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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화 마지막 (82) >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기는 해.’
저렇게 웃는 표정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많이 반가운 것 같자너.’
애써 웃음을 짓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미소가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마 김현성의 경우도 조혜진이나 박덕구, 하얀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빛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기영으로써 말을 걸어준 거에 대해서 안심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다시 한번 내가 자신을 구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제대로 판단하고 싶었지만 오만가지 감정과 생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탓에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황이라도 터진 것마냥 호흡곤란을 일으켰던 녀석이 다소 침착해진 걸 보면 아무튼 이쪽의 등장이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평소대로 대해도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쪽 역시 점검해야 하는 게 많아 감정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몸에 고통은 없네.’
혹시나 아프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지만 몸이 불편한 것 외에는 다른 증상은 없다.
목소리도 갈라져 있고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프지는 않다. 내려오자마자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능력도 쓸 수 없는 건가.’
혜진이의 몸에 강림한 것과 비슷하다.
‘신체 능력 개똥이네. 진짜.’
알고 있었지만 다 죽어가는 이 몸으로는 다른 짓을 할 수 없는 모양.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조혜진의 몸과는 다르게 이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기력함밖에 없다.
정말로 죽기 위해 만들어진 몸이다.
마지막은….
‘스스로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해 판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김현성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러려고 내려온 건데 뭐.
잠깐 동안 혓바닥을 깨물어 보려고 했지만….
‘안 돼.’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안전장치.’
내가 내려온 것을 고려해서 안전장치를 걸어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어찌 됐건 외부의 개입에 저항할 만한 수단은 만들어 놓은 모양.
시스템은 내가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걸 할 수 있다는 건 이벤트를 받은 당사자뿐이라는 거지. 눈앞에 있는 김현성 말이다.
조금 일이 귀찮아지기는 했지만 충분히 수습할 만한 여지는 있다.
말 좀 잘하고 설득 좀 하면 지가 뭐 다른 방법이 있겠어. 설명 좀 잘하면 되겠지.
이게 내 진짜 몸이 아니라는 것과 이 게 필요한 일이라는 것, 또 내가 언젠가 돌아갈 거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면 틀림없이 놈도 이해해 줄 것이다.
조금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괜… 찮으십니까?”
“네… 몸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네요. 미리 설명해 드리겠지만 이 몸은 제 육신이 아니고 던전화 된 대륙에서 만들어진 이벤트 개체입니다.”
“아… 네.”
“그러니 당황하실 필요도, 그런 눈으로 저를 바라볼 필요도 없습니다.”
“네.”
“저는 아프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해 주셔야 되요.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저는….”
“아프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으시다고.”
“네, 바로 그거예요. 겉모습이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 이 이벤트 개체와 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 개체가 앞서 설명한 모든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실제로 퀘스트의 내용은 이 이벤트 개체의 소멸이고, 만약 소멸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외신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이벤트 개체를 소멸시키는 거예요. 알아들으실 수 있죠?”
“…….”
‘이 새끼 대답 안 하는 거 봐.’
그래. 이것도 예상했었다.
“우리의 목적은 이 이벤트를 해결하는 거예요. 메인 이벤트 희생된 성자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제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
“제가 뭐라고 했죠?”
“다….”
“네?”
“다시… 한번 기영 씨를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새끼 지랄하고 자빠졌네. 진짜.’
하지만 의미가 크게 다가오기야 할 것이다. 이 빛의 성자의 삶이야말로 희생으로 만들어진 삶이었으니까.
어째서 이번 이벤트의 네이밍을 외신전쟁이 아닌 희생된 성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소한 디테일에도 확실히….
‘신경을 쓰기는 썼어.’
이벤트 외신전쟁을 클리어한다는 것과 이벤트 희생된 성자를 클리어 한다는 것은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김현성에게는 더욱더 안 좋은 방향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이벤트를 클리어하는 것 자체가 성자를 희생시킨다는 뉘앙스이기도 하니, 안 그대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녀석의 입장에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올라올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전 외신전쟁의 마무리가 어땠는지 기억한다면 이걸 다시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할 일이고, 내게 다른 피해가 없다는 것을 이해시킨다고 한들….
‘쉽지만은 않을 거야.’
근데 이것도 대충 예상했었어.
조금은 씁쓸한 것 같은 얼굴, 다시 한번 내 모습을 바라본 이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생각을 전부 정리한 것 같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자신이 할 말을 점검하는 것 같은 느낌.
