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0화 마지막 (63) >
‘잃을 것 같아?’
“시이발….”
“형님, 형님… 괜찮은 거요? 뭐, 뭔 일 있는 거요?”
“넌 좀 꺼져 있어. 새끼야.”
“아니… 무슨….”
‘내가 이번에도 잃을 것 같아?’
“뭐 이딴 게….”
“형님!”
“아! 꺼지라고! 이 돼지 새끼야! 일단 좀 저리 가 있으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밀려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시바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 힘 세자너.’
조혜진의 근력을 잠시 잊고 있었다. 몇 발자국 밀려난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창백해진 얼굴과 뭔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몸짓이 눈에 띈다.
정하얀도 다르지 않다. 잠깐 동안 움찔거린 이후에는 조용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중, 뭔가 손을 뻗으려고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손을 뻗지 못하고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소라도 깜짝 놀란 듯 조용히 정하얀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다.
“아, 아. 어… 으… 그러니까… 오, 오… 오빠….”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에 눈물이 맺힌 모습이 이전에 봤던 모습과 오버랩된다.
‘구… 구해줄… 켁… 올 거야… 오빠는… 올 거야….’
“뭔데….”
‘와줬어. 구하러… 와줬어.’
“진짜 뭔데….”
‘다행… 다행… 이제는… 정말… 함께… 사랑….’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하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헤실헤실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녀가 품고 있었던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든 것 같은 느낌, 정하얀과 박덕구가 보기에도 지금 내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특히나 한소라의 얼굴은 미치광이 정신병자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찾아온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가장 1차원적인 가설은 아마….
‘혜진이 몸이라서 그런 건가.’
강림이 정확히 어떤 부작용을 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에 봤었던 1회 차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머릿속 메인 시스템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 같은 느낌.
자기 자신의 머리통에 이상이 있다 없다 자가진단하는 것도 우습기는 했지만 이런 말로밖에는 지금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겠다.
‘1회 차의 기억이 흘러들어 온 건가. 아니면… 가면의 영웅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건가….’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겠지.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으니까.
이기영 그 개 쓰레기 사기꾼 새끼의 블러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가면의 영웅의 잔재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내다 버린 것은 아니었다.
외신 전쟁의 마지막에 김현성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괜스레 뇌리에 스친다.
내게 말을 걸었던 녀석도… 분명히 몇 가지 전조가 있기는 했다.
애써 무시하며 머릿속 저편으로 안치시켜 놓았을 뿐이다.
안 그래도 불안정해진 정신상태에서 박덕구가 스위치를 눌러 버린 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확실한 것은 없었지만 뭐라도 결론을 내리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선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 악마 소환사 새끼.’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진청이 시야에 들어왔으니까.
박덕구와 정하얀은 나를 자극하는 게 별로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중.
아까와 마찬가지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치를 취한 이후에는 다시금 판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포박된 채로 발버둥 치는 작은 박덕구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너무 흥분했어.’
안 보여줘도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입안이 쓰다. 약점을 잡힌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씨발, 너무 흥분했다고. 이 멍청한 새끼. 이기영, 아니, 가면의 영웅 이 나쁜 새끼.’
그렇게 흥분할 이유는 없었다. 아직 게임이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가짜 돼지가 뒈진다고 한들 이 게임에서 지지만 않는다면 진짜 돼지는 죽지 않는다.
적당히 웃어넘기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대놓고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아니, 내가 이곳에 와서 한 행동 자체도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어쩔 수 없었어. 시바 커피가 너무 맛있었자너.
너무 감정을 많이 드러낸 건가.
애초에 더미혜진의 리타이어와 함께 등장한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덕구와 하얀이 에게 반가워하는 기색을 너무 내비쳤다는 게 원인일 수도 있었지만… 아마 박덕구를 생포한 것은 우연이었을 것이다.
이지혜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가 돼지를 아낀다는 쓸데없는 정보까지 전해줬을 리는 없다.
녀석의 입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찔러본 수에 지나치게 과민반응했다.
‘이러면 안 돼.’
---이제야 대화가 통하겠군.
“원하는 게 뭡니까.”
---알고 있을 거라고….
“인질로의 가치는 없을 겁니다. 죽이실 겁니까?”
---글쎄. 그것이 중요한가. 어차피 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저 덩치 큰 바보가 죽든지 말든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일 텐데. 아니면 자신이 없는 건가. 전황만 보자면 네게 유리한 판이 깔린 것이 아닌가. 우습군.
“…….”
‘이 개새끼.’
“넌 눈이 마음에 안 들어. 이 악마 소환사 새끼야.”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이렇게 개인적인 문제를 겪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지만…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 아까 전에 한 말은 수정하마. 네놈은 이미 미쳐 있는 것 같군.
