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850화
마지막 (83)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입바른 소리를 해도 녀석은 여전히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릴 것이고, 오랜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지난날의 잘못을 벗어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자신의 죄와 싸울지도 모르지.
악마의 정신 공격에 당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그 기억은 김현성의 기억 속에 남을 테니까.
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으로서 한 번 용서받고 이기영 본인에게 한 번 더 용서를 받았다.
물론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관용과 희생의 상징과도 같은 빛은 언제나 회개하는 자에게 따뜻한 빛을 내려주게 마련이다.
괜찮다는 미소를 억지로 내비치자 한참이나 흐느끼던 녀석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전부 다 괜찮습니다.”
“…….”
“전부 다요.”
“…….”
“자. 그럼 조금 더 걸을까요?”
“네….”
‘여기서부터가 중요해.’
일단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하니까. 방법이야 어찌 됐든 누더기영을 마무리하는 것은 김현성이다.
녀석은 잠깐 동안 그걸 잊은 것 같았지만 굳이 현시점에서 그걸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다.
무턱대고 죽이라고 해서 죽일 리가 없지 않은가.
‘살살 달래면 돼.’
계속해서 내 할 일을 끝내라고 정신적 압박을 주는 것보다는 어르고 달래면서 눈물겨운 마무리로 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일이 터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때가 된다면 전조가 있을 것이다.
대륙의 마지막을 그리는 이벤트나 다름없으니까 누나 입장에서도 신경 좀 썼겠지.
그때까지는 조금 시간을 보내도 될 것 같이 느껴졌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지만 일단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김현성도 내게 보폭을 맞춰오는 중, 궁금한 게 많은 것 같았지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인내심이 오래가지는 않았는지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크게 나쁘지는 않네요. 위에 있다는 감각이 아직은 어색하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많았는데… 대륙의 법칙에 위배된다는 모양이라…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억압받으신다거나… 불편하신 일을….”
“아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굳이 어느 쪽이냐 답한다면 대접받는 쪽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륙을 구한 성자의 자격으로 자리해 있는 거니까요.”
“희생당하신 겁니다.”
‘삐뚤어지지 마.’
“아니요. 제 선택이니 당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전능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아요. 그들이 막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하지만 달라요. 그들은 악마처럼 우리들을 속이고….”
“현성 씨.”
“죄… 죄송합니다.”
“베니고어나, 로렌, 엘룬 같은 이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현성 씨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주 조금만… 현성 씨의 마음이 허락하는 데까지만 그들을 이해해 주세요. 그들 역시 불쌍한 이들입니다. 악의가 향해야 할 곳은 그들이 있는 곳이 아니에요. 물론… 물론 저 역시 그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네?”
“한 인간이 떠안기에는 너무 커다란 짐을 맡긴 것은….”
“역시… 기영 씨도….”
“아뇨.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성 씨의 이야기예요.”
“아….”
감동했다는 표정 왔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얼굴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들이 현성 씨에게 커다란 짐을 맡긴 것은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현성 씨를 원하지 않는 싸움에 끌어들였으니까요. 현성 씨가 받은 고통과 그로 인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적의 또한 그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저였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
“하하.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 휴식을 취하고 싶으신 거라면 잠시만….”
사실 적당한 장소랄 게 없다. 아무것도 없는 설산에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김현성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는 모양, 가까운 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는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시야에 비쳤다.
제법 괜찮은 곳이다. 딱 적당히 몸을 쉴 만한 곳, 애초에 김현성은 휴식을 취할 이유도 없고, 몸의 감각이 희미한 나도 그리 휴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역시나 걷는 건 힘들다.
육체적으로 지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신적으로는 피곤하니까. 기왕이면 앉아 있는 것이 좋다.
작은 모닥불까지 피워 놓으니 제법 그럴듯한 캠프가 만들어진 것 같은 기분, 물론 여러 가지로 발전된 현재의 파란에게는 형편없는 캠프이기는 했지만 초보자들이 쓰고 가기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캠프가 없다.
투박하기는 하지만 있을 것 다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있으니 현성 씨가 회귀자라는 걸 밝혔을 때가 기억이 나네요.”
“아… 네. 그랬었죠.”
“소도시 헤르엔.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발전했다고 들었는데… 북부에서의 일이 끝난 이후에는….”
