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1화 마지막 (24) >
-세계수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아니! 시바.”
-하얀 씨!
“정하얀한테 다른 주문 외우게 하지 마! 시바, 순간 이동 주문! 순간 이동 주문부터 외우게 해! 전부 다 옮겨. 엘프들이랑 전부 다 옮기라고 시바! 다른 주문 금지! 다른 주문 금지!”
-하얀 씨! 지금 당장!!
“내 말 들어라. 혜진아. 내 말 들으라고. 하얀이는 안 싸워도 되니까 주문이나 완성하게 해줘.”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이는 조혜진이 보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곧바로 정하얀에게 주문을 외우라고 지시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창을 칭칭 감고 있었던 천을 풀어헤친 조혜진은 곧바로 달려오는 미친 것들을 상대하기 시작.
창에 가슴이 찔린 미친놈 하나가 허물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가슴이 창이 꽂힌 채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은 현상이다.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공화국의 결사단 놈들? 악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되는 건가.’
그나마 눈에 띄는 차이점은 눈깔이 맛이 가 있다는 것. 누가 봐도 세뇌당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아니, 굳이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저 새끼들이 외치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으니까.
-여신님이 세계수 안에 계신다! 하하핫!!!!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가자!!! 가자!!!!
-피와 고통으로!!!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모든 걸 해방시켜라! 해방시켜!!!!!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입에서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개소리를 외치고 있는 놈들을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하나같이 세계수 안으로 향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에는 서려 있는 것은 광기, 지독한 광기였다.
이 미쳐 버린 현장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벌써부터 사방팔방에서 연기가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고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황하는 엘프들의 비명과 움직임은 마치 세계수가 처음 무너졌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애초 전장터로 삼았던 북부가 아니라 평화로운 도시 한가운데에서 생겨난 혼란이었다.
‘적이 맞는 건가? 싸워야 하는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는 놈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대는 에베리아에서 억류하고 있는 인간들이었으니 말이다.
-전열을 가다듬으세요! 방진을 구축합니다!
‘잘했다. 혜진아. 시바.’
-집중하세요! 실제 상황입니다! 훈련받은 대로, 매뉴얼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때마침 터져 나온 조혜진의 목소리가 놈들의 정신을 깨워준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했지만 솔직히 이 엘프들이 제정신으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몇몇 이들의 얼굴에 들어선 것은 공포였다. 시바, 공포란다. 대륙을 지배하려고 한 악마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마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들어차 있단다.
‘미친….’
본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공포, 순수한 광기와 악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두려움. 입술을 꽉 깨물고 무기를 밀어 넣지만….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무작정 몸을 움직이고 녀석의 모습에 얼굴이 흙빛이 되고 있다.
차라리 악마의 탈을 쓴 천사를 상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바, 나도 지금 저 장면이 무서워 죽겠는데 이 새끼들이야 오죽할까.
갑작스럽게 전쟁터가 되어버린 장내에 정신을 차린 부대장들이 병력을 통솔하고 있다.
최우선으로 왕국의 엘프들을 보호하려는 병사들과 조혜진의 외침에 일단은 세계수로 몰려와 방진을 부축하는 두 종류의 병력이 눈에 띈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이 미친놈들의 눈에는 세계수 외에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 모양, 비전투 인원들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것은 그나마 안심이 된다. 최소한 분쟁거리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시바… 시바… 말 그대로 최소화지.’
-여신님이다!! 여신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물러서지 마라! 영웅들이여!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기억해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 악마들에게 영혼을 판 무리들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겨낼 것이다!
-죽여라! 죽여! 여신님으로 향하는 앞길을 막고 있는 놈들이다! 모조리 죽여라! 하하핫! 하하하하하핫! 우리의 희생과 피에 여신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엘룬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이기영 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나는 힘 안 주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언급해 줘서 고맙네. 시바.’
-이기영 님께서 우리를 지켜봐 주실 것이다!
‘지켜봐 주고 있기는 해.’
-대륙의 영웅이 우리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정신이 없는 전장을 바라보던 조혜진이 다시 한번 입을 연 것은 한차례 전투를 끝낸 이후,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세계수 안에 여신이 있다는 건 도대체 뭡니까?
세계수 안에 여신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까 전에 하얀이가 한 이야기….”
-외부에서 커다란 충격이 오면 터진다는 것 말입니까? 여신이라는 건….
“여신은 개뿔… 세계수가 폭탄이고 저 새끼들이 기폭장치인 겁니다. 세계수로 향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거예요. 완전히 세뇌당한 상태로 말입니다. 솔직히 저놈들이 굳이 저 지랄 떨지 않아도 이지혜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안기모랑 한소라는 빨리 하얀이한테 붙여요. 혜진 씨는….”
‘시바….’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는 건데 주문 외우게 시켜 놓은 거 맞죠?”
-네. 일단은 부 길드 마스터의 말대로 지시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엘레나한테는 세계수 주변에 보호 마법 설치하라고 지시했어요?”
-지금 지시하겠습니다.
“그럼….”
-부길드마스터. 죄송하지만 세뇌당했다는 말씀은….
“이지혜 작품일 겁니다.”
-네?
“왜 못 들은 척하고 그래요? 이지혜 작품이라고.”
-…….
“이것저것 설명해 드리고 싶은데 일단은… 저도 생각 좀 하겠습니다. 잠깐만요.”
