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7화 마지막 (30) >
마치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북풍에서 불어온 매서운 한파가 여기까지 닿는 착각이 들 정도로 차가운 얼굴, 이게 내가 아는 김현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다.
물론 김현성의 차가운 표정을 본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둠현성 때도 그랬고, 악마에 의해 유대감이 끊겼을 때 역시 나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본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표정은 그때와 다르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다르다. 굳이 적절한 단어를 찾아보자면… 아마….
무관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개미 새끼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
유대감이 끊겼을 때의 김현성의 복잡한 얼굴에는 적의라도 담겨 있었지만 송빌런을 바라보는 눈에는 그런 적의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런 감정도 없다. 아주 약간의 짜증만이 얼굴에 들어서 있다.
어째서 이 사람이, 아니, 이게 신전에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겠지.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악플보다 무관심이 더 무섭다는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노, 노… 노을빛의 검사님?
-꺼져.
-네?
-…….
더 이상 말하는 것도 귀찮은 모양인지 천천히 한쪽 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야? 진짜로? 때리려고? 때리려는 거지? 현성이 폭력으로 해결하는 사람 아니었자너.’
단순히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검을 들어 올리지는 않았지만 저 팔이 휘둘러지면 저 새끼가 뒈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장담컨대 완큐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리라.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걸 말려야 할지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이 새끼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기분이야 좋다.
‘믿고 있었다구, 젠장! 부숴 버리라구!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구!’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진다. 이게 김현성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상황.
처음이야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더 쉽다. 자기 눈에 거슬리는 놈들 뚝배기 부수면서 행복 라이프를 살아간다면 그건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이면 어떻게 해. 그냥 길만 막은 건데.’
사이코패스 살인마 아니자너. 우리 현성이 사이코패스 아니자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자너.
아니, 이 새끼는 사람을 죽인다는 자각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그냥 앞길을 가로막는 돌멩이 하나를 치운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바, 내가 뭐 이런 거 걱정할 땐가?’
“그래, 씨바, 보여줘! 현성아! 노을빛의 강타를 관자놀이에 한 번 박아줘!”
김현성의 손등이 녀석에게 향한 것은 순식간, 송빌런이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빠르게 쇄도하던 김현성의 팔이 멈춘 것은 녀석의 바로 앞이었다.
김현성이 갑자기 녀석을 인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까지 이곳이 신전의 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나쁜 짓 하는 것을 부모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은 것만 같다.
본인도 자기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은 이해하고 있는지 후회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마 김현성이 힘을 거두지 않았더라도 주먹은 송빌런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다.
김현성의 팔을 막고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창렬아… 걍 막지 말지.”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길드마스터. 하지만….
파란 길드에 얼마 남지 않은 정상인 중 한 명, 이미 상위 모험가를 넘어 최상위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창렬이….
평소였다면 아주 똑똑한 행동이었다고 칭찬 한번 해줬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김현성이 수경이의 뚝배기를 부숴 버린다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솔직히 파란 길드가 곤경에 처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겠지. 정치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궁지에 몰리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저거 팔 부러졌겠는데.’
본래 민첩 위주의 암살자로 내구와 힘 스탯이 높지 않은 김창렬이었으니 지금쯤 팔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쓰고 다니는 복면의 뒤로는 일그러진 표정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아닙니다. 창렬 씨. 제가 실수를 저지를 뻔했군요. 하마터면 신전의 부지 안에서… 네.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길드마스터. 신전 출입에 대해서 조금 더….
-손님을 배웅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향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럼….
-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파, 파란 길드마스터! 잠깐 할 말이….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멍청한 새끼.
-뭐?
-입 다물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손을 뻗으려는 송수경을 붙잡은 김창렬의 입에서 험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걸 인지한 것인지 김창렬 역시 다급해 보인다.
어쩌면 김현성의 눈을 바라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김창렬답지 않은 모습이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핵심 관계자에게 욕설을 내뱉는 것은 결코 평소의 김창렬이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 와중에 이 새끼는 방금 자신이 죽었다 살아남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입은 살아 있는 모습은 존경스러웠지만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김창렬은 송수경을 붙잡고 길에서 벗어났고….
-잔디.
-…….
-잔디 밟지 마세요.
마침내 신전에 부지에서 벗어난 김현성은 노을빛에 둘러 쌓인다. 녀석이 막 하늘로 떠오르려고 했을 때였다.
