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4화 마지막 (37)(삽화) >
업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당연하지만 며칠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분은 잊지 않았는지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안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혼이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아마 이 계약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좌관들에게 보고를 받은 이후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빌런 송.
곧바로 자리에 앉은 이후, 헬멧 같은 아티팩트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도중입니다. 영웅 등급 이상의 언데드 개체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예.
-에베리아 왕국의 엘리오스 님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건….
-정황상 누군가에게 세뇌당했다고밖에는… 급하게 전선을 구축했지만 타락한 엘리오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으며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원군이 곧 닿을 예정이기는 하지만 이 상태라면….
‘엘리오스 뭐 하고 있나 했더니 드디어 등장했자너.’
-브리핑은 됐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현장지휘하겠습니다.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력 중 네임드 명단을 확인해 주세요.
-네. 공화국의 신 대장군 중 하나인….
-연결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수성전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략적 요충지라고 불리는 곳이었으니 놈이 직접 지휘권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며칠 전에도 꽤 멋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이들의 선망의 시선이 놈에게 쏟아졌다.
보기 흉한 헬멧을 쓰려다 그대로 내려놓는 녀석, 이제는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자리에 앉은 이후에 화면을 바라보는 놈의 시야에는 이미 격전을 펼치고 있는 전장이 들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치열한 현장. 여러 가지 소리와 광기가 뒤섞인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엘리오스와 녀석을 둘러싼 언데드들은 대륙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주장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데뷔 무대를 치른 송수경이었지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에 조금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저번보다는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을 것이다.
-지금부터 제가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나트리안 님.
-네? 당신은….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송수경입니다. 명령에 최우선으로 따라 주십시오.
바쁜 건 나자너.
계약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지만….
‘싸구려 자동차 타게 생겼네.’
계약에 연관되어 있는 입장이었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 리 만무, 녀석과 계약한 악마에게 내 의지를 전하는 것이 내 일이다.
간단히 말해 외주 업체를 끼고 진행하는 계약.
물론 이상은 없다. 계약상으로도 문제가 없었고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번 이름도 못 들어본 루키를 대상으로 진행한 이후에는 이번이 두 번째였으니까.
‘아무한테나 막 해주는 사람 아닌데. 진짜 이기영 이 새끼 갈 데까지 갔자너.’
진짜. 나도 품격이 있고 품위가 있고 자존심이 있지. 시바.
‘근데 얘는 좀 괜찮기는 하겠다.’
김현성, 쓰로누스, 라파엘, 심지어 조혜진과 비교하기에도 조금 민망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공화국의 새로운 별로 떠오른 이유가 있기는 하다.
나이도 젊고 아직 성장 가능성도 열려 있는 거로 보인다.
억지로 장점을 찾아보자면 경쾌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빠르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지만 레이피어를 찔러 넣는 동작에서 재미있는 리듬이 느껴졌다.
너무 일정하지도 않다. 적이 적응하거나 지루해질 때 즈음에 변속하는 솜씨가 나쁘지 않다.
내가 눈이 높아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쓰지 않았을까. 심심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는 거다.
망원경에 비치는 작은 전장, 공화국의 새로운 별이 수행해야 할 미션을 떠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여는 송수경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내가 떠올린 것을 본인이 떠올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왼쪽부터 돌겠습니다. 좌표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움직여 주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명령에 최우선으로 따라주십시오.
-네… 네.
‘너무 느려.’
재미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스펙이 구리니 지루하기는 하다.
영웅 등급의 네임드 언데드들을 상대로 레이피어를 찔러 넣는 나트리안의 몸에 계속해서 빛이 떨어진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검사의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차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인과 전장이 일체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던 경험이었으니 오죽할까.
-전방에 엘리오스. 지금은 부딪치지 않습니다. 우회하겠습니다.
-네!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화살과 마법이 자신을 피해가는 듯한 감각.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종하는 것이 김현성이었다면 나도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녀석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트리안이 꽤 마음에 들어 여러 가지로 서비스해 주기는 했지만 능력의 2할 정도만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여기서 아웃.
이 정도 해주는 것만으로도 전황을 바꾸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엘리오스, 아니, 지혜 누나도 딱 여기까지가 이 부대의 한계점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곧바로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지원군을 의식하고 있을 거고, 꼬리를 잡히기 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건… 하… 하하… 이건 도대체….
그 와중에 아직까지 여운을 잊지 못했는지 레이피어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검사.
한 것도 없는 주제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송수경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만족 못 하셨나 보네요. 우리 송수경 님은.’
-고생하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송수경 님이야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하… 하하… 대단하시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실의 분위기와 놈을 둘러싼 분위기는 정반대.
