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9화 마지막 (12) >
-확실히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마도 제 영혼과 기영 씨의 영혼이 연결되어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영혼의 단짝이라는 신탁이 뜻하는 바는….
-길드마스터의 한쪽 눈의 색깔이 변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군요.
-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특성의 영향일 겁니다.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지, 어째서 계속해서 이 특성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추측하자면 기영 씨와 제가 쌓아온 유대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 기영 씨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군요….
-기영 씨가 다시 돌아오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이유 역시 같습니다. 어쩌면 기영 씨도 현세에서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만약 정말로 모든 끈을 끊어버리셨다면… 계속해서 이 눈이 유지될 리가 없으니까요.
-길드마스터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조각상에서 부길드마스터의 기운이 사라진 건….
-어쩌면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탁이 내려오거나 신이 강림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정확히 기영 씨가 조각상에 강림한 시간대가 언제인지, 어떤 환경이었고 주변에는 뭐가 있었는지. 모두 체크해 주세요. 아마 제 생각이 맞다면 내일 다시 나타나실지도 모릅니다. 강림한 바로 다음 날 바로 다시 한번 강림했다는 선례는 없지만 기영 씨가 제게 전할 말이 있는 게 확실하다면 분명히 모습을 드러내 주실 겁니다.
‘너 아니라니까….’
무척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진짜로 아니라구….’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미영 팀장은 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현성의 저 발언이 그럴듯하게 들려오는 모양,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다른 길드원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조혜진이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베니고어 넷을 비롯한 언론에 부 길드 마스터의 신탁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굳이 막으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가 신탁을 내린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신전을 만든 것은 숨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심지어 여신의 거울에서도 온종일 특집으로 편성해 방영 중이었다.
그 장소에 파란 길드원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걸 원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누가 영상을 촬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기리 삼 남매와 정하얀, 한소라, 김미영 팀장을 비롯한 건설 인부들이 멍하니 조각상을 바라보고 신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오는 중.
영혼의 단짝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각 언론별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지만 김현성의 발언이 유출되었는지 노을빛의 검사를 가리킨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니, 지금 보니 유출된 정도가 아니네.
‘시바, 저건 또 언제 한 거야?’
김미영 팀장이 이미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못을 박아버린 모양.
구체적으로 신탁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김현성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바젤 교황도 그 누구보다 앞장서 지금의 기적을 홍보하고 있다.
베니고어의 아들이 대륙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고, 아니, 애초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베니고어가 인간을 가엾게 여겨 대륙의 내린 신이었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이미 신전과 조각상이 활성화되었지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새로운 빛에 올라섰다는 걸 모두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한평생을 청렴하고 순수하게만 살아왔던 성자, 대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빛 그 자체.
하늘 위의 새로운 별이 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들려올 지경이다.
베니고어 님이 인간의 죄를 물으실 때 그녀의 왼편에 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거나, 위에서도 대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거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신성이 벌리고는 있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각지에서 인파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기적을 목도할 수 있으니 참 운도 좋아. 그렇지 않은가. 조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로 이기영 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
-최근에 자네 감이 좋다는 건 알고 있으니 빨리 대답하게. 이제 삼류도박사 조지라는 말도 옛말 아닌가.
-아마 신탁대로라면 모습을 드러내겠지.
-너무 뻔한 대답이야. 조지. 재미없다고.
‘시바… 내려갈 신성 없다고. 제기랄. 진짜로 내려갈 신성 없단 말이야.’
어딜 가도 저 이야기뿐이다. 정말로 어딜 가도 저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 동네 주점이나 광장과 시장에서도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기영 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신탁이 사실이라면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겁니다. 오늘 잡혀 있는 일정은 전부 취소해 주세요. 그분을 모시는 데에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파란 길드와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네, 오스칼 님.
-국가적인 행사입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총력을 기울여 주세요.
-네, 오스칼 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위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로군요. 추진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쟤까지 저러고 있다. 이 와중에 이지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추도식만큼이나 엄청난 인파의 행렬이 린델로 향하고 있다. 시바 대륙에 그리폰이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하늘에 떠 있는 그리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여러 고위관료나 재력가, 모험가들을 옮기고 있었고 마차들은 불이 나게 달리고 있다.
길이 막히는 건 또 처음 본다. 먼 거리에서부터 걸어서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교국에서 자체적으로 이동수단을 마련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도착한 놈들도 눈에 보인다. 신전 밖은 이미 인파로 꽉 채워져 있고 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게 파란 길드 직원들이 불이 나게 뛰어다니는 것이 보인다.
‘시바. 왜 저 인파들 식사를 길드 자금으로 해결해? 아니, 안 그래도 돈 없는데 왜 그렇게 돈을 써? 진짜?’
이미 파산 상태다. 김미영 팀장도 이제 될 대로 되라 상태로 들어간 것만 같다.
‘와, 진짜 시바, 다시 돌아가기 싫다. 저거 재정 어떻게 하지….’
-분명히 빛이 쏟아지는 순간이었어요.
-노을빛이었던 것 같다니까. 석상의 뒤로 후광이 막 쏟아지고 막 조각상이 빛나고 그러는데 어찌나 성스러운 기분이 들던지…. 거, 형님이 좀 달라 보였을 정도였다니까.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기는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소.
