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8화 마지막 (21) >
-부길드마스터. 길드마스터는 어디로 향하신 겁니까?
“북부로 보냈습니다.”
-네?
“북부로 보냈어요. 지금쯤이면 한창 달리는 중일 겁니다. 어쩌면 지금 도착해 있을 수도 있겠네요. 날개 펼치고 날아갔으니 슬슬….”
‘이미 도착했네. 뭐.’
-그곳에 뭔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있기는 뭐가 있겠어요. 아직 제대로 개발도 되지 않은 오지로 보냈는데… 무슨 단서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던전 안으로 집어넣는 게 괜찮아 보여서요. 솔직히 던전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찾아내겠죠. 현성이 알잖아요. 없어도 찾아낼 겁니다. 아마.”
-그런 곳으로 혼자 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뭐가 걱정돼서 그래요?”
-길드마스터는 지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란 말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예요. 하다못해 원정대원들을 꾸려 함께 보냈어야 했습니다.
“귀찮게 느끼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제가 잘 감시하고 있으니 다른 일도 벌이지 않을 거고… 가끔 말도 걸어주고 그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혜진 씨는 혜진 씨 일에나 집중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더 중요한 쪽은 이쪽이니까. 아, 그리고 우리 하얀이 좀 잘 챙겨주시고요.”
-소라 씨가 잘 챙겨주고 있는 거로 보입니다.
확실히 한소라가 잘 챙겨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간이 캠프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나름대로 좋아 보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안정되어 있는 모습.
한소라가 새로 선보인 캐릭터 도시락이 마음에 드는 것 같은 눈치였다.
‘쟤네는 피크닉 온 것 같네.’
정하얀은 사실 별생각이 없을 것이다. 애초 이런 머리 아픈 문제들은 정하얀의 담당이 아니었으니까.
엘프들이 왕국을 완전히 잠갔다는 것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하얀이 이곳에 온 이유는 조혜진과 엘레나를 왕국으로 옮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큰, 큰 사건이 일어날까?
-네? 저도 확실히는 잘…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좋은 거겠죠?
-그, 그, 그러면 안 되는데….
정하얀의 개인의 신화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에베리아 왕국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리 없이 키득거리고 있었던 정하얀의 모습이 괜스레 기억에 맴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초조한 표정을 보내고 있는 엘레나와는 딴판이었다.
사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불안감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과는 확실히 대조적이지 않은가.
한소라도 그런 엘레나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모습.
결국에는 잠깐 몸을 일으켜 그녀를 위로해 주고 돌아왔지만 정하얀 학과의 권위자인 나로서는 좋은 선택이 아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무, 무, 무슨 이야기 했어?
-네. 잠깐… 아무래도 왕국에 문제가 생겨서… 많이 슬퍼하시는 것 같아서요. 조금 위로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정확히 무, 무슨 이야기 했냐구….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무, 무슨 이야기 했냐니까!
-그러니까요….
-너무 친, 친하게 지내지 마. 쟤… 쟤 조금 이상하니까.
누가 봐도 정하얀이 이상해 보이는 상황이기는 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을 보면 눈깔이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마 본인에게 피해가 갈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하얀과 한소라의 왼편에 자리한 것은 안기모. 오랜만에 김예리와 박덕구를 떼고 자리한 모습이 눈에 띈다.
붙임성이 좋은 녀석답게 알프스의 흰둥이를 쓰다듬으며 엘레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흰둥이의 주인인 알프스는….
혼잣말을 하고 있는 조혜진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조혜진이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일의 처리를 위해 온 마도학자 황정연까지 합친 것이 이번 원정의 인선. 나름 나쁘지 않은 인선이기는 했다.
아니, 딱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애초에 전투를 위한 인선도 아니었거니와 만일의 사태에도 정하얀이 전부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만일의 사태가 일어날 확률도 낮다.
‘아마 상황을 관망하지 않을까 싶은데….’
커다란 떡밥을 하나 뿌렸으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려 할 게 분명했다.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했었죠?”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부길드마스터. 엘리오스 님과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첫 번째….
“아닙니다. 세계수의 조사가 첫 번째예요. 이지혜의 흔적을 찾는 게 두 번째고요. 정연 씨와 알프스를 괜히 인선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꼬리를 밟아야 돼요.”
-일단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아니요. 무조건 꼬리를 밟아야 합니다. 눈앞에 있는 것들부터 해결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대륙이 폐허가 되는 그 순간까지 이지혜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게 될 겁니다. 틀어막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도 쓸 수 있는 패를 준비하고 만들어 놔야 돼요. 극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엘리오스에서 두 종족의 무력충돌이 일어나도 개입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합니다.”
-하지만.
“제 말 들어주세요. 손해 본 적 없다는 건 혜진 씨가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당신 방식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제 방식이 더 알맞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지혜에 관련해서는 제가 더 잘 알아요.”
-일단은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두세요. 저는 부길드마스터에게 제 자유의지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인형이 되기 위해 대리자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네, 네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애초에 혜진 씨가 제 말에 전부 수긍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순위만 확실하게 기억하고 계시면 돼요.”
-네.
“그럼 다시 출발합시다. 빠르게 움직이면 한 시간 안에는 들어갈 수 있겠네요. 기왕이면 텔레포트로 바로 들어가면 좋았을 텐데….”