‘정신 나간 사이코 새끼.’
이 새끼가 원하는 게 뭔지 감도 제대로 오지 않는다. 아니, 물론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하다.
‘제대로 싸워보자 이거야?’
당장 눈에 보이는 이유는 이것 정도밖에는 없다.
물론 함정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우리는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패를 꺼내며 싸운다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는다. 오히려 멍청한 짓이다.
대화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 자체가 통수의 통수를 위한 빌드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듯하기도 해.’
공화국의 군사는 자신의 프라이드를 지키고 싶을 테니까. 자꾸만 다른 곳으로 물타기 하려는 내가 아니꼬워 보일 수도 있고….
진심으로 전쟁에 임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다. 놈이 말하는 대화를 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지.
복수 대신에 이전의 잘못과 실수를 바로잡는 것을 선택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
결론을 말하자면 내가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야 녀석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녀석도 자신을 드러낸 셈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내가 깨닫지 못할 거라고 가정했을 거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천천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계속하지.
나 역시 이것저것 재보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 일단은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판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계속된다. 나는 도발을 하기도 하고 밀고 당겨보기도 하지만 녀석은 오롯이 판에만 집중하고 있다.
더 이상 대화하는 게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놈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이야기하자는 거지?’
계속해서 거대한 전투가 벌어진다. 순수한 전술과 전술의 부딪침은 아니었다.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서로의 병력에 점점 피해가 누적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녀석의 표정에도 초조함이 깃든다. 병력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눈에 보인다.
나 역시 마찬가지.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없다.
아주 작은 손해에도 서로가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마검사 정진호가 김현성과 검을 부딪치고 병력과 병력이 뒤엉키기 시작하며 난전이 시작된다.
후퇴와 함정을 반복하고 계속해서 서로에게 맞춰 진영을 바꾸는 병력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컨트롤하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똑똑하기는 해.’
승기를 잡은 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전선에서 승전고가 울린다.
유기적인 전장의 흐름을 한눈에 담을 수가 없다. 하지만 눈이 트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바, 전투 중에 성장하자너!’
역시, 시바, 빛은 이래야지.
스탯이나 특성에는 적혀 있지 않은 눈이 트이는 것 같다.
이 작은 판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이기는 했지만 점점 집중하게 된다.
코에서 흐르는 코피를 한 번 닦은 이후에는 다시 판을 내려다본다.
악마 소환사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무너진 전선이 신경 쓰이겠지. 거기 함정이야.
눈치챘어? 그럼 이건 어때.
이건….
‘이건 어떻습니까.’
또 뭐야.
‘재미있는 수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군. 기왕이면 그 여자가 더 좋았을 뻔했다. 이렇게 대면하면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만 네놈과는… 네놈과는 여전히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죽어 가시는 주제에 원하시는 건 참 많으십니다. 군사님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대놓고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니. 기본 매너는 지키셔야죠. 네?’
‘…….’
‘사실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누나도 같이 오고 싶어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누나랑 같이 오면 싸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누나는 당신을 살려두고 싶어 할 것 같거든. 인재 욕심도 많고 어디 쓸 데가 있나 고민해 볼 것 같단 말이야. 나도 설득당할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왔어요.’
‘…….’
‘나도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지나치게 유능해. 우리가 쓰기에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야.’
‘패배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다정하군.’
‘언제부터 우리를 알고 있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군사님 때문에 어긋난 계획이 한두 개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를 이용하기까지 했잖습니까. 몇 번이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한 게 이상합니까? 또 누가 알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몇몇은. 그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네놈들이야 곧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이기영.’
‘…….’
‘…….’
‘역시 당신은 안 돼.’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
‘…….’
‘자 그럼 슬슬 본론입니다.’
‘…….’
‘예전에 있었던 청소. 그때 그 계획에 동의했던 사람들 명단… 군사님이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공화국으로 망명한 그 새끼. 그 새끼한테 전부 다 들은 거 맞으시죠?’
‘이미 네놈도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하는 것뿐이지.’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죽는 마당에 자존심 챙기지 마시고 시원하게 입 열어주고 가세요. 어차피 물어볼 사람은 많으니까.’
‘…….’
‘…….’
‘제국의 샤를롯트.’
‘말이 통하네.’
‘캐슬락의 송정욱.’
‘죽였고.’
‘교황청의 말렌 추기경.’
‘죽였고.’
‘다완의….’
‘네. 네. 네.’
‘실리아의….’
‘죽였네요.’
‘그리고….’
‘…….’
‘린델의 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