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0화 마지막 (73) >
“빨리 하얀이 부르라고!”
-부길드마스터!
“…….”
“막을 수 있겠지?”
아마 막을 수 있을 거야.
무조건 막을 수 있을 거야.
“이 배신자 새끼! 그림자의 영웅을 받고도 뒤통수를 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제기랄! 그리고 그림자의 영웅은….
“그럼 뭐야. 이 새끼야. 이게 뭔데요? 군사님.”
---지금 알아보지.
“뭐 떨어지지 않는다고 개소리 지껄이시더니 꼴이….”
---막아낼 수 있을 거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
“근데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 어차피 군사님이 뒈지면 저거 사라지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그런 시스템이었으니까.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은데 그냥 깔끔하게 희생합시다. 어차피… 그림자의 영웅이었으니까… 진짜로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슬슬… 나도 쓸데없는 걱정하기 싫은데… 이제 마무리합시다.”
---내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건 던전의 법칙을 벗어났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내 존재가 사라진다고 해서 저 마력이 사라질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 더군다나 지금 내가 빠지면 아쉬운 것은 네가 아닌가.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라. 지휘본부가 직접 타격받은 것뿐이다.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야.
“일반적인 상황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지. 안 그래요? 위에 있는 마력은 당신이 띄운 거고, 악마 소환 쓰레기가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라면 역병 쓰레기가 위에 있는 시스템을 해킹했다는 소린데. 시바. 그게 말이나 된답니까.”
---던전의 시스템을 해킹한 것이 아닐 것이다. 굳이 한마디 얹어보자면 허락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싶군.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은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야. 너 역시 메인 이벤트, 악마 소환사를 그대로 동결시키고 나를 이용하지 않았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묶여 있는 이벤트의 요소 중 하나를 그 가짜 놈이 사용했을 뿐이야. 당연히.
“마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전과는 이야기가 달라졌을 거라는 거네요.”
---사실상 메인 이벤트 악마 소환사와 내 역할은 이대로 끝났다는 거지. 덕분이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도 가능해진 것 같군.
조혜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 떼. 이 새끼야.”
---시험해 본 것뿐이다. 서로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저번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게 가능해 보이는군. 어쩌면 이 장소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
---무엇보다 그 미친 여자가 이걸 막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만. 물론….
물론 그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진청의 말대로 지금 라이오스 위에 있는 마력 덩어리가 던전의 통제를 벗어난 마력이고 정하얀의 힘으로 받아칠 수 있는 마력이 맞다면, 녀석이 저걸 그대로 떨어뜨릴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떨어지고 있는 마력에 유령이 달라붙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칙칙한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마력은 대충 보기에도 위험하다고 느껴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정하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지만, 옆에 있는 한소라의 표정을 보니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점점 더 덩치를 키우는 마력은 교국과 공화국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고….
종국에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이 투명한 장벽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
커다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운 정하얀은 팔을 뻗었고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었던 박덕구는 뛰어들어가 방패를 세운다.
마력을 휘감았던 유령 하나가 정하얀을 향해 쇄도하는 것을 본 녀석은 처음 라이오스 사태가 일어났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정하얀을 지키고 있다.
한소라 역시 다르지 않다. 힐끔힐끔 정하얀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고 사방에서 손을 뻗어오는 유령들과 맞서고 있다.
‘시바.’
연기 같은 것들이 정하얀의 방벽을 뚫고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
깜짝 놀란 정하얀이 다시 한번 주문을 외우자 정체불명의 연기도 투명한 마력의 벽에 막힌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중에서 으직으직거리는 비상식적인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무리 없이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점점 더 초조해지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항상 정하얀의 표정을 관찰하다 보니 저게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마력 방벽의 곳곳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니지, 정확히 이야기하면 균열은 아니지. 오히려 무시한 채로 떨어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마력의 영향을 받았는지 점점 몸을 일으키는 썩은 시체들의 모습은 절로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소환 마법.’
급하게 다시 한번 캐스팅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 소환 의식 자체를 마력 방벽으로 캔슬할 수 없을 테니 곧바로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그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언데드들은 땅바닥을 딛고 일어서 주문을 유지하고 있는 파티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내가 자리에 없다는 것뿐이지 않을까.
‘그 와중에 돼지는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는 이들에게 점점 밀리고 있고….’
물론 저 돼지의 방어력이 언데드들에게 뚫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계속해서 몸에 달라 붙어오는 녀석들을 떼어내며 정하얀을 지키고 있지만….
‘아냐.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진짜 위험한 것은 언데드가 아니라 위에서 떨어지는 마력이었으니까.
저 언데드들은 정하얀의 캐스팅을 방해하기 위험이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니다.
-누님! 누님! 거, 소라 후배도 이리로 오라니까!
한소라의 팔을 잡아당기고 정하얀과 함께 꽉 껴안고 있는 모습, 일일이 막을 수 없으니 그냥 몸으로 막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커다란 몸으로 한소라와 정하얀을 꽉 껴안고 등으로는 언데드들을 막아내며 뚝심 있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는 했지만 저건 정답이 아니다.
