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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16화 (807/1,590)

< 816화 마지막 (49) >

[멸망의 날이 다가왔을 때, 교국의 지도자가 무릎을 꿇더라. 빛의 아들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어린 양들을 가엾게 여겨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시옵소서. 빛의 아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을 위해 마지막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고 울며 고하더라. 이에 빛의 아들께서 가라사대. 나는 이미 기회를 주었노라 하시니,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이까. 빛의 아들께서 진실로 원하는 게 죄의 심판이라면 빛의 아들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천한 시녀 아리스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나이까. 이에 빛의 아들이 다시 한번 가라사대… 중략… -이름을 붙이지 않은 성서 27장 19절에서 발췌.]

-저는….

-…….

-…….

-김현성. 내가 왜 연방으로 정한 것 같아.

-…….

-잘 생각해 봐.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왜 내가 거기로 가는 걸까.

-…….

-언데드 드래곤과 우리 자기가 떨어진 교국이 될 수도 있고, 군단장의 마력이 떨어지고 있는 라이오스가 될 수도 있는데… 아니면 굳이 이벤트가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향해도 상관없겠지. 생각해 보니 마수 살라트. 그것도 있네. 근데 왜 내가 굳이 거기 가서 27군단 놈들이랑 드잡이질을 벌여야 할까. 웃기지도 않는 장난질이지.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

-너도 생각나는 곳이 있을 거야.

-…….

-북부에 떨어진 네임드 몬스터는 한 기야. 그것도 넝마가 된 시체 하나. 네가 도망쳐도 상관없고 아니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다른 방법을 따라간다고 해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데… 선택은 네 몫이고 나는 강요하지 않아.

차희라의 말 그대로였다.

‘북부….’

다른 곳과는 다르게 북부에 떨어진 것은 고작 네임드 몬스터 하나. 넝마가 된 시체 한 구였다.

‘여기는 특별 취급이야?’

어쩌면 예산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외신을 대처할 만한 수단을 만들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뭔가 말을 잃은 듯 차희라가 나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녀석 역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출정을 기다리고 있는 붉은 용병들이 김현성에게 예를 표했지만 녀석은 놈들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붉은 용병의 정문을 나가기 시작했다.

‘얘 멘탈 터뜨리려고 작정했어? 누나… 아니, 이 누나는 진짜….’

정확히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선택 자체를 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부 케어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가 아래에 있었다 해도 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재적소에 인사들을 배치하는 게 한계이지 않았을까….

사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자면 나쁜 상황은 아니다.

연방에서 일어난 사태에 희라 누나와 붉은 용병 길드가 원정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고 라이오스 위에 떠 있는 마력은….

‘하얀이가 해결할 확률이 높겠지.’

아마 박덕구 그리고 한소라까지.

당시 악마 소환사 진청으로 인해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사태의 복기일 테니까.

내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전의 일을 그대로 되짚어 보는 것처럼 보였다.

누나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영이 없었어도 너희들이 대륙을 구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름 로맨틱한 복수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의도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에는….

‘너무 로맨티스트자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블러핑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대륙 전체에 신성을 벌어주겠다는 목적이 맞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선다.

빛의 아들의 서사가 멸망의 시작이라는 스토리텔링 자체는 그럴듯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조금 다른 의미로 내 이름과 베니고어의 이름을 외치기도 하겠지만 실적이 쌓이기야 하겠지.

‘라이오스는 일단….’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사실 악마 소환사 진청이 벨리알을 이용해 소환한 마력은 정하얀 혼자 힘으로 막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현재 성장에 맞춤으로 난이도가 조정되겠지만 정하얀이라면 커다란 무리 없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진짜는 라이오스 사태를 해결한 이후에 등장하는 연계 퀘스트. 공화국과 교국의 전쟁, 27군단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마무리가 벨리알과 베니고어의 혈투였던 만큼 어떤 식으로 이벤트가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벨리알의 화신을 상대로 싸우기라도 해야 된다는 건가.’

정확한 공략 방법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으니 이후에 벌어진 일은 일단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적어도 차희라와 정하얀은 본인들의 자리를 찾아갔으니까.

굳이 희라 누나가 연방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 총지휘관으로 있었던 것에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모양.

이쪽의 몸이 결정적으로 약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두 번째는 실수 없이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픽이야.’

둘은 믿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다른 쪽이다.

북부….

그리고, 중요자원들이 빠져나간….

교국 혁명.

‘난이도가 너무 높은데.’

거대한 용이 성벽 위에 올라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위에 흐릿하게 내 형태를 하고 있는 인형의 모습이 보인다.

