만 지금은 특히 더 불안정해 보인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다. 미친 듯이 웃다가도 오열하기도 하고 표정을 읽기도 쉽지가 않다.
계속해서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무섭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라 내가 얘를 너무 몰아붙인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된다.
‘뭔가… 뭔가 해야 되는데.’
순간적이었지만 머릿속으로 계산이 잘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황당한 순간을 많이 겪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당황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 믿어달라고 실컷 빌드업을 해놨기 때문에 다시 한번 희생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그래.
사실 선택지가 없다. 송수경을 두둔하기는 애초에 틀렸다는 거지.
하지만 김현성을 크게 자극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유일한 선택지는 선을 지키는 것.
피해자의 입장에서 김현성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의도된 희생이 아니며, 용서해야 한다는 스탠드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
일단은 나도 눈을 부여잡는 것이 정답이다.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고통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려보자.
아, 물론 너무 고통스러운 표정은 지양해야 할 것 같다. 현성이가 너무 화내면 말리기 곤란하니까.
“…….”
‘근데 너 왜 반응을 안 해.’
“…….”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반응을 안 하냐구.’
당연히 내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달려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아까보다 더 얼굴이 일그러진다.
한쪽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분노로 터질 것만 같은 모습, 쭈삣쭈삣 하고 김현성의 몸에서 뭔가가 삐져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억누르려고 하고 있지만 놈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현성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마치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제단에 올려져 있는 나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수경의 가슴에서 검은 형태가 튀어나오며 빛의 아들의 심장을 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시 한번 놈의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손을 멈추지 않는다.
뭔가가 더 있을 거라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게 더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알뜰살뜰 하기는 해.’
빛의 아들의 모습이 점점 참혹해진다.
얼굴은 더럽혀졌고 하얀색 옷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여기저기 상상하기 싫은 형태의 것들이 굴러다니며 그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금안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 미소만은 그대로.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성자의 미소만은 놈이 더럽힐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 하하….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악마는.
이제는 관심 없다는 듯이 제단 위에 있는 인형을 떨어뜨렸다.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성자의 미소가 사라진다.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붉은색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힘없이 짓눌리는 순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
김현성이 머리를 붙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