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4화 마지막 (77) >
계속해서 거대한 굉음이 들려온다. 인간의 주먹으로 인간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힌다.
한 번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충격파가 터지는 것 같다. 역병쓰레기의 머리를 잡고 주먹을 내리찍는 모습은 마치 케루빔과의 일전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당하는 놈의 여리여리한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 이전의 그것보다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
몸이 종이 인형처럼 여기저기 나풀거리는 모습은 가관, 그래도 이쪽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보니 괜히 내 몸이 아픈 것 같은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벽에 처박히고 있다. 온몸이 벽에 튕겨 나가며 날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저항하려 하고 있지만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당황했는지 제대로 수인을 맺지 못하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벽에 다시 한번 부딪혔다. 어느새 놈의 위로 올라간 붉은 짐승이 양손에 깍지를 낀 채로 팔을 망치처럼 내리꽂는다.
땅바닥에 처박힌 놈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그대로 발로 얼굴을 걷어 차버리는 것이 보인다. 당연히 놈의 몸은 다음 벽으로 튕겨 나갔다.
‘인정사정없어요.’
예전에 김현성한테 한 방 맞았을 때가 떠오른다.
‘쟤도 집에 가고 싶다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하고 싶을 거라구.’
딱 한 방으로 정신 번쩍 들었자너.
하물며 저건 김현성의 주먹질이 아니라 차희라의 주먹질이다. 진짜로 때려죽일 것처럼 두드려 패고 있는 주먹질 말이다.
놈이 상향판정을 받았다고 한들, 저 데미지가 쌓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상황에서 곧바로 리타이어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변수는 있다.
바로 저 장소가 리무르아의 둥지라는 것.
저 장소가 차희라의 전장이 아니라 역병쓰레기의 전장이라는 것.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벽이 완충재 역할을 해주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데미지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 놨을 수도 있고, 자신의 약한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곳에 안전장치를 마련했을지도 모르지.
희라 누나 역시 주먹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영 별로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표정이 조금씩 불편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누가 우리 희라 누나 불편하게 했어?’
목과 몸을 분리시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지 도끼를 쥐고 휘둘렀지만 내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촉수 하나가 도끼를 가로막는 게 눈에 들어왔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촉수가 그래도 짓이겨졌지만, 나쁜 수는 아니었다. 저건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으니까.
놈이 리무르아의 둥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의 상황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가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것이 보였다.
코웃음 치며 도끼를 다시 한번 휘두르지만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촉수들이 어느새 둥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계속해서 흉물스러운 촉수를 보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그 촉수가 짓이겨지고 찢기고, 뭐라고 설명하기 싫은 이물질 들이 터져 나오는 모습은 더욱더 인상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영상 찍은 거 생각나기는 해.’
그때의 이기영은 확실히 헝그리 정신 같은 게 있었지. 괜찮은 작품을 위해 자기 한 몸 불사르는 용기 같은 게 있기야 했어.
어느 정도 적폐라인으로 진입한 지금, 제삼자의 입장으로 살펴보니 확실히 조금 더 거부감이 든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꾸물거리는 것들이 끊임없이 재생하고 서로 분열하고 합쳐지는 모습, 기본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색감으로 가득 찬 둥지는 그 어떤 던전보다 더 기괴하다.
‘이건 답이 없는데.’
말 그대로 끝이 없다.
희라 누나가 계속해서 촉수들을 처리하고는 있지만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는 촉수와의 줄다리기의 결과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건….
‘던전 기믹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거야.’
당시의 리무르아의 둥지도 이런 설정이었으니까. 붙잡힌 인간들에게 마력을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그걸로 둥지와 군단을 유지하게 되는 설정이었으니까.
조금 더 강화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기믹 자체가 유지되고 있는 게 맞다.
리무르아의 둥지와 제법 인연이 깊은 희라 누나가 그걸 잊고 있을 리 만무, 하지만 계속해서 도끼와 검을 휘두른다.
상관없다는 듯이 온몸으로 거슬리는 것들을 찢어발기며 전진한다. 회복하는 속도보다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던전의 재생력이 누나를 견뎌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붉은 전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네.”
착실하게 던전의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공격을 퍼붓는 악마의 이마에 도끼를 선물로 남기며 전신의 병사들은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던전을 유지하는 마력을 차단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리라.
---이 더러운 벌레들이!
-…….
---이 더러운 벌레들이!! 감히! 감히!!! 전부 죽여주마!! 전부… 전부 죽여주마!! 이 개자식들!!
-…….
---네년도 마찬가지다. 역겨운 빨간 년!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모두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곳이 네놈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단 한 놈도 말이다….
-…….
‘항상 말은 많아. 쟤는….’
거대한 뼈 방패로 자기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주제에 입 터는 거 하나만큼은 발군이야.
---제기랄… 제길!! 이 개자식들!!
‘악에 받치는 표정이 볼만하기는 해.’
정말로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성을 잃은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격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 둠기영 설정상 저 정도로 컨셉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어쩌면 놈의 안에 있는 본래의 인격이 당황하고 있는 거 일지도 모르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역병군주라는 캐릭터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가설일 뿐이었고, 오류라고 판단해도 상관없는 장면일 수도 있겠지만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녀석을 본 이후에는 어쩌면….
어쩌면 정말 놈의 안에 있는 게 더미 버전의 이기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질 수 없단 말이다. 이런 곳에서… 제기랄… 이런 곳에서 무너질 수는 없어.
찰나였지만 말이다.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는 해.’
제대로 된 역병군주를 디자인하기 위해 더미 버전의 인격을 부여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놈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겠지.
