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0화 마지막 (23) >
이지혜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정하얀과 한소라, 그리고 황정연 가지고 온 소식은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혜가 벌일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얀 씨.
-제가 대신 설명해 드릴게요. 조혜진 님. 겉보기와는 다르게 현재 세계수가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
-네. 세계수의 표면이 안에 차 있는 기운을 억누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예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팽창하려는 성질과 억누르려는 성질이 충돌하고 있거든요.
-…….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해서 설명드리기 어렵네요. 저도… 하얀 씨가 설명하는 걸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중요한 건 저 세계수, 아니, 저 흉물이 터지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겠죠?
파란 길드의 마법사들이 상황실에 들어와 있는 조혜진을 둘러싸고 있다.
황정연은 조금 불안한 미소를 보내며 빈약한 정하얀의 설명에 살을 붙이는 중,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고 있었지만 조혜진과 내가 저런 걸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굳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저게 터진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삼… 삼 일?
-…….
-…….
-엘리오스 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직 알리지 않았어요. 조혜진 님이 먼저 알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목적도 있으실 테고… 엘리오스 님에게는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러지 말고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현재 추가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중이에요. 조혜진 님께서 언급하신 사안도 함께… 찾아보고 있고… 마탑의 마법사들과 협력하는 방향도 생각해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건 허가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고….
-막을 수는 있는 겁니까?
-잘, 잘, 잘 모르겠는데….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정하얀의 표정을 보고 갈등하고 있는 조혜진이 눈에 들어왔다.
‘대피시키는 게 좋을까?’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하얀이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병력을 대피시키는 게 맞는 행동이다. 아주 약간의 여유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한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곳이 린델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게 마련, 왕국의 최고결정권자는 엘리오스가 아니었던가. 판단을 내리는 것은 녀석이지 조혜진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터지는 게 맞기는 해?’
여기서 이걸 터뜨릴 정도로 무리수를 던지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지혜 누나가 일을 벌이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아직 전부 준비되었을 리가 없다. 이 타이밍에 한 왕국을 통째로 날려 버린다는 발상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작부터 대륙을 위협하는 집단이 있다는 걸 드러내고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에 주사위를 던진다고?
차라리 정하얀이 자작극을 하고 있다는 게 더 현실성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한 표정은커녕 왕국에 닥친 위험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자세한 설명은 세계수의 앞에서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그럼 천천히 오세요.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정연 씨. 하얀 씨. 소라 씨.
에베리아 왕국에 위기를 초래하고 멋지게 그걸 막아내며 신성을 충전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는 않을까. 모든 게 정하얀의 자작극일 가능성은 없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짧은 회의는 마무리된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조혜진의 얼굴에는 근심이 들어서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솔직히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일단 몇 시간 정도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얀이 말대로라면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 셈이기도 하고… 아 물론 엘리오스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네요. 혜진 씨가 직접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엘레나를 통해서 가는 게 가장 베스트겠네요. 일단 밖으로 나가요. 현장 확인이 한 번은 필요할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대피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문제는 엘리오스와 엘레나가 해결해 줄 겁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른 단서를 찾아야 된다고. 지금 당장 저희가 상황을 통제하려고 해봤자 혼란만 가중될 겁니다. 에베리아에서도 위급 상황 시의 매뉴얼이 있을 테니까… 뭐 걔네들 방식을 존중해 줍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부터 해요.”
-네.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흉물의 앞에 선 이후에, 정하얀은 이것저것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조각 하나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이후에 원형의 마력 안에 가두고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고 있다.
“누르는 힘이랑 빠져나가려는 힘이랑 계속 계속 부딪치면 터, 터지니까… 이, 이렇게….”
콰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조각이 터져 나가며 정하얀이 만든 원형의 방어막이 부숴 버린다.
‘자작극 아니지?’
-이, 이, 이 안에 있는 마력 같은 경우는 순도가 높아서… 팽창하는 지점이… 다, 다르거든요… 이런 경우에는… 그, 그래서 삼 일. 지금 당장은 위험하지는 않지만… 외부에서 커다란 충격이 오면… 이, 이렇게… 콰앙!
“물어봐요. 다른 것도.”
-혹시 세계수 안에 들어가 있는 마력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는 확인이 가능합니까?
고개를 젓는다.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온 흔적은….
이 문제에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모양이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이 눈에 보였다.
꽤나 긴 영창을 준비한 이후에는 소리 높여 주문을 내뱉는다.
한소라와 황정연은 그런 정하얀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중.
