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4화 마지막 (27) >
-공화국의 대도시에서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왕국연합에서는 의문의 실종 사고들이 늘어나고 있고요.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러세요? 전염병이 도는 게 처음도 아니고, 실종 사고도 많이 있는 일 아닙니까. 어디 던전이라도 발견된 거겠죠. 뭐. 그러려니 하세요.”
-가면 쓴 이들이 목격되었다는 정보도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아, 네. 슬슬 활동 시작할 때가 됐겠네요. 그보다 하얀이가 조사하고 있는 포탈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건지 궁금한데… 한번 확인 좀 해봐요. 알아서 잘하겠지만 뭐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건지도 알려주시고요. 지금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이지혜가 사라진 포탈을 추적….”
-…….
“…….”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부 길드 마스터….
“저야 제 할 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국 방위 계획서 드리지 않았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후… 섭섭한 것도 이해합니다….
“…….”
-부길드마스터가 일궈왔던 것들이 조금씩 변하거나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씩 변하는 대륙이 성에 차지 않으신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모든 변화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 안건이 완벽히 통과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다. 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훌륭하신 인재들이 나와서 대륙을 보호·관리 해준다는 데 제가 짜증 날 이유 하나가 있겠습니까. 교국과 린델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놈들한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업무 분담입니다. 업무 분담. 저라고 손이 여러 개랍니까. 일단 내실이 튼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아니, 무슨 방해를 했다고 그러세요?”
-조각상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피눈물 좀 멈추실 수 없으신 겁니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알고 계시고 있잖습니까.
“방해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거라니깐요. 커다란 위협에 빠진 대륙을 위해 미리 경고해 주고 있는 겁니다. 세상에 저 같은 신이 어디 있어요? 베니고어도 가만히 있고 바리안이나 다른 애들도 전부 가만히 있는 마당에 저라도 대륙이 위험하다는 걸 알려야죠.”
-다른 방식으로 알릴 수 있으셨습니다.
“일 잘하고 있잖아요?”
-…….
‘이 시건방진 새끼들은 한번 망해봐야 돼. 진짜.’
한 번 데여 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킹갓지혜님이 옳았다는 판단이 선다.
몸만 있었어도, 시바, 뛰쳐나가 둠기영 한번 장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다.
더 짜증 나는 것은… 이 새끼들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대륙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원하는 대륙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놈들이 원하고 있는 영웅들의 통제기관은 초읽기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일 처리가 빨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베리아의 멸망을 알림과 동시에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발족을 공표했고, 결과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을 잠잠히 만들었다는 성과가 있기야 했다.
아마 지혜 누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누나 이 새끼들한테 밀리면 안 된다. 알지? 그렇지?’
놈들이 핵심으로 밀고 있는 계획도 잊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는 중,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김현성의 참전을 바라는 많은 대륙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
그 와중에 시바 왕국연합의 네임드 한 명이 사고를 친 것 또한 타이밍이 공교로웠다고 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시바, 영웅 테두리 안에 끼어 있기도 민망한 새끼였는데.’
아직까지 교국 친화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언론사는 굳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지만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붙은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이번 사건을 조명하고 재조명하고 또 조명했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이들을 대륙이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인 모험가 가리지 않고 그 필요성에 대해 입을 열고 있는 상황.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차희라, 이상한 기행만 벌이고 있는 김현성,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라파엘이나 대륙의 위기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정하얀.
솔직히 얘네가 조금이라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 유감을 표시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여론은 송수경 이 쥐새끼 같은 새끼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살다 살다 보니까.’
“그래, 새끼야.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진짜. 뭐?”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나 기분 상하셨을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파란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 하나라도 그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지금보다는 길드의 상황이 많이 나아질 겁니다. 일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로 지원을 받기로 약속했으니….
“…….”
-길드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
-솔직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네. 뭐. 그러기야 하겠죠.”
-길드마스터나 하얀 씨가 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특히 길드마스터께서는 절대로 이런 상황을 바라고 있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시바. 나도 현성이 믿어. 하얀이는 더 믿고.’
어중이떠중이들은 사실 의미가 없다. 진짜는 노을빛의 검사와, 대마법사, 용병여왕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바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일 것이다.
얘네들은 정치적으로 압박한다고 말을 들을 애들도 아니거니와 당장 대륙의 평화에 관심이 있는 애들도 아니지 않은가.
굳이 나서서 불편함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송수경과 빌런 무리들이 집중하는 것 역시 위에 3명, 아 라파엘까지 4명.
이 계획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위 4명 중 한 명이라도 놈들에게 손을 들어 줘야 했다.
