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4화 마지막 (7) >
‘아니, 같이 해준다니까 고맙기는 한데….’
“무조건 할 거야. 계약서는 지금 쓰면 되는 거지? 그렇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여기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거지? 이기영 후배?”
‘왜 이렇게 의욕적인 거야.’
함께 해준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불안해지기는 또 처음이다.
‘얘 이거 무슨 빚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빚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규모가 걱정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베니고어의 채무는 회사에서 떠안아 줄 수 있고, 또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는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창업한 이후에 빚더미에 파묻혀 파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앞으로 벌릴 신성이 많다고는 해도….
“잠깐….”
“지금 여기에 사인하면 돼?”
“혹시 재정 상태를 제가 잠깐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야. 이기영 후배. 조, 조금 깨끗하지 않기는 한데… 그, 그래도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야.”
슬그머니 베니고어가 손을 뻗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작은 파일 같은 것이 베니고어의 손에서 생성되기 시작, 생겨난 파일을 받아 훑어 내리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쪽의 눈치를 보던 베니고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다.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지?”
라는 말을 내뱉고 있지만 솔직히 안심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충분히 대륙에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채무… 하지만 베니고어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채무이기도 했다.
‘얘 도대체 어떻게 먹고살았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아니 신성을 빌린 건 빌린 건데 이율은 또 왜 이렇게 높아?’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현장.
‘이 정도면 사기당한 수준 아니야?’
사기당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쓸데없는 곳에 신성을 탕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 애초에 사치를 부릴 신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열심히 할게. 이기영 신도. 빚, 빚 갚아달라는 소리도 안 할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응!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걸?”
‘아니야. 네가 뭘 알아서 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베니고어한테 신성 빌려준 놈들 상판대기나 한번 구경해 봐야지.
뭐 이딴 사기꾼 같은 놈들이 다 있어? 있는 놈들이, 시바 더한다더니만. 악마보다 더한 새끼들이 여기 있었네.
“사, 사실 이게 맞는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기영 후배가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을 줄은 생각 못 했어서… 이기영 후배가 나를 믿어줬던 만큼 나도 이기영 후배를 믿기로 결심한 거야.”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이거 좋네.’
작지만 머리 아픈 부분이 하나 해결됐으니까.
“그, 그런데 이기영 후배. 이거 안전하기는 한 거지? 다른 계획이 있기는 있는 거지? 이기영 후배도 알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위의 보호 밖에서 대륙은 운영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서… 물론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위협에 노출되기 쉬울 테니까.”
“네.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떠올릴 수 있는 문제다.
독립한다고 해서 딱히 다른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막말로 베니고어가 말하는 윗분들이 대륙에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서류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로 골머리 좀 썩히거나 여러 가지 소송이 들어올 일이야 많겠지만 악의적인 보복을 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놈들은 빛의 편이라 본인들을 포장하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 생겼을 경우였다.
시스템에 구멍이 생겼을 경우나 악마 놈들이 대놓고 들어와 깽판을 쳤을 경우 말이다.
물론 이놈들이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녀석들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시퍼와 같은 격을 지닌 악마들을 견제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걸 최소화한다는 것만 해도 그들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이번 외신 역시 마찬가지. 놈들이 내게 신성을 따로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 계신 놈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놈들이 책정한 예산은 대륙의 차원 관리비로 사용되고 있었고, 외신들이 진입하는 시기를 최대한 낮추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보험이라는 거다. 놈들은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세를 받고 개입할 명분을 만든다.
완전히 독립한다는 건 놈들의 보호를 완전히 벗어난다는 일이고 그 말인즉슨 우리가 커다란 위험부담을 떠안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뭐, 사실 이 대륙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가정이지만….
왜냐고?
우리 전술 김현성 보유국이자너.
“준비된 거 맞지?”
“현성이 있잖습니까.”
“아!”
“파바박 하고 하늘 갈라 버리는 거 못 봤어요?”
“그, 그러네! 그러네!”
“현성이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위에 있는 놈들이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안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노을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한다는 거 아닙니까. 푸… 푸흡!”
“푸… 푸흡… 그렇네! 노을빛의 신이 해결해 주겠지? 악마 놈들이 나타나도 파바바박 하고 막 전부 다 없애 버릴 거야.”
얘는 왜 나를 따라 하고 그래?
‘우리 회귀자 하나는 정말로 잘 키웠어.’
“위에 있는 놈들은 필요 없겠는걸. 그렇지 이기영 후배?”
상관이 하루아침에 놈으로 변해버리는 기적. 여전히 태세전환은 이쪽 못지않다.
“하여간 그놈들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제대로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말만, 말만 하고 말이야. 조금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 맨날 맨날 규정 어쩌구 절차 어쩌구, 이제 너희들 도움은 필요 없다 이거야! 우리 노을빛의 신이 함께하고 있잖아. 푸…히히힛.”
“…….”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참 노을빛의 신이라는 네이밍이랑 컨셉도 완전 제대로인 것 같더라구. 전략적인 선택이었어.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볼 때마다 노을빛의 신에 대해 떠올릴 텐데… 풍경 자체도 예쁘고 뭔가 신비로운 느낌도 있구… 쏟아지는 신성도 어마어마할 것 같구… 또 이렇게 막 신화를 써 내려간 경우의 사례들을 찾아보면 기존에 자리 잡은 애들보다 충성도가 높아.”
“어쩐지 많이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
“…….”
“그걸 이기영 후배가 어떻게 알아?”
“현성이가 벌어들이는 신성이 제게 쏟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백 퍼센트 들어오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됐네요.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구나….”
