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7화 마지막 (80) >
확실히 녀석은 나를 닮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은 마무리였네.’
괜찮은 마무리였다. 가능성이 없는 싸움을 향해 몸을 던진 이유도 어쩌면 이런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희미한 가능성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녀의 존중을 얻는 것.
자신에게 더 이상 남은 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녀석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선택지 중 하나였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도박이었겠지만 녀석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을 테니까.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지 않았을까.
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누나는 자신을 숨기지 않으니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 항상 드러내고 다니니까.
녀석은 전사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전사로서 대우받기를 원했고 결국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놈이 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희라 누나는 녀석의 죽음과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확실히….
“네?”
-저 사람이 부길드마스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뭘 보고요.”
-한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네. 희생… 하는 점이라든지…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다른 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요.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대신 자신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으니까요. 어쩌면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끝나는 게 더….
“저는 포기 안 해요.”
-차라리 본인이 매듭을 짓는 게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부길드마스터와 같지 않습니까. 외신들과의 전쟁에서 부길드마스터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거랑은 조금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흩어지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작은 별 무리가 되어 흩어지는 장면은 꽤 볼만하기는 했지만 조혜진처럼 복잡한 감정을 느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차희라는 그 광경을 조용히 응시하며 전사의 죽음에 예를 표한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는 모습으로 자신의 긍지를 되돌려 받은 것을 자축했다.
그녀답지 않게 미소를 짓는 얼굴이 눈에 띈다.
어째서 그녀라고 불안하지 않았을까. 본인이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 차희라였지만 깊은 곳 처박혀 있는 작은 트라우마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방식대로 그녀는 다시 한번 벽을 넘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붉은 용병의 등을 두드리며 그녀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무슨 단서는….”
-알프스를 보내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남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제대로 클리어한 이벤트인 만큼 둘러볼 게 많았으면 좋겠네요.”
-어쩌면 힌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혜 씨가 부길드마스터를 위해 남긴 것이나… 적어도 이후의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수도….
“아무튼 그쪽은 혜진 씨가 마무리해 주세요.”
-네.
“뒤처리도 누나한테 맡기고 싶기는 한데 아무래도 혜진이 너한테 맡기는 게 더 좋을 것 같거든.”
-부길드마스터는….
“나는 현성이 쪽 봐야지.”
-길드마스터는 괜찮으신 겁니까?
글쎄… 나도 몰라.
괜찮을 리가 없을 것이다.
‘괜찮으면 사람 새끼 아니지.’
진짜 괜찮을 리가 없자너.
본인의 트라우마와 마주한다는 건 차희라에게도 어렵다. 하물며 마음 약한 김현성이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멘탈은 과자처럼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온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 놈을 마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무서울 테니까.
‘누나가….’
제대로 된 선물을 뿌리기는 뿌렸어. 어떤 게 김현성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아주 제대로 알고 있잖아.
근데 아마 이 새끼는 이겨낼걸. 무조건 이겨낼걸.
얘가 3회 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불안하기는 한데… 아마 이겨낼 것 같아. 계기만 있으면. 응. 계기만 있으면.
시선을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상처투성이의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모습이었다.
예상했지만 성치 않은 모습이다.
‘저 정도였나. 조금 오바한 거 아닌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 것 같기는 하다. 마치 톱날로 긁어낼 것 같은 양팔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두 다리 역시 성치 않다.
어떻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 마치 뜯겨 나간 것 같은 외관이다.
목은 심하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은 물론 손자국이 선명하다.
부어오른 한쪽 얼굴, 무엇보다 복부에 난 상처가 너무나도 참혹해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다.
고통스러운지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새하얀 설산을 피로 물들이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모습은 이전과 그대로 잘생긴 모습이었지만 얼굴이 창백해진 것만 같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쏟을 것 같은 안색으로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다.
주저하는 손짓, 뭔가 말을 걸고 싶은지 조용히 저걸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지 이내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었다.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나쁜 신호는 아니다.
