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8화 마지막 (71) >
한쪽은 대륙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든 타락한 역병 쓰레기.
사실상 연방이라는 집단이 국가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피해를 끼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이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긴 빌런이었다.
물질적 피해나 국가적 손해는 정산할 수가 없었을 정도.
멸망과 예언의 날은 외신전쟁이었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것은 27군단 소환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쪽은 설명이 필요 없는 악마 소환 쓰레기.
27군단 소환 사태 이전에 악마 소환 쓰레기가 있었다.
평화로웠던 대륙에 전쟁이라는 방아쇠를 당겨 인류를 혼돈에 빠뜨린 장본인. 자신의 부하들 마저 언데드로 만들어 인류에게 창을 들이밀게 한 진짜 악마.
최초의 악마 관계자는 이토 소우타였지만 역시나 악마의 위험성이나 경각심을 심어준 것은 공화국의 악마 소환 쓰레기가 아닐까.
4인의 외신이나 이질적인 빛을 제외하고는 대륙을 가장 대표하고 있는 빌런이 바로 요 둘이다.
단순히 힘만 센 멍청이들이 아니라 음습하고 비열하며 인간성 따위는 밖으로 내던진 악당.
그런 빌런들이 서로를 인식하며 두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진귀한 광경이기도 했다.
‘솔직히 좀 로망이기는 하자너.’
개인적으로 진흙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는 이야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쓰레기 둘이 서로 물고 헐뜯으며 점점 더 개싸움으로 치닫고 종국에는 파멸로 가라앉는 빌런 대격돌.
조금 마이너하기는 하지만 항상 말하듯 원래 나쁜 놈들끼리 싸우는 게 가장 즐거운 법이 아니겠는가.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역병 쓰레기였지만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설정이었던 만큼 아마 머릿속이 조금은 복잡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것은 의구심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전선의 기류가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을 테니까.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바깥에 있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력들은 평소와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조금 넓게 보면 그렇지 않다.
크고 작은 백십여 개의 전선들이 한순간을 기점으로 행동 방침을 바꾼다는 것은 꽤나 장관이고 절경처럼 느껴진다.
---우습군.
‘그렇게 우습기도 느끼지 않을 거야.’
당장 본대와 본대가 격돌하거나 커다란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청의 목표는 본대가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 아니, 본대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었으니까.
28시간 안에 출정 준비를 끝내 놓는다는 것은 차희라가 움직이는 부대가 적의 심장까지 닿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일련의 과정들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다름이 없다.
자원을 채취하여 병력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에 있는 병력들을 재정비하고 부대를 새로 지정해,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와 최적의 시간을 마련하고 커다란 전투를 위한 끊임없는 소모전과 전선의 줄다리기를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
적보다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적이 가지고 있는 수에 대응하며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병과들을 소모시키는 과정.
그런 의미에서 역병 쓰레기가 뿌려놓은 씨앗은 최적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히 역병 쓰레기는 자신이 원하는 배경을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까다로운 지형을 침범 불가 지역으로 만들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적 사제와 병력들을 동결시켰다.
단순히 인류에 대한 증오로 감염지역을 만들었다기에는 거미줄처럼 많은 것이 얽혀 있다.
여러 가지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최선의 전장을 만드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아니… 최소한 성공하는 도중이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차희라가 정말로 무능했다면 여기까지 끌고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능형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했지만 결코 적지 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유능한 이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육감.
설명할 수 없는 전장도 저절로 깨닫게 되고야 마는 육감이었다.
그녀의 본능은 전투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전술에서도 영향력을 미친다.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과 후퇴하는 타이밍을 깨닫고 있으며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촉박하지만 출정 기간으로 3일을 주겠다고 말한 것도 최대한 빨리 본대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본능에 기인한 것이리라.
차희라가 생각한 72시간.
악마 소환 쓰레기는 그 72시간을 28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감염 지역들을 묶고 최적의 루트를 마련한다. 잉여병력들을 소모시켜 역병 쓰레기가 자리 잡은 전선의 주요 병력들을 밀어낸다.
‘쓰레기자너.’
역병 쓰레기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전선을 재해석해 녀석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전선으로 재정의한다.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쉽게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밀어내! 밀어내라!
-적 병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밀어내!! 밀어내란 말이다!
-덤벼! 새끼들아! 이 악마 새끼들!
-키에에에에엑!
한 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는… 작지만 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전투였으며 악마 소환 쓰레기가 역병 쓰레기에게 던지는 경고장이었다.
---만들어진 가짜는 만들어진 가짜일 뿐인가.
‘이 새끼 신나 보이네.’
이제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주제에 몸은 솔직하다.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에 오만함이 보인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벌레가 발악하는 꼴이 가상하기는 하다만 겨우 그것뿐이야. 발버둥 치는 것에 불과하다.
역병 쓰레기 역시 턱을 올리며 입을 열고 있지 않은가.
---가짜 놈은 빼앗기고 싶지 않은가 보군.
“상황이 좀 어때요? 좋게 돌아가고 있기는 합니까?”
---언제나 같은 이야기다. 취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놓아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만들어진 가짜 놈이 챙긴 이득에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지.
‘땅따먹기라는 게 원래 그렇기는 해.’
놈이 차지하고 있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 많은 전선을 가지고 있다는 건 곧 한정적인 병력을 전선에 분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악마 소환 쓰레기가 내던진 한 수는 커다란 둑에 새고 있는 여러 개의 구멍을 막을 수 있냐고 묻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 벌레는 병력들을 버릴 셈인가.
---버리는 것이 아니다. 희생시키는 것도 아니지. 그저 묶어두는 것뿐이다. 가짜 놈이 가지고 있는 병력과 함께 말이다.