“이런 경우가 있기는 합니까?”
“흔하지는 않은 경우지만….”
“…….”
“아마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있어서일 거야.”
“…….”
“하위 신과 상위 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편할걸?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 아니, 신앙의 대상은 아닌가? 조금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뭐라고 단어를 규정짓지 못하겠어. 요지는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있다는 거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이기영 후배가 노을빛의 신에게 일정량을 다시 떼어주는 방식으로 신성을 재정산하기는 하지만… 지금 노을빛의 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니까. 노을빛의 신이 정식으로 임관하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굳이 김현성에게 신성을 떼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관리해 준다고 생각하면 되자너.’
신성이 욕심이 난다기보다는 김현성과 대륙을 위한 일이다. 이 새끼가 낭비벽이 심하다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내 생각이 옳다는 판단이 선다.
‘자기 연봉도 제대로 관리 못 해서 길드 공금까지 횡령하는 새끼가 무슨 신성을 관리한다고… 오버자너. 암만 생각해도 오버자너.’
녀석의 재무 상태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 많은 연봉을 어디에다가 태워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통장은 마이너스가 된 지 오래다.
녀석은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있겠지만 김미영 팀장에게 따로 연락해 비자금을 받았다는 소식도 이미 몇 차례나 전해 받지 않았던가.
가장 최근에 들려온 소식란에는 눈치가 보였는지 몰래 대출까지 받았던 전적도 있다.
결국에는 길드 자금으로 메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에게 신성을 맡긴다는 건 돈을 땅바닥에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완전 개오버자너.’
필요할 때 용돈 주는 식으로 조금씩 떼어주면서….
‘생색도 내야지.’
아껴 쓰라고 요즘 살기 팍팍하다고 경고도 조금 해주면서 이 정도도 많이 주는 거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반항하면 쥐꼬리만큼 쌓이는 신성인데 뭐 그렇게 원하는 게 많냐고 짜증내면서 윽박도 한번 질러줘야지. 찔렸던 배때기 한번 부여잡고 막 숨 몰아쉬면서 이야기하면 거기서 게임 끝이야.
어차피 얘는 지가 얼마나 버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게 맞지.
재무설계사가 괜히 있겠어? 자산관리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아.
괜히 얘 기분 맞춰 준다고 신성 뿌리면 이 새끼가 분명히 하루아침에 말아먹을걸.
‘장담할 수 있자너. 진짜.’
정 크게 쓸 일이 생기면 그때 모아뒀던 거 조금 풀면 되는 거고, 혹시 악마 새끼들 쳐들어오면 그때 또 떼어주면 되는 거고.
김현성한테 맡겼다가 정작 쓸 일 있을 때 못 쓰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 내가 관리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어차피 현성이는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니까.
구태여 뭐 나눠줄 필요가 있나?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신성 쓸 데가 어디 있어? 자기가 대륙을 직접 유지 보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묻어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원활한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건 내가 맡아야 할 것 같았다. 전부 다 노을빛의 신을 위한 일이다.
“노을빛의 신에게는 제가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응. 너무 섭섭하게 하지는 마. 그래도 80%는 재정산해 주는 게 일반적인 관례니까. 아무리 못 줘도 최소 75% 정도는 정산해 줘야 돼. 노을빛의 신이 받아야 할 신성이 이기영 후배에게 갔다는 건 그만큼 노을빛의 신이 이기영 후배를 믿고 따르고 있다는 거니까. 그만큼 존경하고 믿고 있다는 걸 표현한 거라구. 그거에 대한 예의를 표현해야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악습과 관례는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부수기 위해 존재한다.
들어오는 신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일 년에 3%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3%도 많다. 1.5% 정도가 좋을 것 같다.
“네, 물론입니다. 베니고어 님. 그럼 일단 도장 찍으시죠. 아, 그리고 인력이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혹시….”
“으응! 아마 내가 부탁하면 로렌은 와줄 거야. 엘룬은… 한번 설득을 해봐야 될 것 같구… 바리안은… 잘 모르겠네. 인력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될걸? 이미 대륙에 몇 명 있잖아.”
“네?”
“그… 정하얀이랑 그… 무섭게 싸우는 빨간 머리 언니.”
‘네가 언니일 텐데?’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 둘, 아니, 한 명과 한 분이 보여준 업적은….”
신화 속의 장면이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기는 했다. 누가 봐도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으니 몇몇 이들이 그녀들에게 신앙심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론 노을빛의 신처럼 신격화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나 주작이 필요하기야 하겠지만 그 둘이 경계선에 발을 내디뎠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금 특수한 경우지만 로노베와 계약한 그 아이도 가능성이 있더군….”
“어?”
“오랜만이구나. 역겨운 인간아. 아니 이제는 역겨운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군. 동업자? 파트너? 뭐라고 불러야 할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쓴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완전히 뒤로 넘겨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에게 계약서를 보낸 것은 이쪽이기도 했고 저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친애하고 존경하는 벨리알 님.”
“나는 이미 계약서에 사인을 한 채로 온 것이다. 사인하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오지도 못했겠지. 역겹고 더러운 빛아. 내게 그렇게 아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가 네게 아부를 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누가 위에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없으니 맞는 표현은 아니지요. 하핫.”
“네 말도 옳다.”
“…….”
“…….”
“루시퍼 님을 배신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분도 기뻐하실 것이다. 이 벨리알이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것에 감격하시겠지.”
“잘됐군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히죽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27군단이 그대와 뜻을 함께할 것이다.”