생각보다 잘 버티기도 했어.
역병쓰레기가 실수한 것은 없다. 대부분 놈이 설계한 대로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고, 이쪽에 효과적으로 타격을 주기도 했다.
가끔 깜짝 놀랄 만한 수를 던져서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해 주기도 했지.
근데 겨우 그것뿐이야.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자랑하던 머리는 진청에게 찍어 눌렸고, 야심 차게 준비한 수는 정하얀에게 막혔다.
힘 싸움이야 굳이 말이 필요할까. 희라 누나한테 처맞고 있는 거 보면 답이 나오자너. 애초에 차희라가 둥지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실상 놈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봐도….
‘된다는 거지.’
너도 너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거고.
‘만들어진 놈이 뭘 할 수 있겠어. 새끼야.’
“그러니까 이만 들어가. 새끼야. 이게 시바 하나 된 우리의 힘이죠? 이 역병쓰레기 새끼야!”
---이런 곳에서… 이런 곳에서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단 말이다.
“빛의 힘과 그 동료의 힘을 맛봐라. 희라 누나! 내 몫까지 쥐어박아!”
---이런 곳에서…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단 말이다!
“청이 형도 한마디 해!”
---…….
---제길… 제길… 이렇게 무너질 것 같으냐. 너희 개자식들에게… 이렇게 농락만 당하다 무너질 것 같아? 내가! 내가!! 무엇을 버리고 이 자리에 있는지….
“영문 모를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빨리 너네 집으로 꺼져! 어딜 데이터 덩어리 새끼가!! 인간하고 맞먹으려고 들어!”
---네놈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걸고 여기에 있는지….
“너 그거 이 새끼야. 계약 위반일지도 몰라. 흥분해서 중얼거리면…….”
---나는 질 수 없어. 나는… 나… 나는… 질 수 없어….
아니나 다를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선을 넘었다는 거겠지.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던 녀석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도끼와 대검을 휘둘러 오는 차희라와 대적하기 시작. 결과가 뻔해 긴장이 되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제법 화려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며 희라 누나에게 유령들을 붙이고 있었고 둥지 안에 있는 촉수, 그리고 자신이 소환한 뼈를 이용해 데미지를 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은 나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고함을 내지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눈물이 나올 정도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빌런일 뿐이지. 훌륭한 신성공급원.
날카롭고 거대한 뼈가 공중에서 형태를 갖추며 누나를 향해 쇄도했지만 주먹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개 박살이 난다.
움직임을 상쇄시키기 위해 심어놓은 촉수들은 순식간에 짓이겨 지고 놈이 심어놓은 역병은 애초에 누나의 면역력을 뚫지 못하고 있다.
치이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부가 산성에 닿은 듯한 효과음을 들려주고 있었지만 자체회복력은 녀석의 전유물이 아니다.
---죽어라! 죽어!! 제발!! 죽어라!! 이 미친 괴물아!!!!
용기와 정의의 힘으로 단단히 무장된 붉은 전사를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을까.
---제길… 제기일… 시X… 시X….
-이제 그만 쉬어.
---시X…. 허억… 허억….
꿈도 희망도 없자너.
---푸하… 하핫….
-…….
---푸… 푸하헤하하하하하핫!
‘이 새끼가 정신이 나갔나.’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
---이기는 건 나야.
-…….
---이기는 건 나라고. 내 승리다. 내 승리야. 이 더럽고 구역질 나는 놈들.
“어떻게 해. 이 새끼 실성했나 봐.”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는 당황스러울 지경, 진청 역시 놈의 상태가 당황스러웠는지 조용한 눈으로 역병쓰레기를 살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놈이 정체불명의 마력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폭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칙칙한 마력에 휘감겨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 여우 같은 새끼.”
이 이야기가 어떤 끝을 맺었는지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여우 같은 새끼 진짜!”
마력에 휩싸인 녀석은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간다. 익숙한 모습이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이전에 많이 보던 놈의 모습은 틀림없이 벨리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너무 멍청했나.’
거대하게 덩치를 키우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 팔을 휘두르자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라가 튕겨져 나간다.
‘왜 생각 못 했지.’
역병군주의 엔딩은 놈의 죽음이 아니라 벨리알과 베니고어의 싸움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걸 왜 까먹고 있었을까.
‘제기랄….’
메인 이벤트 역병군주의 클리어 조건은 역병쓰레기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클리어 조건은….
“베니고어를 소환하는 것.”
분명히 이벤트가 있을 터였다. 놈이 벨리알의 모습으로 이전의 엔딩을 그리자고 했다면 이쪽 역시 베니고어를 소환할 수 있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을 터였다.
조금 더 세세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천천히 돌이켜 보고 이전의 이벤트들처럼 이번 이벤트도 조심히 건넜어야 했다.
“이 개새끼가 블러핑을 쳐?”
흔히 하는 수법에 뒤통수를 맞은 격. 놈은 우리가 리무르아 둥지를 무대라고 생각하길 원했고 전장을 자신으로 한정 지었다.
숨겨져 있는 퍼즐들을 지나치게 만들었고 이스터 에그나 히든 피스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던전의 이벤트나 퀘스트의 공략요소를 내 팽개친 채로 오직 자신에게만 향하도록 화살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녀석으로서도 도박이고 무리한 수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이쪽은….
“속았네. 시X…. 이 멍청한 악마소환사 새끼!”
---…….
“이 쓸모없는 새끼!”
마침내 리무르아의 둥지에서 뛰쳐나온 거대한 악마가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아마 모두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기는 건….
-나야.
딱 한 명만 제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