‘하얀이 주문이 얼마나 남았지? 어느 정도 걸리지?’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왕국 내에 남아 있는 모든 엘프를 옮겨야 하는 작업이었으니 고려해 볼 게 많겠지.
‘이지혜는 아직 여기에 있는 건가?’
솔직히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기에는 아깝게 느껴진다.
“알프스 데려와라. 혜진아. 알프스… 알프스 빨리.”
-알프스!
-네… 네! 길드마스터 대리!
“이지혜 찾아! 이지혜! 이지혜 찾으라고 해!”
이지혜가 매일 목에 감고 다니던 스카프를 품에서 꺼낸 조혜진이 말을 이었다.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한, 한번 해볼게요! 흰둥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조심!
적의 습격에 알프스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긴 이후에 창을 내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기는 했지만 조혜진을 오랫동안 감상할 시간은 없다.
내 마음을 흰둥이도 알아준 모양, 곧바로 네 다리를 뻗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이쪽이에요!
‘시바. 막을 수 있는 거 맞지? 혜진이 없어도 막을 수 있는 거 맞는 거지?’
아마 가능할 것이다. 정하얀은 전투에서 제외된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파란 길드는 강했으니까.
광기에 물든 인간들의 전투력과 재생력이 올라간 것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우리 애들이 더 세지.’
훈련을 발로 받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파란 길드뿐만이 아니라 엘프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방팔방으로 신성력을 뿌리기 시작하는 엘레나. 순도가 높은 신성력은 재생력이 강한 놈들에게도 들어맞는다.
순식간에 쓰러져 있던 아군들이 몸을 일으키고 죽어가던 이들이 검을 쥐게 한다.
안기모 역시 마찬가지, 꽤나 넓은 면적을 커버해 주면서도 정하얀에게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은 매우 믿음직스럽다.
혼자서 방패와 무기를 들고, 신성 주문도 외우고, 버프도 걸어주고, 미친놈들 뚝배기도 부숴주며 보호 마법까지 외워주는 녀석은 이런 장소에 잘 어울린다.
성장한 박덕구에게 가려지기는 했지만 놈은 메인 탱커까지 설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다.
‘저 새끼 은근히 진국이야. 진짜.’
황정연은 아네모네의 눈을 통해 본 에베리아 왕국의 정보를 정하얀에게 전하고 있었고 한소라는 안기모를 보조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정신을 차린 몇몇 엘프들도 방진을 두껍게 유지하며 적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지점이 아예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시바.’
무언가 다른 상황이 터진다고 한들, 적어도 조혜진이 다시 돌아갈 때까지는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요!
조혜진과 알프스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중, 솔직히 이 강아지가 어디까지 지혜 누나를 추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게 있으니 이렇게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 거겠지.
‘아직까지 에베리아에 있는 게 맞아?’
완전히 발견하지 않아도 좋다. 최소한 흔적만이라도 발견해 주면 돼. 그 작은 단서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무궁무진하다구, 시바.
제발 흰둥아. 너라면 할 수 있다. 흰둥아.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지? 우리 흰둥이 잘한다. 할 수 있다구 흰둥아.
전술 흰둥이라도 걸어주고 싶은 심정. 솔직히 쓸 만할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예요! 조혜진 님! 흰둥아 여기 맞지?
-왈!
-네. 따라가고 있습니다.
들어온 것은 건물의 내부. 광기에 물든 미친놈들은 자리에 없다.
한참 동안 건물 안을 빙빙 돌아봤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달려왔을까. 저 멀리서부터 두 개의 인형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저거 누나 맞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가면을 쓴 여자와 그녀의 구두에 입을 맞추고 있는….
‘엘리오스?’
시바. 저 새끼의 눈도 이미 정상이 아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조혜진에게 관심을 표명한 녀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싸구려 순정.
세뇌당한 것 같기는 했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면, 시바, 세뇌에 걸려도 다른 사람한테 충성하지는 않는 법이지. 트루 러브였으면 극복했다고.
혜진아 보고 있지? 시바 저 새끼. 안 될 새끼야.
-지혜 씨?
-…….
-지혜 씨!!
-…….
가면을 쓴 여자는 손을 들어 올리고 순식간에 어두운 장막이 그들을 감싸 안는다.
어두운 장막에 가려진 엘리오스와 가면을 쓴 여자는 곧바로 자취를 감춘다.
조혜진은 서둘러 뛰어가 손을 휘둘러 봤지만 잡히는 게 있을 리 만무, 알프스는 멍하니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눈치 없는 흰둥이는 열심히 짖고 있다.
‘좋아. 괜찮아. 나쁘지 않았어.’
얻을 게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정신 차리고 이 장소도 같이 워프하라고 메시지 넣어요.”
-…….
“혜진아. 하얀이한테 메시지 넣으라고.”
-아… 네….
“지금 이동하겠습니다.”
-당장 말씀… 이십니까?
“전투 결과 상관없이 워프해요. 엘프들도 전부. 괜히 도망치라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의 의아한 표정이 보인다. 이미 대부분이 정리된 상황에 굳이 워프까지 필요하겠냐는 거겠지. 뭐….
“가만히 놔둬도 터질 거니까 그냥 워프해요.”
-…….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멍한 얼굴로 에베리아를 바라보는 조혜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지혜의 지독함에 치를 떨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