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8화 마지막 (51) >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발걸음을 내디뎠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갑작스럽게 변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발을 내디딘다.
“오스칼 님!”
“오스칼 님! 피하셔야 합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병력들과 함께 몸을 부딪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명을 지르며 피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보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병력들도 보인다.
검을 빼 들고 적들과 맞서고 있는 샤를롯트 님 역시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처절한 모습이었다.
창밖의 위를 올려다보자 조용히 교국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빛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역자다! 저곳이다! 저곳이다! 더러운 반역의 무리다!
---제국을 배반한 황녀여! 혈육을 잡아먹은 제국의 황녀가 여기에 있구나! 제국을 망친 암 덩어리가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있구나!
“나는 황녀가 아니다. 제국의 망령들이여!”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제국의 의지를 부정하고 있는 것인가!
“제국의 의지라는 것은 희생된 이들과 함께 묻었다. 나는 교국의 시민이며!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다. 잊혀진 망령들아!”
---그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대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대가 황가의 혈통임을, 그대가 제국의 주인임을 부정하는 것인가!
“나는 특별하지 않다! 진정으로 특별한 것은 이 나라를 바꾼 이들이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이들이야말로 특별한 이들이다! 그대들이 특별하다고 말한 제국의 황가를 돌이켜 보라!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을 어떻게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라를 바꾼 이들이야말로 나라의 주인이며! 이 땅 위에 흩뿌려진 피야말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어리석구나! 그대는 어리석구나!
“진정으로 어리석은 것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그대들이 아닌가! 스스로 족쇄를 차려고 하는 그대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이들이 아닌가! 우리는 투쟁하고 싸울 것이다! 나 역시 이곳에 뼈를 묻을 것이다! 멸망한 제국의 황녀가 아닌! 교국의 샤를롯트로서 후대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들려올 리가 없는 목소리가 귀에 틀어박힌다. 교국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어째서 저항하는 것입니까. 샤를롯트 님.”
분노한 망령들을 달랠 방법이 있을 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라면 그들을 진정시킬 방법이 있을 터였다.
“어째서….”
시민들을 살리고자 했던 그녀가 어째서 병사들과 함께 검을 들어 올린 것일까.
아니, 사실은 답을 알고 있다. 그녀는 역사를 지키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 우리의 찬란한 저항의 역사.
우리들의 자부심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희생과 피로 쌓아 올린 교국의 미래를! 적들에게 맡기지 마라! 그대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기억하라!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일구었는지 기억하라!”
목소리가 귓속으로 틀어박힌다. 심장을 두드리는 것만 같다.
함께 싸웠던 동지를, 미래를, 영광을, 후대를,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그녀 역시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피를 흘린 혁명이 실패라고 말한 그녀조차 그것들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아마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것일지도 모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옆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튕겨 나가고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정신을 잃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잠깐 동안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폭발로 만들어진 커다란 구멍이 보인다.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고 전쟁의 열기와 함성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다시 한번 위를 바라보자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빛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난간으로 올라 외벽의 균열을 붙잡았다.
무모한 짓이야.
그래. 무모한 짓이다.
떨어지면 죽을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리스는 영웅도 아니다. 특별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까지 빛의 아들의 환영에게 다가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분을 설득하기라도 하려고?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가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거짓말로 똘똘 뭉친 내가 겨우 이런 거로 달라질 수 있을까.
하지만….
“달라지고 싶어.”
달라지고 싶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이었지만, 고작 빛의 아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힘겨워하는 사람이었지만 해낸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기대감을 품게 된다.
팔과 다리가 떨리고 숨이 다시 한번 차오른다.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에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아아악!”
-죽여라!
“막아라! 막아!”
계속해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후두둑 후두둑 소리와 함께 성벽 위의 잔해들이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팔을 뻗는다. 얼어 있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위로 몸을 옮긴다.
오스칼이 아니라 아리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제발… 제발!”
다시 한번 팔을 뻗었을 때였다.
“아!”
발을 헛디뎠는지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작은 것도….’
이런 작은 것도 해내지 못했구나.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로 아리스는 여기서 죽는구나.
그리 생각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뜨셔도 됩니다. 아리스 님.”
“…….”
“아리스 님.”
“당신은….”
“파란 길드의 조혜진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어, 어째서 조혜진 님이 여기에….”
“부길드마스터께 향하고 계신 게 맞으십니까?”
그리폰을 타고 있는 인형이 손을 잡고 위로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 네!”
“모셔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도움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 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지만….
“아리스 님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면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용히 창을 넘기는 조혜진 님의 모습이 보인다. 찌릿한 느낌과 함께 창이 손안에 들어온다.
미소 짓고 등을 떠미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 시야에 비쳤다.
지원군이 도착했는지 막아서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비명 소리와 함께 교국을 지키고 싶어 발버둥 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빛의 아들이시여.”
-…….
“빛의 아들이시여!”
-…….
“제발 저들을 멈춰주시옵소서!”
-…….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모든 것이 저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저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자격이 없는 이를 믿고 따른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의 죄가 아니니 부디… 부디….”
-…….
“빛의 아들이시여…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부디… 대답해 주세요. 제가 떠안을 수 있게… 제 역할을 끝마칠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기영 님.”
-…….
“이기영 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이지 않습니까! 그 누구보다 이기영 님이 이들을 가장 사랑하시지 않으십니까!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잘못된 것은 제국의 백성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기영 님!”
-…….
“저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누군가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손에 쥔 창을 꽉 쥐고 다시 한번 이기영 님을 바라봤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저들을 가엾이 여겨. 제발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으면 합니다. 빛의 아들께서 사랑하시고 아끼는 이들을 위해… 마지막… 마지막 자비를… 흐윽…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창에서 빛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이미 기회를 주었노라.
자신에게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이들이 위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나는 이미 기회를 주었노라.
“제가….”
-…….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저들을 용서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하시면 끊겠습니다. 평생을 영겁의 고통에서 헤엄치라 하시면 그리 하겠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게 죄의 심판이라면… 이기영 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시녀 아리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나는 이미 기회를 주었다고 말하였다.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회를 주셨다고 하신 건지, 이기영 님께서 주신 기회가 어떤 것인지, 아둔한 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대.
“…….”
-그대야말로… 내가 저들에게 내린 기회이니라.
“…….”
-자랑스러운 혁명의 딸이여. 그대는 나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노라. 내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자격을 만든 것이며, 그대 스스로 쟁취한 것이며, 그대 스스로가 변화한 것이다.
“흐윽… 흐으윽….”
-혁명의 딸이여.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루거라.
[멸망의 날이 다가왔을 때, 교국의 지도자가 무릎을 꿇더라. 빛의 아들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어린 양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시옵소서. 빛의 아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을 위해 마지막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고 울며 고하더라. 이에 빛의 아들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미 기회를 주었노라 하시니,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이까. 빛의 아들께서 진실로 원하는 게 죄의 심판이라면 빛의 아들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천한 시녀 아리스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나이까. 이에 빛의 아들이 다시 한번 가라사대….]
“흐윽… 흐으으윽… 흐윽… 흐으윽….”
[혁명의 딸이여. 그대는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노라. 내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대 스스로가 그대를 만든 것이니… 스스로의 뜻을 따르라. 하셨노라. -이름을 붙이지 않은 성서 27장 19절에서 발췌.]
거대한 빛이 하늘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