방금의 전투가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기는 했지만 놈이 바라보는 것은 더욱더 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빛의 아들이 현신한 것 같았습니다.
-허허… 신께서 아직까지 대륙을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대륙의 복이로군요.
-대단하십니다.
-노을빛의 검사와 함께 싸울 수 있으실 겁니다.
주먹을 꽉 쥔 녀석의 모습에 괜스레 비웃음이 튀어나왔지만 꾹 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대륙을 위한 일입니다. 그보다 엘리오스 님의 소재는… 아니, 엘레나 님에게 먼저 전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엘프 레인저를 중심으로 한 부대를 편성하겠습니다. 아직까지 눈에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적들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계속해서 모니터링에 힘써주세요. 부대 편성이 끝난 이후에는 곧바로 투입하셔도 됩니다.
-네.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연방 전투에서 발견된 다수의 생존자들이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조사를 해봤지만 가면을 쓴 이들을 봤다는 말밖에는… 아직까지는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라… 조사에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다면 곧바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네. 이후의 스케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취소해 주세요. 잠깐… 조금만 휴식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편히 쉬십시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행복해 보이네.’
본인들이 던진 패가 들어맞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모두가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녀석과는 다르게 말이다.
방 안으로 들어온 놈의 시선이 여신의 거울로 향한다. 언론에서 자신을 치켜세우고 떠들어대고 있는 걸 보고 싶었던 거겠지.
뭐, 빛의 아들의 현신이라거나, 전술 천재 따위의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은 만족스러운 것 같았지만 초조한 건 여전한 모양이다.
저 소식을 김현성도 듣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아마 더 초조하지 않았을까.
뭘 떠올렸는지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점점 사라지는 중, 대충 봐도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손을 잡은 이후에는 달라졌다. 녀석은 성장했고, 표면상으로는 벽을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너무 부족해.’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약간이나마 새로운 시야를 얻은 지금은 더욱더 이기영과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겠지.
조금씩 조금씩 어긋난 미션을 던진 게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놈이 여기에서 만족할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이쪽의 손을 잡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하는 척하고는 있지만 나는 놈이 어떤 걸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빛의 아들의 눈….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 정답. 놈도 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본래는 나의 것이다. 그래. 내가 그에게 내린 것이지.”
-…….
“한낱 필멸자의 격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눈이며 노을빛의 신과 연결되어 있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원한 것이었으며 그의 모든 것이었지. 그의 육체가 이미 빛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의 눈과 심장에 들어서 있는 격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한낱 죽음 따위로 정의할 수 있는 격이 아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분의 옆에 서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부족해요.
“부족함은 채울 수 있다.”
다시 한번 조용히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보였다.
-혹시… 그의 눈을 이식한다면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겁니까? 노을빛의 신과 연결될 수 있는 겁니까?
“부정하지는 않겠다.”
-…….
잠깐 동안 고개를 숙인 녀석이 입을 연 것은 몇 분 뒤. 솔직히 조금은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우… 시신은 파란 길드에 있는데….
‘와….’
이 새끼의 악랄함에는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제길… 꺼내올 방법은 없는 건가.
‘이 새끼 진짜 정신 나간 새끼였네. 진짜.’
벨리알이 괜히 박수를 친 게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진짜 인간으로서 최후의 마지노선은 지켜야 되는 거 아니냐….’
-제기랄.
‘이게 사람이냐.’
내가 의도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지 않나? 조금 더 고민해 봐야지. 크리피하자너….
그 기괴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빛의 아들의 눈과 심장.
“…….”
-이기영의 눈. 이기영의 심장. 이기영의 눈. 그래. 이기영의 눈.
“완전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대의 의지다.”
-몰래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내가 봐도 가능한 일이 아니다.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나.
정치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고, 어쩌면 빛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짓부렁을 하면서 접촉하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야. 너무… 위험해. 그분의 노여움을 사게 될 수도 있어.
‘그건 알고 있구나.’
내가 판단해도 방법들이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한번 찔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든 모양이다.
어디론가 연락을 급하게 돌린 이후에 곧바로 입을 놀린 녀석의 눈은 이미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비쳤다.
-믿을 만한 이들을 준비해 주세요.
‘송 빌런 진짜 폭주기관차 됐자너.’
-네. 파란 길드와 미팅 장소를 변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와, 진짜 악마. 며칠 사이에 악마 다 됐자너.’
-이기영 님의… 고(故) 명예추기경의 시신이 필요합니다.
대륙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빛, 그 시신마저도 욕보이려고 하는 놈의 추악함이 담겨 있는 그 표정은….
틀림없이 악마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