“네. 정말로 많은 게 바뀌었습니다. 문화관광도시로 탈바꿈되었으니까요… 네… 교국과 린델에서도 투자를 하기도 했었으니… 기영 씨도 아마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가 보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네. 예전 그 오두막에 잠깐….”
“너무 길드를 오래 비우시는 것 같더군요.”
“죄… 죄송합니다.”
“아니요. 사과를 받으려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길드에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주세요. 말은 하지 않을 테지만 모두가 힘들 테니까요. 아. 특히 예리 같은 경우에는 더욱더요.”
“아….”
‘이 새끼 지금 깨달았나 봐. 지가 데리고 왔으면서.’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그 누구보다 관심을 필요로 할 겁니다. 자신을 보살펴 주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길드 재정도….”
“죄송… 합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길드 사업이나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죄… 죄송합니다.”
“김미영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무너져도 진즉에 무너졌을 겁니다. 지금 파란 길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놓아버리셨더라고요.”
“…….”
“쓸데없는 곳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다 이 말입니다.”
“죄송….”
“대륙에 퍼져 있는 정보 길드들에게 의뢰를 넣은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길드 재정이 휘청이는 상황에서 경매장에 사용하는 비용이나… 신전 건축에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생각하니까 짜증 나기는 한다.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신전을 그런 식으로 지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베니고어 교단이나 엘룬 교단도 그만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신전의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제가 쉴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해요.”
“죄송합니다.”
‘물론 크고 화려하면 좋기는 해. 근데 정도가 너무 심했어.’
“지금 길드에 빚이 얼마나 있는지 아시기는 합니까? 그리고 왜 그때 가방은….”
아니, 시바, 이건 그냥 말하지 말자. 어차피 말도 안 통할 테니까.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대륙을 사랑하지만 그만큼 파란 길드에 가지고 있는 애착도 크다는 걸 알아 주셔야 합니다. 솔직히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더라고요. 재무 계획은 있으신 거 맞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는 건 많습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그건….”
“…….”
“…….”
“일단 던전탐사를 통해서….”
“파란 길드는 중 소규모 클랜이 아니에요. 던전 공략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기에는 규모가 커도 너무 커졌다는 거 이해하고 계시는 거 맞아요?”
“…….”
“린델은 물론이거니와 교국 전체, 아니,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길드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길드 식솔들도 물론이거니와 하청길드나 클랜의 수를 생각해 보면 결코 허황된 발언이 아니에요. 제 죽음이 그들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면 안 됩니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네… 죄송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언젠가 제가 돌아갈 곳이지 않습니까.”
“…….”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돌아갈 장소예요.”
“돌아오실 수 있으신 겁니까?”
미끼를 물었다.
“네. 설명드리기 힘들지만 아마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노력하고 있어요.”
“하… 하하하하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얼굴 한편에는 의심이 들어서 있다. 이게 혹시나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기를 원하는 이 성자가 다시 한번 희생하기 위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의심.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 의심에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이벤트가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눈치 빨러.’
“다시 돌아가면 라이딩이나 같이 나가는 게 좋겠네요. 대륙이 이렇게 넓은데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곳도 많으니 한 번씩은 다 둘러보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라거나.
“대륙에 대해서는 현성 씨가 더 잘 알고 계실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녔던 곳은 대부분 전쟁터라…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라거나.
“못 해본 것들도 많으니까요. 사실 길드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라거나.
“그러고 보니 바다 너머로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놀라실 겁니다.”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놈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최대한 내 시선을 끌려고 하는 것만 같다.
자꾸만 말을 돌리고, 평소의 녀석 답지 않게 새로운 화제를 계속해서 꺼낸다. 어째서인지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오고 있는 거네.’
전조가 오고 있는 것이다. 힐끗 하늘을 바라보자 기형적인 구름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입술을 꽉 깨문 김현성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뭐 가방 신상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
새로운 시리즈가 던전에서 발견되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과장되게 지껄이며 계속해서 내 시선을 잡아 놓는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짓인지 모를 리가 없다.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돌린 나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내게, 지금의 거짓말이 얼마나 의미없는지, 이미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놈은 흔들리는 눈으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꿈을…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시선을 피한 것이리라.
“새로운 시작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이 새끼 간 보는 거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