아직 이 이벤트의 정확한 클리어 조건을 알 수 없었으니까.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이벤트일지는 알 수 없었으니 곧바로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낫다.
---현성 씨.
-…….
---현성 씨.
-…….
---현성 씨?
-…….
‘이 새끼 말도 해.’
당연하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 저 목으로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네….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네….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매번 되새기기도 했지만 많은 추억을 쌓았네요. 조금은 어색하기까지 했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운 사람이 되기까지….
-…….
---현성 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뭐야. 시바. 노리는 게 뭐야.’
예상했던 전개와 달라 조금은 당황스럽다.
기껏해야 ‘네놈이 날 죽여? 네놈을 원망하고 저주할 테다’ 같은 느낌으로 향할 것 같았던 이벤트가 내가 판단한 것보다 더 평화롭다.
조금 더 잘 만들어진 이벤트 NPC 같은 녀석의 얼굴에 김현성을 위한 적개심이나 분노의 감정은 없다.
오히려 놈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눈빛이었고 모든 걸 이해해 주겠다는 성자의 얼굴이었다.
---제가 원하고 바라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계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만 언제나 제게 보인 것은 이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어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저는 제가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현성 씨에게 씻기지 못할 상처를 남겨…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제가… 오히려… 제가… 죄송할 뿐입니다.
‘도대체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이거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누나. 이렇게 흘러가도 돼?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로 가도 되냐고.
아니, 물론 김현성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는 해.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는 해.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이기는 했다.
몇 번의 작은 이벤트로 이전의 사건을 조금은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검도 주고, 가끔 말도 걸어주고, 용기도 주고, 뭐 내 쪽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주기는 했으니까.
완벽하게 멘탈이 회복됐다고 하기에는 시기상조기는 했지만 최소한 자살시도를 막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니 훌륭한 심리치료가 들어갔다고 하는 게 맞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급속도로 쌓아 올린 게 무너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호흡이 불안정하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다.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치 내 피가 묻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만 같다.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영향 때문인지 내가 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지 내가 내린 검을 꽉 쥐는 것이 보였지만 차가운 금속의 감촉 때문인지 금방 손을 놓아버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갑작스레 현실을 마주했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
-제가… 죄송할 뿐입니다. 제가… 제가…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짓을… 제… 내… 흐윽… 내가… 무슨… 무슨 짓을… 아… 아아….
---…….
-우웨에에엑….
---…….
-기영 씨… 기영 씨.
---…….
허겁지겁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추해 보일 수가 없다.
이 새끼 진짜 대륙의 영웅 맞는지 몰라. 저거 적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물론 그런 낌새는 없기는 한데 혹시 폭탄 같은 거면 어떻게 하려고 가깝게 붙어.
그 와중에 상처 치료하려고 하는 거 봐.
저게 던전 이벤트 NPC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지금 이거 현실이랑 구분을 하고 있는 거 맞기는 한 건가.
누가 여기에 환각 마법이나 무의식 자각 마법 같은 거 뿌린 거야?
-그대로 계세요. 흑… 흐윽… 상처가… 벌어집니다.
---…….
-더 이상 움직이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위험하단 말입니다.
“그거 나 아니야.”
-목은… 목은 괜찮으십니까. 흐윽… 흐으윽….
---네. 괜찮습니다. 현성 씨. 고통은 느껴지지 않아요.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아요. 저는 그의 기억의 파편이니까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그의 작은 기억의 파편….
“거짓말일 거야. 아마. 허접 쓰레기 같은 설정이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현성 씨에게 작은 부탁이 있습니다.
-네? 네….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네….
---제 소원,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기껏해야 자결해라 세이버? 죽어주세요. 같은 대사는… 이미 한 물….
---다시 한번.
-네?
녀석은 김현성의 소매를 꽉 잡고 녀석을 올려다본다.
---다시 한번 저를 죽여주세요.
나조차도 지어본 적이 없는 기묘한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아… 씨바….”
---나를… 다시 한번 죽여줘.
[신화 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메인 이벤트, 희생된 성자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