박덕구의 몸으로 저 질량을 전부 다 견뎌낼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내가 버틸 거요! 내가 버틸 거라니까!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안심하쇼. 형님이 오기 전까지 누님을 지킨다고 약속했으니까! 약속한 건 지킨다는 거 아니요!
-정하얀 님! 괜찮으세요? 정하얀 님!
-거, 소라 후배도 같이 지켜줄 거요.
-키에에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거 주문만 외우쇼! 주문만! 내가 딱 버티고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쇼!
-정하얀 님!!
정하얀의 손을 꽉 잡고 눈을 감고 있는 한소라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정하얀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문을 외우기에 여념이 없다.
집중력이 극한까지 치달은 것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성질에 대응하려고 하고 있다.
어쩌면 블러핑의 한 종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은 마력, 두 번째는 연기, 세 번째는 소환 마법, 다음에는 어떤 게 올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으니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언데드들이 박덕구의 위로 올라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키에에엑 소리와 함께 몰려든 놈들이 계속해서 녀석의 등을 두드린다.
종국에는 파묻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된 와중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놈들이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한소라가 간혹 주문을 외우는지 몇 놈들이 튕겨 나가고 있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으니 티가 나지 않을 지경.
분명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 역시 불안감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게 된다.
거대한 언데드 산더미들을 등에 지고 버티고 있는 박덕구는 물론이거니와 점점 표정이 변하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어렵다.
순수한 질량으로 눌러버린다는 발상은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이기도 하다.
‘시바.’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끄응….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돼지 새끼 근력이 높은 편은 아니잖아.’
---제법 쓸 만한 벌레가 함께 있는 모양이군.
‘그 와중에 이 새끼는 참 재수 없네.’
하지만….
“투자한 게 많아.”
---당연히.
“투자한 게 많을 거야.”
---그만큼 이쪽의 존재가 가짜 놈을 거슬리게 했나 보군.
놈이 지휘본부에 직접 타격을 주고 싶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녀석들을 짜증 나게 했다는 것과 진배없다.
주도권을 빼앗기기 싫은 표현이었을 것이고 전장을 확대시키려는 시도나 다름이 없게 비친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놈이 얼마나 이 건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 정하얀을 초조하게 할 정도의 비용을 투자하는 것으로 모자라 전선에 있던 유령들까지 끌어왔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 이상 흔들리기 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들어진 가짜 놈이라고는 해도 네놈과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는 모양이로군. 덩치를 부풀린 꼴이 우스워.
“단순히 덩치만 부풀린 건 아니라고 봐야죠. 실제로 이건….”
---하지만 자기 약점을 드러낸 꼴이다.
‘근데 이 새끼 진짜 배신 안 때린 거 맞아?’
키에에에에엑 소리와 함께 언데드 몇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때. 조혜진이 곧바로 창을 들어 몇 놈을 휩쓸고 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악마 소환 쓰레기가 당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슬쩍 몸을 뒤로 내뺀 뒤에는 손바닥으로 놈의 가슴을 밀어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콰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뚫고 저 멀리 처박힌 언데드의 가슴에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신체 능력도 괜찮았었나.’
근접 직군 못지않은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었지. 대부분은 조혜진이 처리하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는 솜씨는 꽤나 수준급이다.
공격을 흘리기 좋아하는 타입인지 손등으로 공격을 흘리거나, 주제에 품위를 잃지 않겠다는 듯 망가지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역겹게 보인다.
‘지 같이 싸우네. 진짜. 비열하고 야비하게.’
-제법이시군요.
---그 정도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는 기본 소양이니…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놀랍군. 자신이 무인이라 외치는 이들을 많이 만나왔지만 그 모두가 그대만큼은 아니었다. 품성도… 실력도 말이다.
“저 새끼 좀 닥치라고 해요.”
-…….
---그러고 보니 괜찮은 건가.
“뭐가?”
---그 미친 마법사 쪽 말이다. 네놈이 아끼는 이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 아니로군.
뭐, 사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돼지 새끼의 두 다리는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고, 한소라의 마력은 탈진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심지어 정하얀의 입과 눈에서 마력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자너.
내가 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보다는 상황이 더 나았겠지.
솔직히 그래, 걱정은 돼.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저 파티 안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어.
하지만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약간은 긍정적으로 변화한 부분도 있었으니까.
-이 더러운 언데드 놈들아!!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이 추악한 악마의 피조물들아!
콰앙 소리와 함께 일행을 덮고 있는 언데드 때 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할배들 힘도 좋아.’
그걸로도 모자라 형형색색의 마법진들이 정하얀의 방벽에 힘을 보태 주는 중.
마탑 할배 연합이 기다란 수염을 푸들푸들거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정하얀 님을 지켜라!
분명히 몇몇은… 눈이 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