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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81화 (772/1,590)

< 781화 마지막 (14) >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만 같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럽다.

무대 공포증이 있다거나 신도들의 환호성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솔직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나를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본래 예정에 없던 일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여기까지 내몰아버린 파란 길드원들에게 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 아무런 악의 없이 사람을 X 되게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진작 튀어나올걸.’

정말로 가방 받고 강림한 졸렬한 신이 되고 싶지는 않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성자의 진실 된 모습이 군중의 눈물샘을 훔쳐 버린 모양, 계속해서 신성이 쌓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사소한 기도들 역시 계속해서 쏟아진다.

‘와, 시바. 여기서 균열랜드 대박이랑 모험가 대학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놈들은 뭐야. 대륙의 성자가 나타났는데 기도할 게 그것밖에 없다고? 현실적이기는 하자너.’

당연하지만 그 누구보다 격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도 눈에 띈다.

조혜진은 가만히 서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건지 자꾸만 입술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것만 같다.

엘레나는 갑작스러운 강림에 고개를 숙이고 조각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눈을 마주치는 행위 자체가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아영과 김창렬은 자신의 두 눈을 비비는 중,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창렬의 눈이 저렇게 커다랗게 떠진 것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다시 한번 기적을 맛본 정하얀과 박덕구의 반응은 저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던 오스칼은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는 대륙 출신답게 다른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신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

‘내가 보기에도 신성해 보이기는 하네. 신화 등급의 조각상이라 그런가 효과가 좋자너.’

“…….”

‘가방 받고 강림한 것만 아니라면 더 그럴듯할 것 같자너….’

태양의 보석과 요정의 호수의 조각돌로 만든 두 눈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고, 일단 노을 진 하늘이 석상을 비추는 효과 자체가 죽여준다.

신성한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로도 경외감을 느끼기 충분할 터인데 주변 환경까지 도와주니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사소한 문제는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저렇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현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나누고 싶은 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담이다.

많은 신도가 바라보는 앞에서 공식적으로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내가 녀석을 부른 이유가 소소한 이유라면 조금 김이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린델의 신도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잘 지내셨어요? 현성 씨?’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미치겠다. 시바.’

-기영 씨… 제가 보이십니까?

“…….”

-제가… 정말로… 그러니까… 제가….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일단 포근한 미소를 보내고는 있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건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 녀석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딱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를 미국으로 보내 버린 장본인.

일단 인사부터 하는 게 맞겠지.

“오랜만입니다. 노을빛의 검사.”

조용히 목소리가 흘러나간다.

-기영 씨….

사무적인 말투에 잠깐 실망한 듯한 얼굴이 보였지만 곧 자신이 실망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랜만입니다. 이기영 님.

“…….”

-드리고 싶은 말씀이 무척 많았습니다. 이렇게 만난다면 나누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무슨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잘 지내시고 계시는지, 어떻게 지내고 계신 건지, 무척 궁금하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

-하지만….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말을 이어나갔다. 제 딴에는 꽤나 용기를 낸 발언이었을 것이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다. 뭔가 대답하기 굉장히 애매한 질문이다.

잘 지냈냐를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이런 사담을 나누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괜히 내가 우리 현성이를 노을빛의 검사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녀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강림했으니 뭔가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이 많은지 자꾸만 내 턴을 빼앗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방법으로.

-죄송합니다.

“…….”

-흐윽… 흐으으윽… 죄송…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았는데…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 지켜봐 주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꼭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제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신 나간 새끼.’

-조금이라도 제 마음속에 있는 짐을 덜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김현성인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병신 같은 놈이다.

-제가 저지른 일을….

“그만.”

-…….

“그만하세요.”

‘이 새끼 뒤질려고 환장했나 봐.’

지금 이 자리에서 이기영 배때기에 대해 고백하려는 모양이다. 눈치가 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눈치가 없다.

‘돌팔매질 당해서 숨지고 싶어서 그래?’

아니나 다를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중, 노을빛의 검사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분명히 의혹이 없었을 리가 없다. 라파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신경 쓰이고 모든 게 깔끔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이기영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는 루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여러 가지 음모론이 생겨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내뱉는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 어쩌면 파란 길드에서도 녀석을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 말은 하지 마.’