-에, 에베리아 왕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
-에베리아 왕국이 멸망했습니다! 세계수가 소실됐고 폭발에 휩싸인 왕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역병이 창궐하고 있으며… 의문의 실종 사고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륙에 똬리 틀고 있던 세력들이 들고일어나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대륙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륙인들을 위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대의를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
저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김현성은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날개를 펄럭인다. 하지만 김현성이 우뚝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지켜내신 대륙입니다!
‘거기서 내 이름을 팔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할 정도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는 두고 봐야겠지. 나는 후자에 걸게.
김현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분노와 슬픔으로 순식간에 일그러진 표정, 적의와 살의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운들이 쏟아진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의 화가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 전해진다.
감히 네가 내 소중한 형제의 이름을 입에 담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김창렬 역시 이제는 끝났다는 표정,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김현성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는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마침 딱 적절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배때기를 찌른 장본인이 누굴 원망할 수 있을까.
-아… 으….
살기 때문인지 다리가 후들거리는 녀석, 저기서 입을 벌릴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해 보인다.
-그, 그분께서… 목숨을 바쳐 지켜내신 대륙이지 않습니까.
-그 입 다물어.
이 새끼 근성 하나는 인정할 만해.
‘근데 지뢰 밟았음.’
-명예추기경님께서 원하시는 대륙을….
-네가 그 사람을 입에 담아?
-대, 대륙을 지켜야 합니다.
-네가? 네까짓 게 감히! 네가 감히!
-대, 대, 대륙을….
끝까지 입 터네. 돼지우리 엔딩이 놈을 기다리고 있다. 현성이도 요즘 스트레스 심했을 테니까. 이런 거로라도 풀어야지.
-이기영 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김현성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송수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분명히 슬퍼하시고 계실 겁니다. 목숨을 바쳐 지켜낸 대륙이 다시 한번 위협받고 있다는 게, 대륙인들이 다시 한번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원통해하고 계실 겁니다.
‘어?’
-다, 다… 다시 한번 지켜내야 합니다.
‘뭐야? 아니야. 현성아.’
-노을빛의 검사님께서 대륙을 외면하시는 걸 이기영 명예추기경님 께서는 결코… 바라지 않고 계실 겁니다.
‘아닌데….’
-노을빛의 검사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
-명예추기경님께서 돌아오셨을 때를 위해….
-…….
-그분이 사랑하시는 대륙을… 우리들이 망쳐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이빨이 으득으득 갈린다.
공포로 인해 오줌을 지린 녀석에게 천천히 손을 뻗는 김현성이 보인다.
회귀자의 얼굴에 적의는 없다. 오히려 깨달은 듯한 얼굴이다.
어째서 내 조각상이 피눈물을 흘렸는지에 대한 퍼즐을 자기 혼자 맞추어 나가고 있다.
‘시바 새끼. 시발.’
짜증이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른다.
김현성에게 불순물이 닿는다면 나 역시 그 불순물을 배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한 적이 있기야 했다.
애지중지 키운 회귀자를 냉큼 뺏어 먹으려고 하는 새끼가 있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안해한 적이 있었으니까. 처음 조혜진을 경계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가.
‘시바 개뿔. 신의 품격은 개뿔.’
그냥 죽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다.
베니고어의 조언도 조언이었지만 괜히 복잡해질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조는 내가 했는데 덕은 네가 보겠다고… 맛없는 부분 꾸역꾸역 삼켜 놓으니까, 시바, 맛있는 부분은 네가 다 처먹겠다? 배때기 찔린 건 난데 좋은 건 네가 다 하겠다?’
이것만큼 불합리한 상황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재주는 곰이 부리는 데 왜 돈은 저 새끼가 받냐고.
지금까지, 시바, 피 토하고 이 갈릴 정도로 열심히 산 게 송빌런의 행복을 위해서라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방법이야 쉽지. 뭐, 직접적으로 죽이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편법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자는 노을빛의 검사의 적입니다. 그자는 악마의 화신이며 저를 고통스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노을빛의 검사. 저를 도와주세요. 노을빛의 검사. 너무… 너무 괴로워….]
라고 한마디 날려주면 되니까.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송수경에게 손을 뻗는 모습이 보인다.
‘뭐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 목소리 못 들었어? 현성아 형 목소리 못 들었냐구.
[그자는 우리들의 적입니다.]
‘뭔데… 뭔데?’
[노을빛의 검사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어….’
[현성 씨. 내 목소리가….]
김현성이 송 모 씨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현성아, 형 목소리 들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눈앞이 깜깜해진 것 같은 듯한 느낌.
김현성에게 내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이야기 드리기 적당한 장소를 예약해 놨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파란 길드마스터. 제 이름은 송수경입니다.
-…….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송수경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