-왕국에서 원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조심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네… 뭐. 네….”
-너무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지혜 씨가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세계수의 소실에 지혜 씨가 연관되어 있다고 한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별로 수긍하기 힘든 발언이다.
‘이미지 관리를 왜 이렇게 잘해놨어?’
이지혜의 인성에 혀를 차고 있는 사이에 길드원들에게 말을 전하고 있는 조혜진의 모습이 보였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알프스 덕분에 캠프가 금방 정리됐고 금방 발걸음을 옮기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 풍경이 왠지 익숙하다.
물론 멤버가 몇 명 빠지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풍경이라 할 만했다.
약 한 시간가량을 걷다 보니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에베리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목책?’
거대한 목책이 왕국을 둘러싸고 있다. 단순한 목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견고해 보이기야 한다.
마치 거대한 나무들이 성벽을 뒤덮고 있는 듯한 모습, 엘프들의 마법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고 있는 가지가 보인다.
‘저러다 하늘까지 가리겠네. 시바.’
달라진 에베리아의 모습에 입술을 더욱더 꽉 깨물기 시작한 엘레나의 얼굴은 가관, 누가 봐도 현 엘프의 지도자인 엘리오스의 선택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서 걷고 있는 조혜진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을 여세요. 엘레나입니다.
-…….
-문을 여세요. 에베리아 왕국의 엘레나입니다!
‘우리 엘 여왕님 멋있자너.’
가지들이 천천히 공간을 내어준다. 애초에 출구나 입구를 따로 정해두지도 않은 모양, 필요할 때마다 가지가 흩어지며 문을 열어주는 시스템인가 보다.
‘합리적이기는 하네.’
본래 세계수의 보호를 받는 엘프들은 성벽과 목책을 쌓지 않는다.
뭔가 다른 수단을 강구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훨씬 더 훌륭히 적응한 모습.
인간들만 엘프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엘프들 역시 인간들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받았나 보다.
이윽고 나뭇가지의 성벽이 흩어지고 난 곳에 자리한 곳은 오랜만에 보는 엘리오스와 무장을 하고 있는 엘프 병사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이쪽을 적대하고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민감한 상황이라고 한들, 대륙을 구한 주역들을 적대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겠지. 오히려 정하얀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놈들 역시 있다.
뒤쪽에 로브를 입은 것들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었고 정하얀은 광대를 한껏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면….
‘뭐야. 마법의 신의 신도들이라도 돼?’
최근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기행이 단순한 기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엘레나.
-오라버님이야말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
-…….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아니요. 들어가기 전에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왕국의 손님들을 억류하고 있다니요! 게다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것은 뭔지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왕국을 새장으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저는!
-왕국을 떠난 것은 네가 아니더냐. 엘레나. 이제 와 왕국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갑작스럽게 시작된 드라마에 나도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성이 날 대로 성이 난 엘레나와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엘리오스를 보면 쟤네가 진짜 남매긴 남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뒤쪽에 서 있는 병력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에 살짝 눈치를 보던 보좌관 한 명이 엘리오스에게 말을 전하고 나서야 저 말다툼이 마무리됐다.
정확히 말하면 휴전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죄송합니다. 파란 길드 여러분. 그리고… 조혜진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리오스 님.
-네. 반갑습니다. 조혜진 님.
그 와중에 시바 엘리오스 놈은 귀를 살짝 세우며 조혜진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었는데 공적으로 만날 일이 많았던 모양.
아니, 그것보다는 저 새끼가 조혜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 촉이 말하건대 저 새끼 분명히 조혜진한테 호감 있는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떨리고 있는 놈의 귀가 그 증거다.
새삼스레 조혜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와… 얘 진짜 언제….’
둘이 뭐 있기는 있었어? 아니면 그냥 얘 혼자 이러는 거야? 아니, 뭐야. 뭔데, 언제 만난 거야? 사적으로 만나기는 했어?
어째서 조혜진을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될 지경이다.
엘리오스가 혼자 호감을 키웠을 가능성이 크긴 하겠지만 그래도 둘이 연락 가끔 주고받고 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엘리오스 님께서 바쁘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이 새끼 봐라.’
표정이 살짝 풀어진 것이 눈에 띈다. 아까까지는 의심이었지만 지금은 확신이다.
하긴 조혜진이 엘프들한테 인기 많을 것 같은 스타일이기는 했어. 그래도 시바, 너는 아니지.
저 엘프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혜진이와 간질간질한 사랑을 나누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성이 있자너.’
-일단 이곳까지 와주신 파란 길드원 분들께 감사의 뜻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엘레나를 안전히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왕국의 손님으로서 여러분들을 맞이하고 싶지만….
-…….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된 대접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개새끼, 이거.’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레나.
-에베리아를 구하고 대륙을 구하신 영웅들에게….
-엘레나!
-그것에 관해서는 말을 전해 드렸으니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라버님.
‘이 집안 막장이자너.’
-오라버님께서 그리 연모해 마지않는 조혜진 님께 이미 모두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상상도 못 한 발언.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떻게 해….’
“너무 잔인하다… 진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엘리오스의 모습.
‘순수 악 엘레나. 시바.’
언제 왔는지 엘레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벨리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