“그 누구도 죄를 고백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라 대륙을 구한 용사이며 찬란한 노을빛을 지켜낸 많은 이들의 수호자입니다. 모든 일은 예정된 일이었으며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눈물 흘리지 마세요. 노을빛의 검사. 희생된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마세요. 상처 입은 영웅들이여.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그대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베니고어 님의 오른편에 앉아 스스로의 손으로 지켜낸 대륙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아아… 베니고어시여. 아아아아… 이기영 님….

“가족과 친구, 동료, 연인들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사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이런 말은 필요하겠지. 새하얀 선의의 거짓말이자너. 다들 천국 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자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슬퍼하는 일이 아니라 나아가는 일입니다.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애틋함과 죄책감을 이제는 놓아주어야 합니다.”

‘진짜 놓아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지?’

-하지만….

“놓아주세요.”

-놓을 수… 없습니다. 흐윽… 놓을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좋은 자세다. 시바. 그런 자세야.’

절대로 놓지 마. 시바. 특히 죄책감은 놓으면 안 돼. 이건 내 무기니까.

“놓아주세요. 그대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대들은 나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이들입니다.”

대충 던진 말이었지만 조혜진에게도 영향이 온 모양이다. 얘도 죄책감에 매몰되어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내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자신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다. 결국에는 알프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그녀를 수습했을 정도였다.

-기영 씨… 저는… 저는….

“안주하지 마세요. 뒤를 돌아보는 일은 옳은 일이나 나아가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 죄에 매몰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슬퍼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슬픔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진 미래를 밝히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작은 빛들입니다.”

‘죄에 조금은 매몰되어도 돼. 슬픔에 빠져 주변을 조금은 돌아보지 않게 돼도 상관 없자너. 그냥 잊지 말라구. 알겠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지금 이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내 말에 수긍하지 않고 있다. 절대로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저항 정신이 돋보인다.

아주 올바른 저항 정신이다. 박수라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저기서 그 저항 정신을 드러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당장 난리를 치겠다는 선택지에는 발을 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언제나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어떤 대륙을 만들어갈지, 어떤 삶을 살아갈지 하루하루를 기대하며….”

-기영 씨도 함께 누려야 합니다. 흐으윽… 흐윽….

“…….”

-함께 누려야 합니다. 누려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기영 씨입니다. 흐윽… 제가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기영 씨가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거 놔! 이거 놓으세요! 이거 놓으라고 했잖아! 제기랄!

‘이 새끼 흥분 하자너. 흥분하니까 무섭자너… 우리 저번에 이 이야기 끝내지 않았어?’

오래 참아왔지만 결국에는 참을 수 없었는지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변 사제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일단 김현성을 붙잡고는 있지만 저런다고 저 사제들이 김현성을 진정시킬 수 있을 리 만무.

지금 자신이 어떤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이미 주변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녀석이 기대하고 있었던 장면은 이런 장면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활한다는 희망을 전해주거나 혹시 모를 여지를 주기 위해서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 밝은 모습을 보여준 걸지도 모르지.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이 기쁘기도 했겠지만 정말로 기뻤던 것은 작은 가능성을 움켜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놓고 모든 걸 잊고 나아가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꼭 돌아오게 만들 겁니다. 꼭 돌아오게 만들겠어요. 기영 씨의 자리를 남겨둘 겁니다. 흐윽… 흐으윽… 절대로 이렇게 끝나게 만들지는 않겠어요. 이런 마무리는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걸 걸고서라도 되찾을 겁니다. 제가, 파란 길드가 그렇게 하겠어요.

‘좋은 자세자너.’

근데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는 적절하지 않은데….

-기영 씨를 되살릴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영 씨를 되살릴 거예요. 어떤 방법을 쓰든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김현성은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조금 부족할지는 몰라도 일단 할 건 해야지.

“내가… 그대들의 슬픔과 죄를 사하노라.”

거대한 빛무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물론 정말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런 효과라도 있어야 뭔가 나오는 보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신도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빛무리를 받아들이는 중, 그 와중에 김현성은 노을빛의 날개를 꺼내 자신에게 빛무리가 닿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내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떨어지는 빛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

-…….

-누구 마음대로 슬픔과 죄를 사해요? 나아가라고? 정말로 웃기다니까. 오빠나 실컷 용서해요. 나는 전부 죽여 버릴 테니까. 처음으로 돌아갈 때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잘근잘근 씹어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일 거야.

가면을 쓴 이들과 함께 린델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지혜가 시야에 비쳤다.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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