언데드 라기 보다는 핏기가 없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반투명한 모습으로 교국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당장에라도 교국을 집어삼킬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움직임이 없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수도의 인원들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대부분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이들.

병사들은 시민들을 대피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성벽 위에 자리 잡은 빛의 아들의 화신을 향해 예를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신화 등급의 던전 빛의 아들이 희생된 대륙의 메인 이벤트, 교국 혁명이 시작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의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망령들이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이들은 이내 창과 방패를 들고 자신들의 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단순히 네임드 몬스터를 해결하는 종류의 퀘스트가 아니다.

-저게… 저게 뭐야. 제기랄….

-전투 준비해! 제기랄! 전투를 준비하라!

-망령들이다! 전투 준비해! 시민들을 대피시켜라!

-으아아아아아아아! 도망쳐!

네임드 몬스터의 등장으로 인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교국의 병사들과 시민들이 일순간 혼란에 빠진다.

---저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더러운 반역자들이다!

---제국을 혼란으로 물들인 더러운 반역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자! 제국의 영광스러운 병사들이여!

교국에게 창을 휘두른 것은 과거 베니고어 제국이라고 불렸을 때의 망령.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대가 교국의 병사들과 부딪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난이도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진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것 하나였다면 교국이 이번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요 전력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순식간에 혼돈으로 뒤섞여 버린 교국은 마치 지옥에서 심판받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창과 칼을 맞아도 흩어진 이후에 다시 나타나는 병사들,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력에 점점 공포에 물들어가는 교국인들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길고 긴 제국의 역사가 더러운 반역자들에 의해 무너진 것이 원통하고 억울하도다.

-물러서지 마라! 망령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우리는 오늘 영광스러운 제국을 되찾을 것이다. 제국이 지워지고 교국이 세워졌던 것처럼 우리가 교국을 지우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처단해 영겁의 고통을 느끼게 할 것이다.

-망령들을 막아라! 망령들을 막아!

---영원한 안식을 위해. 찬란했던 제국의 영광을 위해서. 잃어버린 우리의 삶을 위해서….

-린델에 지원군을 요청해야 합니다.

-전 대륙에서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라이오스에서도, 연방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일, 일단은 틀어막아야 합니다. 버티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검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일단 시민들을 먼저 대피시켜야 합니다. 다른 문제는 이후에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이시여. 정녕 교국을 버리시나이까. 빛의 아들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일구어낸 이곳을 결국에 스스로 저버리나이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이릅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분명히 말입니다.

‘방법… 방법.’

당장 버티는 것은 무리가 없다. 바젤 교황과 신성기사단, 그리고 교국의 사제들이 버티고 있으니 망령들의 진입을 막아낼 것이다.

물론 그 마저도 쉽지는 않다. 녀석들은 계속해서 리스폰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네임드 몬스터까지 움직인다면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아니야. 공략 불가능한 이벤트가 어디에 있어?’

시스템이 허락한 던전이라면 분명히 이번 이벤트도 공략할 수 있다. 시스템이 공략 불가능한 이벤트를 내리는 걸 허락할 리가 없다.

-오스칼 님.

-…….

-오스칼 님.

-……네. 카트린 의원 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린델, 실리아, 다완에 지원 요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교국 8좌의 안개 소환사와 원거리 저격수는 그리폰으로 곧 도착할 것으로 보이며 노을빛의 검사께서는 아직 응답이 없으십니다.

-…….

-정하얀 님은 파란 길드원 몇몇과 라이오스로 향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아마 교국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은 징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라이오스 위에 떠 있는 마력이 아래로 떨어질 경우, 라이오스는 물론이거니와 공화국과 교국 역시 휘말릴 위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정하얀 님께서도… 네. 감사드립니다. 카트린 의원.

-네?

-카트린 의원님.

-네.

-카트린 의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

-정말로 이 싸움이 빛의 아들께서 우리를 심판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 겁니까. 누구에게서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그분께서 바라시는 것이 멸망이라면… 그분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결과가 이것이라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바젤 교황님께서도 말을 아끼시더군요. 시민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참혹한 운명을 맞이하기에는 그들이 너무나도 가엾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이게 이기영 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 될까 무섭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스칼 님.

-그게 그분에 대한 속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 말입니다.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본래 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지원은 필요 없어.’

김현성이 올 필요도, 정하얀이 올 필요도 없다.

망령은 죽지 않는다.

지혜 누나가 준비한 이벤트가 단순히 몬스터를 잡는 정도로 끝날 거라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교국 혁명.

아리스 시녀.

아니, 오스칼.

“여기는 네가 조각이야.”

아마….

이 무대를 위해 마련된 배우는 그녀일 것이다.

-빛의 아들이시여.

이전의 이름을 버린 혁명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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