투명한 그림자 같은 것들이 주변에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갑작스레 생겨난 그림자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의미 모를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그림자는 뛰어다니고 조금 커다란 그림자는 공중에 떠 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수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가지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엘프들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이건….
-과, 과거….
‘미친 거 아니야?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얘가 괴물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다른 눈으로 정하얀을 바라보게 된다. 한소라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눈도 다르지는 않다.
스토킹 마법의 권위자였으니 저런 종류의 주문을 완성한 것도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현실감 없는 마법을 구현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아니, 시바, 이상하지도 않지. 생각해 보니 공간 이동과 중력 떨구기도 그다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대단해요… 정하얀 님.
-소, 소, 소라도 할 수 있어. 공중에 떠다니는 마력이 가르쳐 주니까. 사, 사람이 움직일 때 눈에 보이지 않은 마력이 영향을 받, 받잖아. 보, 보통 일주일은 남아 있으니까. 소라도 마법의 천, 천사잖아.
-…….
-처, 처음에는 어렵지. 쉬, 쉬워… 간단해….
세상은 저런 발언을 하는 천재들을 기만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걸로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찾기 힘들다.
커다란 세계수를 둘러싸고 있는 수백, 수천의 그림자를 어떻게 일일이 구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흩어지는 그림자들이 시야에 비친다. 세계수가 무너지고 있는 시점일 것이다.
비명을 내지르는 그림자들은 혼비백산하며 쓰러지고 세계수에서 멀어진다.
단순히 투명한 그림자들뿐이었지만 당시에 이들이 얼마나 커다란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혼란이었다.
“잠깐 뒤로.”
-잠, 잠깐만 뒤로….
그들 사이에 유유자적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림자가 하나.
“잠깐만 더 뒤로….”
-잠깐만 더 뒤로….
정신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걷고 있는 그림자가 눈에 띈다. 심지어는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처음부터 돌려주시겠습니까? 정하얀 님?
투명한 그림자 하나가 분명 세계수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용히 속삭이며 입을 열고 있다.
말이 들려오지 않아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입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다시 한번 세계수가 무너지며 흩어지고 있는 그림자들이 보인다.
세계수에 손을 가져다 댄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들에 섞여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 그녀를 따라나서 봤지만 중간부터는 흔적이 끊겨 있다.
마지막에 그림자가 자리한 곳은 억류된 대륙인들이 자리해 있었던 장소. 당시에는 빈 공터였던 곳이었다.
“씨발….”
때마침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더 이상 참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이 더러운 엘프 새끼들이 우리를 이렇게 가둬두는 것을 용인할 겁니까!
-몰아내! 몰아냅시다!!
-빠져나가자! 동지들아! 이 새장 안을 빠져나가자!
-움직이자! 무기를 들어! 인간의 힘을 보여주자!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통제에 따라… 커헉….
-통제에 따라주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겠습니다!
-지랄. 엿이나 처먹어라, 개자식들! 흐하하하하하!
-막아! 막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 막아!
-이 개 잡놈들아!! 흐하하! 크아아아아아!!! 하하핫!!!
-엘리오스 님을 불러!
-시민들을 대피시켜라!
-이 더러운 개새끼들… 후욱… 후욱… 이 엘프 새끼들을 전부 다 찢어 죽여!!
사방 팔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술을 꽉 깨문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전투준비! 전투준비!
근처에 있던 안기모와 알프스는 곧바로 무장을 챙기며 조혜진과 합류했고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근처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네.
-네. 알겠습니다. 길드마스터 대리.
무기를 들고 설치는 미친 개자식들이 순식간에 들고일어난 상황에 이 새끼들이 자살 희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맛이 간 것 같은 눈을 보고서는 이 새끼들이 자의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아… 나의 여신이시여! 우리의 여신이시여!
‘시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당신을 위해 나의 목숨을, 저의 모든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 아아아… 아아아아!!
‘이게 씨발… 이게 뭐야 X나 무서워 뭐야. 이거….’
-여신이시여! 나의 여신이시여!!! 그러니!! 그러니!!!! 이들의 피를 당신에게 바치겠나이다!! 나의 여신이시여!!!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발 무서워. 시바… 시바….’
-세계수다! 여신님이 세계수의 안에 계신다! 여신께서 세계수 안에 계신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흐하하하핫!!
‘야, 뭐야. 시발… 야….’
-전투준비!!!!!!!!
“전투준비는 개뿔! 지랄 말고 도망쳐! 혜진아!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