굳이 닦달할 필요는 없다. 주어진 시간 내에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되는 거고 그동안 녀석을 조금 다독여 주다 보면 대충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먼저 대화를 주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너무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필요한 이야기만 하기도 했어. 이런 건 별로 도움 안 되지.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그제야 조금 안심한 것만 같다.
“아… 그러니까.”
“아니요. 사실 말씀해 주실 필요 없어요. 전부 보고 있었습니다.”
“네? 정… 정말입니까?”
“네. 전부 보고 있었습니다. 느껴지기도 했고요. 현성 씨 한쪽 눈동자처럼 제 눈동자도….”
“네.”
“저를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도….”
“네.”
“혜진 씨에게 내린 창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도 봤습니다.”
“아… 그건 빼앗으려고 한 게 아니라….”
“하하하.”
“…….”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움직이기 거슬리기는 했지만 아마 잠깐 걷자는 내 의도를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발을 맞춰 걸어오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몬스터도 인간도 없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설산이었기 때문에 눈이 밟히는 소리가 더욱더 도드라진다.
“힘들어하시는 것도….”
“네.”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도 보고 있었습니다. 혼자서 길드를 돌아다니던 모습도, 제 시신을 안고 내려오던 모습도 보고 있었네요. 그리고….”
“…….”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하시는 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
“어째서… 어째서 막아주셨던 겁니까.”
“대륙에는 현성 씨가 필요하니까요.”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답이 아니다.
“그리고.”
이게 정답이지.
“무엇보다 현성 씨가 죽는 걸 바라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때 드렸던 말씀처럼 현성 씨가… 살아가 줬으면 했습니다.”
“…….”
“모든 걸 잊고, 예전처럼 빛나며 그렇게 살아주시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 제가 없더라도 모두와 함께 그렇게 웃으며 추억을 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걸 보고 싶었어요. 그게 저의 바람이었습니다. 제가 몇몇 특정한 인간의 행복을 바란다는 건… 엄밀히 말하면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지만요.”
눈물 한 발 장전 중.
“저는….”
“힘든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아갈 자격이 있는 인간이….”
말 한마디 못하게 하고 밀어붙여야지.
“현성 씨 잘못이 아니에요. 현성 씨를 세뇌한 악마의 잘못입니다. 가지고 있는 유대감을 끊게 한, 서로를 의심한 악마의 죄를 현성 씨의 죄로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죽어야 했던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었습니다.”
“대륙을 위해서 말입니까?”
“네. 정확히 설명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지금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현성 씨가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저는 사라졌을 거예요.”
“그런 일이….”
‘어디에 있긴 어디에 있어. 여기 있지.’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내 말에 말도 안 되는 말이 어디 있어.’
“저는 기영 씨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 기영 씨를 그런 모습으로 만든 당사자가 바로 저예요. 기영 씨를… 제 손으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게 제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신 겁니까.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가 기영 씨의 목을, 다리를, 배를 그렇게 만들었을 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그건 악마의….”
“그건 관계 없어요! 정확히 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저는 웃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어떻게든 살고 싶어 땅바닥을 기던 당신을 보고 얼마나… 얼마나 웃고… 얼마나!”
‘이해해.’
시바, 얼마나 기분 좋았겠어? 지 인생을 완전히 시궁창으로 만든 놈한테 복수하는 순간이었는데.
근데 그거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이런 거에 죄책감 느끼는 것도 이상해.
“현성 씨 스스로가 품은 생각이 아니에요.”
이럴 땐 살짝 어깨 두드려 줘야지.
“현성 씨 스스로가 품은 생각이… 아니에요.”
“흐… 흐윽… 흐으윽….”
“그건… 현성 씨가 아니었습니다.”
“죄송… 합니다. 흐윽… 끄으윽….”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프게… 아프게… 해서 죄송… 죄송합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죽게… 만들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의심… 의심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받은 것만큼 돌려드리지 못해서… 혼자 내버려 둬서… 모든 게… 모든 게… 죄송… 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성자의 미소.
“정말로… 흐으윽… 흐윽… 정말로 죄송합니다.”
당신의 죄를 사한다는 빛의 손짓.
“이걸로… 사과가 되지 않겠지만… 정말로…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성자의 자애로움이 설산을 덮고 있는 눈조차 녹일 듯했다.
틀림없이 그 광경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아름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