아마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송수경 저 새끼가 저렇게 그리폰 타는 걸 연습하고 있는 거겠지. 김현성한테 아부 떨라고. 시바.
아니나 다를까, 시바, 어울리지도 않는 고글까지 쓰며 공중에서 화려한 모습을 선보이는 꼴은 가관. 잘 타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속 없고 기교만 넘치는 타입인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공중을 유영하던 녀석이 내려오자 녀석을 반기는 보좌관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마스터는 그리폰을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네.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사석에서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리폰 축제가 열리면 꼭 참석하신다고… 관련 물품들을 모으시는 소소한 취미도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기분이 안 좋으신 날에는 홀로 라이딩을 나가시거나….
-명예추기경님과는….
-하하… 아쉽게도 명예추기경님께서는 그리폰을 다루는 것에 서투르셨습니다. 일반적인 비행은 가능하셨지만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거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두 분이 함께 나가실 때도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김현성 님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시발, 안 지루해했는데?’
-김현성 님께서 그리폰을 다루는 솜씨는 가히 대륙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과연….
-만약 라이딩 대회에 참가하셨다고 해도 손색이 없으셨을 겁니다. 멀리서나마 그분이 그리폰을 타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가히 압권이라는 말밖에는….
-파란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그리폰의 숫자는 어떻습니까?
-정확한 건 아닙니다만 약 15마리로 알고 있습니다. 성체가 두 마리고 나머지는….
-선물을 준비해 주세요. 아이템 판정을 받은 물품을 포함해 전부, 최고급으로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오늘 안으로 돌아오실지도 모른다고 하셨으니…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여러분 모두가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야말로 대륙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열쇠입니다. 노을빛의 검사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대륙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잠시… 과거의 상처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계시지만 저는 그분이 결국에는 일어서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우리를 밝은 노을로 인도해 주실 겁니다.
-…….
-네. 밝은 노을로 말입니다.
이빨만 번지르르해서는, 시바.
사람 좋은 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아니꼽다.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 하급자에게도 친절한 모습은 어디까지나 이미지를 신경 쓰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가 48시간인 것처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지만….
‘시바, 네가 그런다고 지혜 누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절대로 상대할 수 없을 거야. 시바 열 받는 지혜 누나는 빨간 불에서도 멈추지 않거든.
-보좌관님.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시지요. 송수경 님.
-식사 장소는 파란 길드마스터가 자주 이용하신다는 레스토랑으로 예약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불편하실 텐데… 아무래도 익숙한 장소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따로 준비하실 건….
-이외에 것은 제가 직접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현성 님께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바로 전달해 주세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입니다만….
-네. 부족하지만 준비가 되었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송수경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모양새, 옆을 함께 걷고 있는 보좌관들은 열심히 입을 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예상할 수 있었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노을빛의 검사님은 전장에 나가실 때 언제나 명예추기경님과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정말로 전장에 함께 선 것이 아니라 두 분의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만 적들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두 분의 머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
-명예추기경은 언제나 커다란 방을 꽉 채운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며 그분의 눈이 되어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커다란 방 안을 꽉 채운 여신의 거울을 말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 겁니다. 매초 단위로 바뀌는 전장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다는 건 전장을 내려다보는 신이 아닌 이상에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현성 님께서는 더욱더 명예추기경님을 신뢰하셨던 것이겠지요.
-…….
-언제나 그분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결코 길을 잃어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돌파구를 찾았으니… 하하… 두 분이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
조용히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앞에 자리한 것은 커다란 방 안을 꽉 채운 여신의 거울.
놈의 전방에는 아티팩트처럼 보이는 헬멧이 자리해 있었다. 괴상한 선들에 연결되어 있었고, 마법진이 주변을 꽉 채우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시작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녀석은 천천히 헬멧을 머리에 가져다 댔고, 여신의 거울 안에서는 거대한 모의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는 놈이 시야에 비친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코에서는 코피가 흐르고, 그걸로도 모자라 두 눈에서도 핏줄이 터져 나가며 피눈물이 흐르는 중, 결국에는….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엎드린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동안 블랙아웃된 것 같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끊어진 것이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달려가 놈에게 신성력을 불어 넣고 난 이후에는 다시 한번 자리에 앉는다.
근성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지만 하품이 다 나올 정도로 재미없는 광경이었다.
-마르크 님.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속도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평범한… 모험가 수준이었습니다.
“전술 김현성은 개뿔 푸… 푸흐흣.”
-정말로…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
“푸흐하헤헤헤헤헷! 비유우우웅신! 비유우우우우우웅신!! 전술 김현성은 개뿔… 엿이나 먹어라! 새끼야! 세라핌 커피 가져와,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