---모두 죽여주지.
---이 가짜가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죽일 수 있을까.
---도노반을 파견하겠다.
---지키고 싶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네임드 개체를 파견하는 게 전부일 터. 하지만 다른 전선들은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보여 봐라. 가짜 놈.
---나머지는 가치가 없는 전선일 뿐이다. 사용할 수 없게 만들면 그만이다. 제법 재미있는 흉내를 낸다만 네놈이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힘에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벌레의 무능력함이 가엽구나. 이것 역시 전술이다. 벌레의 머리로는 반칙처럼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지휘관이나 네임드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본래 전장에 영향력을 끼치게 마련이다. 대단해 보이기는 하다만 그래 봤자 전염병 살포나 감염 지역을 만드는 시답지 않은 짓거리. 범위가 정해져 있고 발동조건이 존재한다면 막을 수 없는 것도 아니야.
---하등한 인간 놈이.
---재미는 없지만 원본보다 낫구나. 가짜 놈.
‘진짜 개판이다. 개판이야.’
기를 쓰고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빌런들이라 그런지 시바 지독하다. 지독해. 두 놈 다 하나도 양보 안 하려고 하자너.’
본래 줄 건 주는 것이 맞지만 줘야 하는 것도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놓아 주는 것이 보인다.
자신이 왼쪽 뺨을 맞는 대가로 오른쪽 뺨을 강하게 때릴 수 있다면 웃으면서 왼쪽 뺨을 내놓는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확실히 역병 쓰레기랑 나는 성향이 다르기는 해.’
아마 이지혜의 설정이지 않을까.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하기는 애매했지만 놈이 더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쪽이 싸움을 회피하고 빙빙 돌아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저쪽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나는 확률이 높은 곳에만 주사위를 던지지만 저쪽은 애매한 쪽에도 주사위를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확률에 대한 확신이 아닌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역병 쓰레기의 설정답게 하등한 인간 놈들을 우습게 여기는 행태였다.
적절한 예는 아니고 조금 과대해석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누나가 내게 조금 더 단순해져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누나 둠기영 참 좋아했지.’
마치 서로 마주 보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두 빌런의 피 튀기는 신경전.
---벌레들을 쓸어 담을 시간이군. 네 오만함이 낳은 결과다. 하등한 놈.
---이 멍청이는 자신이 둘러싸여 있다는 건 알고 있나.
---함께 쓸어주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가. 재미있군.
멋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혼잣말하는 거 보면 막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기는 해.
나쁜 의미는 아니고… 아니, 눈빛 보니까 사이코처럼 보이네.
진짜 사이코 같어, 너네 둘이.
---…….
“왜 그러세요? 군사님.”
---뭐지? 나는… 이봐. 듣고 있나. 연방 13연대 지휘관. 나는 너희들에게 해당 지역을 벗어나라는 명령을 내린 기억이 없다. 지금 당장 복귀하도록.
-13연대 지휘관 스미스 대령입니다. 본 연대는 19분 29초 전에 같은 통신 채널로, 분명히 홀슈아 계곡으로 향하는 명령을 전해 받았습니다. 이상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 그거 가만히 놔둬요. 그거 따로 병력들을 좀 쓸데가 있어서. 그러니까… 홀슈아 계곡으로 향할 겁니다.”
---뭐?
“홀슈아 계곡 점령전 벌이려는 거 아니었어요?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
“…….”
---뭐?
“…….”
---…….
“뭐요?”
---이… 이 멍청한 놈! 제기랄!
“아니, 왜 욕을 하고 그래요?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도움 좀 주겠다는데.”
---이 머저리 같은 놈! 제길! 네놈이 전부 다 망쳤다.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니… 이 새끼 왜 이래? 홀슈아 계곡 점령한다면서! 기존 병력 가지고 그게 돼?”
---병력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13전선에 있는 병력들을 이동시키면서까지 점령할 이유가 없었단 말이다. 점령이 불가능하다면….
“잉여병력 소모시키고 끝나기에는 아쉬운 전선이에요. 스미스 대위 관상을 보니까 딱 점령할 관상이라서 그래. 지휘관 기록이랑 스펙 좀 열어서 살펴봐요. 군사님도 여기 점령하면 이득 아닙니까.”
---아까운 병력만 버리게 생겼군. 제기랄… 제기랄! 이기영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머저리 같은 놈. 됐다. 굳이 설명하기에도 입 아프지. 어차피 네 머저리 같은 방해 공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병력이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말하지. 다음에는 절대로 건드리지 마라. 의미 없는 블러핑으로 내가 짜놓은 판을 망치지 말란 말이다.
‘이 사이코 새끼. 시바, 언제는 안 한다며. 이제는 됐다며.’
빌런이라 그런지 성격도 거지 같아.
슬그머니 조혜진에게서 통신 채널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이쪽의 행동이 본인이 짜놓은 판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그거 알아? 나는 스미스 대령 믿어. 멋있는 수염 달고 있는 스미스 대령 믿는다구. 여기 잭팟이야.
-연방 13연대 지휘관 스미스 대령입니다. 홀슈아 계곡 전선의 점령 완료 보고를 드립니다. 미리 전달해 주신 명령에 따라 14전선의 지원을 위해 병력들과 합류할 예정입니다. 피해 보고 상황은 병력이 움직이는 중에 정리해 보내드릴 예정이며… 명령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
“…….”
---이… 이상 없다. 그대로 진행하도록.
“…….”
---나쁘지 않군.
“뭐요….”
---이기영….
“네? 뭐라고?”
---사과… 사과하도록 하지.
“쓰레기 같은 머저리라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요?”
---실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뭐라고?”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