-오, 오빠가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해 줬어요. 그, 그렇지 소라야?
-아… 그렇죠.
-그리고 그 조각상 안에만 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막 힘든 것도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니까. 신전이 완성되자마자 결계가 쫙 펼쳐졌다는 거 아니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다들 알고 있을 거요. 형님이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거겠지. 계속해서 우리를 떠올리고 있었던 거요. 이렇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조각상에 자신의 힘을 불어넣었던 거요.
심지어 조혜진도 조금 들뜬 것 같다. 첫날 보지 못해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
-부길드마스터라면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김창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드마스터. 교황청에서 예복을 전해 왔습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이제는 예복까지 등장했단다. 대충 무슨 옷인지 예상이 간다. 아마 사제복이겠지.
아직 이기영 교단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신을 모시는 데에는 적절한 복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 바젤 교황이 배려 아닌 배려를 해준 것이리라.
물론 어느 정도 정치적인 입장도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젤 교황의 뜻은 아니겠지만 이기영 교단이 베니고어 교단의 하위에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겠지.
교단에서 준비한 예복을 입으라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파란 길드의 입장에서도 나쁜 것은 아니다. 성기사인 안기모가 있었지만 뭐 쥐뿔도 아는 게 없고, 사람들이 이만큼 몰렸을 테니 하나의 교단으로 완성됐다는 느낌을 풍기기 위해서는 통일성도 중요하다.
어버버 하면서 신을 모실 수는 없지 않은가. 분명히 베니고어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이 기본적인 예법이나 동선 같은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건 해야 되겠는데.’
거절의 여지가 있다는 것부터가 강압성을 띄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지만 이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다. 김미영 팀장도 그걸 알고 있는지 조용히 김현성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길드마스터.
-…….
-부길드마스터를 본 따 만든 사제복이라고 들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군요.
‘아, 진짜 큰일 났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김현성은 내가 정말 저걸 입을 자격이 있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동하기는 하는 모양.
쟤도 완전 맹탕이 아닌 만큼 저런 게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에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것이 눈에 띈다. 본인 앞에 놓인 옷을 보고도 뭔가 주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방에 준비된 옷을 천천히 갈아입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 본래 사제복은 조금 펑퍼짐한 게 맛인데 꽉 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김현성도 어색한지 이리저리 본인의 모습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전해 받은 로자리오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망했다. 아… 큰일 났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다. 결국에 베니고어 교단에서 사제들이 도착해 김현성과 리허설을 하고 있었고 파란 길드원들도 대부분이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모두가 조금 어색한 것만 같다. 기도를 올리는 자세가 어색해 안기모가 박덕구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지만 사실 안기모도 뭔가 익숙하지 않아 보인다.
한 번 피 맛을 보면 멈추지 않는 아르기르모를 연기하던 녀석이었으니 저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정하얀은 나름대로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다. 뭔가 대단히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이, 이거 어때요?
-아, 제가 조금 잡아드릴까요?
-네. 감, 감, 감사합니다.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는 모습, 모두가 엉성한 가운데 엘레나만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김예리는 이 과정들이 지루했는지 박리안과 알프스 옆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 유아영도 나름 열심히 연습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박덕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는 무척 진지한 분위기. 그 가운데에서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듣는 김현성의 얼굴이 가장 진지해 보인다.
조금 흥분한 거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올지 안 나올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를 직접 대면한다는 종류의 두려움으로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내 배때기를 찌른 것은 녀석이었으니 그것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으리라.
비난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지금 그걸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괜스레 얼굴이 구겨졌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함께 나가시죠. 노을빛의 검사님.
-한 번 만 더 해보겠습니다.
-네, 그럼 이제….
-한 번 만 더….
-네.
-한 번 만….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결국에는 하늘이 조금 붉어졌을 때. 녀석이 조용히 신전 안을 거니는 것이 보였다.
싸울 때는 긴장하지 않았던 파란 길드원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모인 인파들도 쥐 죽은 듯이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긴장이 안 되는 게 이상하다.
걸음걸이가 신경 쓰이는지 박덕구는 뒤뚱거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
베니고어 교단의 사제가 김현성의 머리 위로 성수를 떨어뜨리고 김현성은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신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리라. 저렇게 엄숙한 모습은 또 처음 본다.
자신 있게 영혼의 단짝이 자기라고 말한 주제에 발걸음을 주저하는 김현성.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에게 저주의 목소리를 퍼부으면 어쩌나 하는 종류의 두려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 감내할 수 있다는 듯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신을 위하는 노래가 퍼져 나오고 파란 길드의 사제들이 양옆으로 갈라진다.
김현성은 발걸음과 보폭에 신경 쓰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드리며 조용히 조각상을 올려다본다.
때마침 지는 노을이 신전을 환하게 비춘다. 붉은색의 빛이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조각상에서 후광이 쏟아진다. 모두가 기다리는 것 같다.
‘아, 시바… 이거 진짜 어떻게 해. 지금 나가야 되는 거냐고….’
잠깐 동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지만 동요하는 이들은 없다.
모두 내가 나타난다는 걸 확신하고 있는 느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나타날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시바, 조혜진이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네? 조혜진 님?”
“어쩌면… 길드마스터가 아니라… 저일지도 모릅니다.”
‘…….’
“아무래도 저인 것 같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알프스에게 입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